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장 한국 실험예술의 주제
II-1 상부 주제 : 아방가르드와 실험
주로 오브제를 통한 미술유형을 창출한 1960년대의 무동인(無同人)은 해프닝을 작업을 본류로 삼지는 않았지만 이를 작업에 포섭함으로써 국내에서 해프닝의 전조격이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무동인 2회전 카탈로그에 실린 선언은 곱씹어 볼 만하다.
“선언, 우리의 작업은 실험, 무에서 출발, 창조만을 위한 행동이다.”

〈무동인〉, 〈신전동인〉으로부터 촉발된 해프닝에 관해 오광수는 “50년대 뉴욕파의 하나의 논리적 발전으로서 보는 해프닝은, 그러한 논리적인 바탕이 아니더라도 일단 관념의 벽을 깨는 의식의 확대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으며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해프닝은 고식적인 의식의 침체현상을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다”며 긍정적으로 고찰하면서도《청년작가 연립전》이래 이어진 일련의 해프닝에 대해서 “해프닝이 갖는 스캔들리즘과 시위성을 해프닝 본래의 논리적인 전개에서 벗어난 일종의 현실참여란 변질을 가져옴으로써 자연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현실참여로 해프닝의 변질된 아방가르드 정신을 비판하고 있다. 현실참여가 해프닝의 정신을 위배한다고 보는 오광수의 비평적 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언급이다. 오광수로서는 사실 해프닝에 담겨진 정신이란 반전통, 반제도화, 현실참여와 실험이 주무기가 되는 아방가르드 성향에 기초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간과한 셈이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의 이상이 사회개혁이나 정치적인 일련의 행동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해롤드 로젠버그의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오광수가 간과한 내용을 짚어주는 좋은 언급이 된다. 이런 견해는 정치적 아방가르드로부터 잉태한 예술적 아방가르드라는 ‘두 개의 아방가르드’를 고찰하고 있는 레나토 포지올리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무엇인가?
포지올리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행동주의, 적대주의와 허무주의, 투쟁주의와 미래주의, 반과거주의와 모더니즘, 모호성과 비대중성, 비인간화와 성상파괴주의, 의지주의와 현학적 경향, 추상예술과 순수예술과 같은 것’으로 결론내리고 이와 더불어 창조적 실험, 자기 극복, 자기 부정, 자체의 부정’과 같은 용어들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본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60년대 해프닝 이래 행위예술, 퍼포먼스로 일반화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표출된다고 보기에는 세부적 분석이 동원되어야 할 터이지만, 대체적으로 그러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행위예술의 기본 토대가 전위(前衛), 즉 아방가르드 정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의 살벌한 유신체제 속에서 반미학적 태도의 행위예술이 정치적 태도로 둔갑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나 80년대의 행위예술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모색이 친자연, 환경 나아가 반문명의 괘도를 타고 자생성을 지향하는 노력들이 이어져 온 상황 속에서도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그 맥을 이어 왔다. 다양하게 생성된 행위예술제 행사와 그룹의 차원으로 연계되어 확장된 1990년대나 동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나아가 총체적 장르로서의 실험예술을 의도적으로 표방하는 작금의 행위예술의 장에서도 아방가르드는 지속되는 행위예술 정신의 근간임이 분명하다.
작품들을 일일이 거론하는 대신 한국에서의 행위예술의 초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행위예술의 장에 몸담아 온 이승택의 진술로 우리들 논의의 상부주제, 아방가르드 정신에 대해서 살펴보자.
“나는 작품다운 것보다 작품이 될 수 없는 쪽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며 정상보다 비정상에, 혹은 탈관념이나 반예술을 즐겨 찾는 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된 것으로 본다. 해서 어떠한 형태나 오브제, 엽기적, 불쾌함, 추한 것, 성적 도발성 등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급해 온 것은 그것들이 오히려 나를 매료시키며 새롭게 긴장시키는 신선한 감을 주는 모든 것을 나는 예술로 여기기 때문이다. / 원래 예술의 역사란 예술상의 새로운 것의 역사이다, 또 새로운 것은 전(前)의 것과는 다른 것이며 전(前)의 것에 그 새로운 힘을 전파시키는 속성이 있다. 결국 새롭다는 그 원천적 뿌리는 모험적 실험정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체로 나의 지난날의 작업들은 태반이 실험예술이고, 작업현장에서는 격렬한 퍼포먼스였다.”
그의 발언에서 나타나는 비정상, 엽기적, 불쾌함, 추한 것, 도발성은 세부적 아방가르드 정신이라 할 것이다. 주지하듯, 이승택이 언급하는 ‘반예술, 새로운 것, 모험적 실험정신’과 같은 것들이 아방가르드의 주류적 정신이다. 부정의 반미학이든 저항의 반현실이든 실험정신을 계승하자는 오늘날의 행위예술 혹은 퍼포먼스의 장에서의 요청은 결국 아방가르드 원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근본성에 대한 성찰인 셈이다.
회화로부터 액자를 뜯어내고 조각으로부터 좌대를 제거하면서 회화를 조각화하고 조각을 회화화하면서 미술의 장르간 파괴와 영역 확장이 거듭된 지 이미 오래이다. 미술이 문학, 연극, 무용, 음악 등 다른 예술장르와 만나 서로의 영역을 내어주면서 탈장르화되어 오거나 아예 미술이 예술이 아닌 철학, 언어학, 심리학, 과학, 수학, 사회학 등의 비예술 장르와 만나 영역확장을 시도해 오면서 개별 장르에서 논하는 실험성이 용인되기에 이르렀다. 개별 장르의 매체적 특성을 파기, 확장시키는 방식의 이러한 실험성에 행위예술 혹은 퍼포먼스가 선두에 서 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실험성은 한 형식의 아방가르드가 주류의 범위로 편입되듯이 오늘날 보편성 안에 편입되면서 하나의 장르화되는 현상을 우리는 직면한다. 아방가르드의 형식이 구태의 형식으로 안착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는 실험정신이라는 실험예술의 근본성은 태도의 변질이나 다른 세계로의 편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실험정신이란 무엇인가? 실험적 모방이 아닌 모방의 실험화 즉 전통의 현대화를 시도하거나 오브제적 결과물이 아닌 비물질에 대한 관심을 미술화하거나 혹은 일상에 갑작스럽게 개입하는 게릴라적 예술행위로, 혹은 프로파간다적 저항과 성상파괴적인 부정의 지속적인 몸짓으로 혹은 주어진 조건에서 관객의 정신을 예견치 못한 외침으로 흔들어 깨우는 현학적 외침으로 혹은 역사와 환경을 대면하는 선지자적 의지주의로 움직이는 아방가르드적 활력의 근원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실험적 모색이 하나의 태도로 고착화되고 장르화 될지언정 여전히 이러한 전통적인 오브제로서의 결과물이 아닌 행위의 과정이 중시되는 실험정신은 고착화의 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한다. 실험정신은 결코 장르화될 수 없는 자유로운 근원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험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행위에 기초한 실험예술 작가들 대부분이 견지하는 모토(motto)라 할 것이다. 오늘날 일각에서 이러한 실험정신을, 매체적 특성에 대한 실험으로 단순히 바라보거나 지칭하는 오류가 있어 왔음을 상기할 때 행위에 기초한 실험예술은 실험정신 안에 탈매체적 실험을 포섭하려는 끊임없는 자생의 노력을 거듭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II-2 상부 주제 : 소통과 참여- 놀이, 인터랙션
필자는 ‘행위적 실험예술’의 또 다른 주요한 상부 주제를 소통(疏通)과 참여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우선, 소통의 사전적 의미로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라는 해설이나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의미하지만 예술에서의 소통이란 늘 그와 같지 않다. 무수한 해석과 또 다른 평가가 예술적 결과물을 새로운 가치로 정초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영어적 의미인 mutual understanding이나 communication은 결국 발신자와 수신자, 예술의 영역에서는 창작자와 관람자와 같은 두 주체의 유형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 소통의 개념으로 정이되듯이 둘 사이에서는 늘 말썽 아닌 말썽이 난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대면하면서 이해하는 내용이 다른 이들과 늘 같지 않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술적 소통에는 커뮤니케이션은 성취되지 않고 미끄러지며 단지 무수한 의미작용만이 생성’될 뿐이다. 모든 예술이 다 그러하지만 소통 작용을 표면에 드러내는 행위적 실험예술도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의 와해나 그로 인한 소통의 와해가 빈번히 일어날 수 있다. 퍼포머가 의도하는 예술적 행위의 과정이나 결과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창작자가 관람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곡해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그러나 다수의 행위적 실험예술이 출발부터 관객의 적극적 참여와 인터랙티비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염려는 덜 할 수 있다.
그런데 애초부터 관객과의 소통을 무시하고자 하는 행위적 실험예술 또한 존재한다. 이승택은 그의 분신행위예술을 그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내 스스로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사람이 있건 없건/ 깊은 산이나 벌판에서/내가 하고 싶은 것을/나는 오래 전부터 해왔다./ 이번에도/ 관객을 무시하고/ 기존의 구조물과 설치 공간/ 그림과 조각 그리고 오브제를/ 매일 한두 점씩 십오 일간/ 현장에서 제작하고 나서/ 분신행위예술(분신행위예술)을/ 극소수의 뜻있는 전문가와/ 나를 위해 실험 행위 한다.”
오늘날에는 예술가의 자기만족을 위한 실험이 이렇듯 ‘극소수의 뜻있는 전문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무의미해질 수 있을 터이지만 여전히 이러한 자기만족을 위한 실험은 다다 이래로 행위적 실험예술가들의 실험정신 속에서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실험예술가들은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기만족의 실험을 하기 보다는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소통 행위를 더욱 중시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승택의 경우도 거대한 지구본을 짊어지고 다니는 일련의 퍼포먼스나 2002년 인사동 거리에서 도발적으로 펼친 〈AIDS 예방 가두 퍼포먼스〉같은 관객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행위예술을 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어떠한 예술가라도 관객을 언제나 상정하지 않은 채 ‘자기만족을 위한 실험’을 지속할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게 한다. 미학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실험을 지속해 온 이건용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주로 자기만족적 실험을 위한 일련의 이벤트를 보여 온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작업들 외에도 〈독 속의 문화〉와 같은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한 작업도 있었음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적극적인 관객참여를 유발하는 형식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관객과의 긴밀한 소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메시지를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적 실험예술은 그 유형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관객참여를 통한 소통이 필수적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소통에 관한 한, 그것이 열려진 보편성의 관객참여를 설정하든가 아니면 적극적인 관객 참여를 시도하든가 식의 차이가 존재할 따름이지만 말이다. 관객참여, 놀이, 인터랙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소통’을 자신들의 행위예술의 주요특성으로 자평하고 있는 작가들의 직접적인 언술을 참고로 살펴본다.
“설치, 페인팅, 연희, 소리 등의 표현어법과 그를 통해 표현되는 기호 상징체계, 암시적 이미지를 통합하여 예술적 의미의 소통과 공감대를 확대하고자 하는 장이다.”(김광훈) / “나의 퍼포먼스는 항상 사회적 긴장을 찾아 나서고 그 긴장관계 속에서 새로운 맥락을 찾아 나선다.”(김강, 김윤환) / “작품은 더 이상 관객들의 눈요기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관객과 만나 대화하고 그들과 협력을 바탕으로 참여형태의 예술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관객참여 예술이요 민주주의 예술이다.”(김재권) / “자연과 환경에 대한 경고를 인식하여 관객들과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행위예술을 통해 소통과 교감으로 환기 또는 병치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류환) / “예술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려면 예술과 인간, 예술과 삶이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트는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인간의 정신을 팔아야하기 때문이다.”(문정규) / “나의 행위예술은 신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동시간 살아 숨쉬면서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전달매체가 아닌가 한다.”(방효성) / “나의 performance는 여러분의 삶에 문화라고 하는 입장권을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여려분으로 하여금 인간적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질문하도록 한다.”(성능경) / “신체의 흐름이 영적인 흐름과 만나는 순간 자신의 사상을 행위라는 임팩트로 승화시켜 대중에게 다가서게 된다.”(소니아) / “한국에서 만든 퍼포먼스들은 사회성과 계몽성을 가졌기 때문에 관객과의 의사소통에 중점을 두었다.” (소니아 한) / “작가는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관객이 작가를 향한 응시와 충동을 통해 그들을 보여줌으로서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송대규) / “나의 퍼포먼스는 일단 관객과의 끊임없는 긴장과 이완의 관계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신종택) / “기존의 미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을 Body로 표현하기 위한 필연적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현 방법이다. 즉 우리의 삶이 자유로운 것처럼 굳이 구분 또는 분류가 필요치 않은 표현 도구이며 관객과의 교감을 이루어내는 인터랙티브한 요소가 현실감을 더해주기 때문이다.”(심영철) / “미술 표현의 주체, 즉 나의 신체와 사물과의 접촉성에 의한 결과만이 보임으로써 묵인되고 감춰지며 증발되어버리는 과정(to become)적인 모든 상황들이 시간과 공간의 장(場)속에서 관객과 밀접한 유대의식을 갖고 행위의 방법을 통하여 되살아날 것이다.”(안치인) / “나는 퍼포먼스 작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겐 늘 특별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그 어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통해 함께 공유하고 그렇게 공유함으로써 일어나는 반응과 움직임들을 포착하려 노력한다.”(윤성원) / “나 자신, 그 자체가 살아있는 미디엄으로서 직접적인 관객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싶어서 퍼포먼스를 시작하게 되었다.”(이윰) /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그렇게 얻어진 에너지는 서로의 소통을 도모하는 난장을 형성함으로써 맺힌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가고 그 사이의 화해를 도모한다.”(한영애)
위에 언급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행위적 실험예술가들은 현실에 대한 저항적 주제를 담든 기존예술에 대한 반미학적 주제를 담든 아방가르드적 실험예술을 중시한다. 이러한 실험적 인식은 전달하려는 암묵적 혹은 계도적 메시지에 대한 주의, 환기 혹은 계몽의 차원을 담보하기 위해서 관객과의 소통을 필요로 한다. 관객과 함께 완성되는 과정의 예술이자 시간예술인 탓이다.
그런데 적극적인 관객 참여를 요구하든 단순히 관객을 상정하고 벌이는 행위이든 그 소통의 유형이 관객과 조우하는 놀이와 인터랙션으로 표출된다는 것을 살펴보는 일이 주요하다. 미학적 소통이 앞서는 70년대의 이건용의 무수한 이벤트들은 대부분 적극적인 관객 참여를 요청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인터랙션을 염두에 두고 있는 놀이의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건빵 먹기〉에서 이건용은 건빵을 먹을 때마다 팔을 펴 보조자가 막대를 대고 깁스를 하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팔꿈치까지 깁스를 하기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팔이 불편해진 상태에서 허리를 굽혀 건빵을 집어먹어야 하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이 행위는 외부로부터 오는 조건에 의해 신체가 점점 더 구속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개념적 퍼포먼스인 셈인데 개인주체에게 작동하는 사회, 문화적 억압을 유추케 하는 지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몸의 구조와 논리를 실험하는 ‘개념적 놀이’로 진단될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장소의 논리〉나 〈동일면적〉〈달팽이 걸음〉에서 보여준 장소와 시간에 개념적 탐구는 몸을 운용해서 선보이는 개념적 놀이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용과 더불어 행위적 실험예술의 장에서 ‘개념적 놀이’의 작품을 발표한 대표적 작가는 성능경이다. 그는 작업 〈신문 1974. 6.1-6.27〉은 4면의 흰 판넬 위에 붙여놓은 동아일보를 여덟 면을 매일 교체 부착 전시하면서 기사 부분만을 면도날로 오려내면서 바닥에 준비한 아크릴 통 2개에 오려낸 기사 부스러기와 오려낸 신문을 분리, 보관, 전시한 작업이다.
그의 작업은 집요한 노동력이 요구되는 해석적이고도 개념적인 놀이의 형식이었다. 다분히 정치비판적이었던 성능경의 지적 놀이 형식은 최근 작업에서는 관객과의 당혹스러운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해학적이고 유희적인 놀이의 형식으로 변모했다. 모자와 우스꽝스러운 얼굴 분장을 하고 행위를 펼치며 대립과 충돌, 마찰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유희적 놀이 형식은 관객과의 적극적이고도 직접적인 소통을 이루게 된다.
안치인, 문정규, 김재권, 이상진, 심홍재, 안필연, 이혁발, 한젬마, 김광철, 홍오봉, 도지호, 방효성, 회로도 등 작업의 양상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에게서 놀이의 특성은 도드라지게 감지된다. 행위적 실험예술에서 놀이란 퍼포머가 스스로와 대면하여 벌이는 놀이와 더불어 관객으로 침투하거나 관객을 초대하는 방식의 놀이의 유형으로 구분되고 후자의 경우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놀이의 유형과 마술이나 축제적 공연과 같은 유희적 놀이의 유형 등이 존재한다. 이처럼 소통이란 주제로부터 발현되는 놀이의 개념은 다원화되어 관객과 교감을 시도한다. 특히나 단지 관객을 설정만 되어있을 뿐 수동적인 개념으로 치환되고 있는 편집증적이고 자폐적인 움직임을 지속하는 놀이들은 많은 부분 미학적인 개념을 품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반면 과정 속에 관객을 초대하거나 그들에게 개입하는 식의 적극적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놀이의 개념은 대부분 사회, 문화적 개념으로 확장되는 것들로 소통이라는 주제를 매우 친밀한 것으로 정초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