I. 현재 한국에서의 ‘실험예술’이라는 용어의 의미


 


 


I-1 실험미술


행사의 주최 ‘한국실험예술정신(KoPAS)’이 부여한 실험예술 용어 사용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발제자에게도 강요된다면, 행위에 기초한 미술유형과 연관하여 이를 살펴볼 본고에서 ‘실험예술’ 나아가 ‘실험미술’이라는 용어에 대한 재정의는 불가피해진다.


 


우선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태도’로 간주되어 통용되어 왔지만 구체적 시기를 거론하는 이론의 장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윤진섭의 논문이나 김미경의 학위논문에 등장하는 ‘실험미술’에 대한 공식적 용어 사용은 2001 ICAS기획으로 오상길이 주도한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로 명명된 기획을 통해서나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한국미술 100년≫ 展 2부에서 1967-1979 시기에 해당하는 미술을 기술하는데 이르기까지 사용되어 오고 있다. 주로 앵포르멜과 단색조 회화 사이에 위치한 오브제미술, 설치, 행위예술에 대한 지칭들이다.


그런데 강태희는 1960-70년대의 시기로 지칭되는 “당시 미술에서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단적이고도 꾸준한 실험정신의 발현은 살펴보기 어렵고, 또한 단색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연속보다는 단절로, 교류보다는 배타적인 영역구축 등 실험의 성과가 계승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 ‘당시 미술을 더 이상 한데 묶어서 실험미술로 부르지 말고 굳이 필요하다면 보다 포괄적이고 적절한 명칭을-예로 들어 더 좋은 대안이 나올 때까지 ‘탈 평면 미술’-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 강태희는 특정 시기나 장르만을 실험미술로 고유명사화 할 수 없다는 일반론 뿐 아니라 당시에 활발한 활동을 해왔던 이건용, 최태신, 이승택, 김용익과의 이에 대한 거부적 견해를 담고 있는 구체적인 인터뷰 결과를 들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미경은 ‘박정희 정부 시대의 사회현상 속에서 ‘다시 읽기’ 위해 어떤 하나의 포괄적 용어를 필요’로 했던 것이 실험미술임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이라는 말로써 시기적, 지역적 영역을 분명히 설정된 것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누보 레알리즘이 프랑스어로, 아르테 포베라가 이탈리아어로, 모노하가 일본어로 미술사에 고유 명사화되어 있는 것을 적시하면서 한국에서도 ‘실험미술’의 용어 사용이 가능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험미술이란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여태껏 ‘지금도 여전히 가능한 하나의 태도나 범주’로 간주되어 옴으로써 탈평면류의 여러 시도들을 암묵적으로 지칭할 뿐, 특정 장르를 지칭하거나 한 시기별 미술을 통칭하면서 사용되는 것을 꺼려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혹자들은 ‘특정 시대의 실험적 미술’을 적시하고 있는 김미경의 ‘실험미술’ 지칭을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young British artists(yBa)가 영국의 모든 젊은 작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1980년대 말에 부상한 데미안 허스트를 위시한 일련의 작가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범주’와 관련한 용어도 고유명사로 충분히 등극될 수 있음을 미술사에서 보아 왔다. 실험미술 용어와 관련한 필자의 견해로는 한 연구자의 사료적 접근을 통한 심층적 연구의 결과가 도래시킨 실험미술 지칭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것은 일반적 언급에 대한 구체화를 단행하는 의미부여로부터 비롯된다. 단지 그것이 통용되기에는 다른 이론가들의 학문적 합의가 필요해질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험미술은 60-70년대 특정 시기 당시에 정초된 용어가 아닌 까닭이다. yBa는 물론이고 누보 레알리즘, 아르떼 포베라, 모노화 모두가 특정 시기 당시에 등장한 용어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60-70년대의 한 미술경향을 ‘실험미술’로 지칭하는 것은 사후 평가에 근거한 용어 지칭이라는 점에서 공론의 장에서 통용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구에서 16세기 미술 양식을 매너리즘으로 살펴보기 시작한 것도 한 세기 뒤의 일이며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드보르작을 위시한 학자들에 의해서 하나의 독자적 양식으로 정초된 점을 상기할 때 김미경의 ‘실험미술’ 지칭은 후발 연구자들에 의해서 그 가치가 재평가되고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한 예를 들어 우리가 1971년에 이르러서 동양화라는 명칭에 휩싸인 문제의식에 직면하고 이에 대한 논란을 거쳐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동양화대신 한국화의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세월이 넘게 걸린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I-2 실험예술


그렇다면 ‘실험예술’이란 용어는 어떠한가?


이 용어는 미술의 장에서 보편적인 태도나 특성을 거론할 때 실험미술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간혹 사용되어 왔을 뿐 특정한 미술유형을 지칭할 때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는 빈번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실험미술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할 것이다.


 


기실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는 오브제, 설치, 행위예술 등이 총괄된 60-70년대의 미술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기보다는 행위예술 혹은 퍼포먼스에 기초한 유형을 지칭하고자 80년대 초부터 간헐적으로 등장하면서 최근에 이르러 퍼포먼스에 내재한 실험성, 실험정신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재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용어이다. 구체적으로는 2000 3월 창립된 한국실험예술정신(KoPAS)이 주도하는 움직임으로부터 활력있게 재창출되고 있는 용어인 셈인데, 이전 세대가 많은 부분 사회에 대한 저항과 표현을 위시로 한 퍼포먼스를 주로 실현해 온 반면 코파스는 이와 차별되게 여러 장르와의 자유로운 소통과 교감을 시도하는 실험적 모색을 위시로 한 퍼포먼스를 전개한다는 차원에서 타 예술 장르와의 혼성형 예술형태를 지칭하는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를 차별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퍼포먼스에 기초한 여러 장르의 혼성형 예술’이 과연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로 정초될 수 있을까? 실험예술이라는 용어가 개념미술, 설치형 오브제 미술, 미디어아트, 웹아트 등 당대의 실험적 경향의 예술들과 차별화되는 용어로 정당한 지위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우선 앞서 나열한 미술들은 등장 당시 ‘실험예술’의 지위를 부여받거나 지금까지 그 지위를 상실하지 않는 경향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장르 역시, 철학+언어+미술 혹은 건축+미술+환경 혹은 과학+미술 혹은 대중문화+예술의 차원들이 복잡하게 교감하는 ‘탈 장르, 혼성 장르’의 것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은 ‘퍼포먼스에 기반한 혼성 장르의 예술 형태’를 실험예술로 다른 예술 유형과 차별화 정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할 것이다. 즉 행위에 기초한 혼성장르의 양상만을 실험예술이라 칭하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는 것이다.


한편 퍼포먼스라는 용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탈장르와 혼성 장르 나아가 총체적 예술의 특성은 ‘퍼포먼스에 기초한 실험예술’이 지향하는 바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퍼포먼스’와 퍼포먼스에 ’실험예술’이라는 용어의 차별화에 주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장에서 용어 사용에 관한 한, 그것은 비평가나 이론가로부터 촉발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창작 주체자의 언명으로부터 기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의 장에서 ‘실험예술’이라는 용어의 차별화 사용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공론화의 장을 의식할 때 ‘동일 인식의 공유’가 전제되는 것이 긍정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할 것이다. 또한 ‘실험미술’이란 용어가 60, 70년대에 등장된 공론화된 용어가 아닌 상황에서 오늘날 ‘소수의 견해에 따른 하나의 용어’로 고려되고 있다면 ‘실험예술’은 오늘날 다종다양한 장르간 연합과 혼성의 체계를 실험적인 태도와 방식으로 모색하고 있는 ‘동시대의 예술 현상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 따른 지칭’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험예술’의 일반화된 용어로부터 특수화된 용어의 도출이 동시대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60-70년대의 미술을 후세에 지칭하고자 고려된 용어, ‘실험미술’의 상황보다는 용인되기 쉽기 때문이다.


 


예술 양식에 대한 동시대의 변모되어 가는 지칭의 흐름은 우리에게 늘 있어왔다. 예를 들어 비디오아트의 경우만 하더라도 초창기에는 TV 아트 일렉트로닉 아트 혹은 아예 ‘비디오’라는 용어로 혼재되어 사용되다 비디오 매체의 예술 가능성을 타진하는 현장을 분석하면서 비디오아트로 통칭되기에 이르렀고 최근 디지털 매체의 부상으로 인해 비디오아트는 미디어아트 혹은 뉴미디어아트라는 상위 개념의 용어에 흡수되어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웹아트는 또한 어떠한가? 초기에는 컴퓨터 아트로 지칭되는 한 지류로 인식되어 오다가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그 획기적인 분기점을 인정하고 나서부터 인터넷 아트, 넷아트, 넷닷아트 등의 용어와 여전히 혼재되어 사용되어오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상황이다.


퍼포먼스에 기초한 실험예술의 용어 사용에 대한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가능성은 동시대의 움직임이라는 차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범위 안에 포섭된다.


주지하듯이 국내에서는 행위예술의 유형이 ‘해프닝’이라는 용어로부터 시작되었다. 1967년 무동인과 신전동인 두 그룹이 〈한국청년작가연립 전〉에서 최붕현의 〈색연통〉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오광수 각본의 ‘최초의 해프닝’이 그것이다. 이후 1968년 정강자가 반누드로 출연한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 같은 해,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주도한 〈한강변의 타살〉 등의 해프닝은 한결같이 알렌 캐프로의 영향이들 작가들이 1959년 뉴욕 루벤스 화랑에서 열린 알란 캐프로의 해프닝을 알고 있었던 관계로 그 유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논의에서 탈장르 및 장르의 혼성, 나아가 총체예술의 상황 그리고 실험정신을 모토로 작금의 퍼포먼스를 실험예술의 용어로 정초하고자 하는 시도가 보다 더 구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1970년 김구림이 주도하여 결성된 제4집단에 대한 전이해가 필요할 듯하다. 이들은 ‘노장사상의 무위 정치론에서 가져왔다는 무체(無体)사상을 통해 정신과 물질의 분리을 지양하고 일체화하는 것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일체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음악, 영화, 연극, 미술, 무용, 문학 등이 종합된 새로운 예술유형을 선언한 이들의 ‘무체 예술’은 통합적 장르 실현이 흐지부지 무산되고 여전히 미술인들이 주도된 행위예술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실험정신을 모토로 작업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들의 예술이 전위예술로 불리거나 스스로 해프닝 혹은 단발적이긴 하지만 대지미술 혹은 환경예술이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 것 또한 실험예술정신을 강조하고 이름에 연연해하지 않으려는 태도 탓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해프닝 이후로 제기된 무수한 용어들, 즉 전위예술, 이벤트, 행위예술, 행위미술, 퍼포먼스, 퍼포먼스 아트, 바디아트, 종합예술, 총체예술, 토탈아트, 최근의 행동미술, 행동주의 예술 등이 시기별 흐름에 따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행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와 같은 용어들 속에서 개별 퍼포머들이 자신의 작업을 정의한 다양한 이름마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오늘날 미술현장의 대세는 퍼포먼스, 행위예술(미술) 등의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코파스가 이러한 퍼포먼스에 기초한 총체예술의 유형과 실험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실험예술이란 용어를 줄곧 사용해 오고 있기는 하지만 60-70년대에 거슬러 올라가는 해프닝에 이르기까지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로 통괄적으로 정초하기에는 무리일 수 있다. 퍼포먼스 혹은 행위예술이라는 보편적 용어가 이미 국내미술사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파스 혹은 이들의 의지에 동조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펼치는 최근의 한 특수한 경향의 움직임을 지칭하는 용어로 국한해서 ‘실험예술’을 사용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실험예술의 근간을 퍼포먼스나 행위예술이라는 보편화된 용어의 연장선상에 놓아두어야함은 물론이다. 여전히 실험예술이라는 태도를 중시하는 의미성의 용어가 행위예술 혹은 퍼포먼스로 알려진 특정 장르의 전체 맥을 상정하기에는 놓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온전히 일상 복장으로 몸의 언어에만 집착하는 유형의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퍼포먼스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 퍼포먼스에는 실험적 정신이 앞서고 있지만 탈장르나 혼성 장르를 지향하는 코파스 류의 실험예술과는 별리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들의 유형마저 실험예술로 지칭하기에는 무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근간으로 하면서 탈장르나 혼성 장르를 의도적으로 지향하는 총체예술인 실험예술의 취지는 이미 그러한 개념을 태생적으로 잉태하고 있는 온건한 개념인 행위예술이나 퍼포먼스라는 용어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실험예술’이라는 특정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탐구해나가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리라 보인다.


첫 장에서의 결론적인 언급은 코파스 류의 예술형태와 더불어 한국의 퍼포먼스를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로 정초화려는 노력이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용어란 어차피 자주 사용되어지고 의미 짓기 행위가 거듭될수록 구체화되는 까닭이다. 특히 동시대 미술 유형에 대한 이름짓기는 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내용까지 함께 아우르기에는 늘 이를 포용할 수 있는 논의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원로 이승택과 같은 이의 자신의 작업에 대해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주장 등이 간혹 있어오기는 했지만 모두를 포용가능한 담합의 용어 규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동시대성이라는 점에서, 이론과 현장의 문제로 코파스 류의 예술형태를 실험예술이라 용어로 정초할 수 있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되 한국의 퍼포먼스 전체를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로 정초화하기에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되 무리가 있음을 필자는 이장에서 결론적으로 피력한다. 오늘날의 운동의 차원으로 과거사를 새로운 용어로 재평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본고에서는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실험예술을, 총체적 유형과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을 중시하는 코파스를 위시한 최근 경향의 내용을 그 중심에 두면서도 퍼포먼스와 별반 차별성을 두지 않는 개념으로 확장하고 이해하여 실험예술의 주제와 형식을 탐구해나가고자 한다. 필자의 견해를 가시화하여 논의의 또 다른 확장을 막기 위해 글의 논리에 따라 ‘실험예술’, ‘행위에 기초한 실험예술’ 혹은 ‘행위적 실험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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