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토’(樂土) 시리즈를 중심으로
서론
손동진1) 회화를 연구함에 있어 상기의 연구주제를 살펴보기 위한 전초단계로 그의 다음 발언을 곱씹어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내 그림의 테마는 달빛 환상입니다. (...) 또 하나는 경주를 테마로 한 낙토(樂土)지요. 항상 이 두 가지 테마를 가지고 그립니다. 초창기에는 한 6년 동안 탈춤을 테마로 삼기도 했어요.”2)
상기의 발언 시점인 1993년 10월 17일은 한국에서 가졌던 가장 최근의 개인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대규모 초대전3)을 바로 앞두고 있었던 때였던 만큼, 당시 72세인 작가의 전체 작업에 대한 확정적 진술이라 할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진술이 유효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도 〈낙토〉나 〈달빛 환상〉이라는 테마를 통해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달빛 환상〉시리즈와 더불어 손동진 회화의 주요한 테마로 거론되는 〈낙토〉시리즈를 집중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의 작품에 나타난 ‘전통의 개성적 현대화’에 대한 일관된 주제의식을 연구하고자 한다. 이 시리즈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60년대 초반기 작업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전 작업에 함유되어 있는 그의 고향 신라 고도 경주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그 주제의식이 함께 고찰될 것이다. 단지, 2000년 이후의 자료 취합이 미비한 상태로 이루어진 분석으로 인해 최근 몇 년간 제작된 작품 분석은 필연적으로 간과되어 있음을 부기해둔다.
1.〈낙토〉시리즈의 시기적, 양식적 구분
밀접한 주제적 유사성을 담고 있는 〈낙토〉시리즈와 〈달빛 환상〉시리즈는 동시대적으로 등장한 테마이지만 구체적으로는 낙토 시리즈가 달빛 환상 시리즈보다는 비교적 초기적 관심으로부터 유발하고 있다. 그것은 80-90년대의 낙토 시리즈가 〈석굴암〉(1962) 이래로 〈신라시대〉(1971),〈황룡사 옛터〉(1971),〈고분벽화〉(1973, 1975),〈이조백자〉(1976) 등의 제목으로 등장한 〈蹟 vestige〉시리즈나 또 다른 70-80년대의〈stram〉시리즈, 80-90년대의〈composition〉시리즈 등의 형식적 특성을 공유, 계승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회백색, 황녹색, 갈색, 적색 등의 비정형 도형들이 구상적 영역으로부터 추상화되어 가는 경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이러한 형식적 계승은 80-90년대 집중적으로 제작되고 있는 〈달빛 환상〉 시리즈에서는 한층 풍부하고 미묘한 형식적, 주제적 변주를 가지고 확장되어 가고 있다.
최근 작가는 한 아트페어4)에 이전 작품과는 달리 상형문자의 형태가 강조된 〈낙토〉시리즈를 출품한 바 있듯이 〈낙토〉 시리즈는 200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도 형식적인 변모가 있을지언정 줄곧 일관된 주제로 나타나는 현재진행형의 작업이 된다.
〈낙토〉 시리즈의 태동과 〈낙토〉에 나타난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손동진의 전 작업을 아우르는 시기별 구분을 검토해본다. 이와 관련한 ‘황지우의 견해’5)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손동진의 회화사를 50년대 파리시절을 제 1기로, 6,70년대 서울 시절을 제 2기로, 그리고 오늘날의 두 번째 파리 시절을 제 3기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그는 손동진의 작품의 양식적 변천을 두 단계로 분석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1957-9년에 그려진 탈춤 연작을 기점으로 1970년 신세계갤러리에서의 탈춤을 주제로 한 개인전과 더불어 1976년 기마상, 반월성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적인 것에의 아케이즘’이고, 다른 하나는 손동진의 1976년 재차 도불 이후 주로 80년대에 그려진 ‘정신적인 것의 문양에 대한 명징한 구성주의’라는 분석이었다.
황지우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낙토〉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서는 두 번째 파리 시절인 제 3기, 그리고 양식적 변천에 따라서는 ‘정신적인 것의 문양에 대한 명징한 구성주의’에 포섭된다. 하지만 당시의 황지우의 분석 시점이 1987년이었다는 점에서, 손동진의 87-90년대의 작업을 추가 분석해야 될 필요성은 물론이고 도불 이후의 그의 견해에 대한 일부 수정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동시대 80년대부터 활발하게 모색된 〈낙토〉와 〈달빛 환상〉시리즈를 동일 유형으로 결론짓는 섣부른 판단에 대한 수정을 지칭한다. 두 시리즈의 출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양식과 형식에 관한 분류라면 당연히 낙토와 달빛 환상 사이의 정체적 특성은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시리즈 사이의 차별점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제 2차 도불시점인 1976년 이전을 ‘전통의 모색’, 이후를 ‘전통의 개성적 현대화’로 살펴보면서 제 2차 도불시점인 3기 이후의 양식을 다음처럼 또 다시 구분해 보고자 한다. ‘추상적 구성주의’(abstract constructivism)와 ‘형상적 조형주의’(figurative plasticism)가 그것이다. 전통 정신이 비정형 도형으로 조우하고 구성되는 〈stram〉시리즈,〈composition〉시리즈나 〈락토〉시리즈가 전자에 해당된다면 이와 대별되게 전통의 이미지가 문양이나 구체적인 형상으로 조우하고 맞부딪치는 〈달빛 환상〉시리즈와 이와 유사한 형식의 다수의 작품들- 〈추월(秋月)〉,〈윤일(潤日)〉,〈정월(淨月)〉,〈만월(晩月)〉과 판화작품〈상(尙)〉,〈오(吾)〉그리고 한지 작품 〈5월〉,〈소녀〉등은 후자에 해당된다.
단지 두 유형이 80-90년대라는 동시대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징한 양식적 구분이 쉬운 것은 아니다. 또한 파리 보자르(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de Paris) 재학시절과 갓 졸업한 이후에 제작한 초기의 일련의 작품들이 구체적 양식은 다르지만 조형의 특성상 ‘형상적 조형주의’에 해당되는 있음에도 그 스스로 〈구성(composition)〉이라는 제목을 부기하고 있음은 이러한 우리의 분석을 난감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추상적 구성주의’와 ‘형상적 조형주의’라는 대별이 ‘추상’과 ‘형상’이라는 구분을 연상시킴으로써 그의 작업의 전체상을 읽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손동진의 작업을 ‘정신적인 것의 문양에 대한 명징한 구성주의’로 살핀 황지우나 ‘구성적 조화의 형상’으로 파악한 이구열6)의 두 견해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보는 세부적 분석이 된다.
따라서 〈낙토〉는 손동진의 회화 세계에 있어 80-90년대 촉발, 만개되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시리즈 작업 중 하나로 동시대에 전개된 그의 달빛 환상 시리즈와 그 형식적 유사성을 공유하면서도 그보다 더 ‘추상적 구성주의’에 가까이 들어앉은 작업으로 풀이된다.

2.〈낙토〉이전(1954-1976), 경주로부터-전통의 재발견
시리즈 작품,〈낙토〉(樂土, Earthly Paradise)는 그가 언급하듯이 그의 고향 경주(慶州)를 대상화한 테마이다. 경주가 우리들에게 상기시키는 이미지, 즉 신라시대의 찬란한 문명이 아로새겨진 고도(古都)라는 특성은 그것을 주제로 한 ‘낙토’ 시리즈가 당연하게 내포하고 있을 한국의 고전과 민족적 전통에 대한 인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낙토〉 시리즈 이전의 작업들, 즉〈탈춤〉을 위시로 한복을 입은 남자가 피리를 불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는〈피리〉와 같은 작품들 역시 한국의 전통적 소재를 통해 의고주의(擬古主義)라는 아케이즘(archaism)의 특성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들이다. 낙토 이전에 이미 한국의 고전과 민족적 전통에 대한 인식이 작가관에 투입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작업들 역시 그의 고향 경주에서의 성장과정에서 잉태한 고전적 전통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표출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번 장에서 살펴볼 〈낙토〉 이전7)은 손동진의 1차 도불(渡佛)(1954)로부터 2차 도불 이전(1976)까지의 시기로 할당해 본다. 이 시기는 그 이전인 동경예술대학과 대학원에서의 수학기를 제외하고 서구문명을 수혜 받으며 본격적인 창작물을 다수 생산해 온 파리 유학기로부터 이후 귀국 후 대학의 교수로서 자리를 잡고 활동하던 국내에서의 활동을 포함하는 기간이 된다. 특히 1954년 도불 이후 한국적 전통의 재발견과 모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대한 고찰은 1976년 이후에 등장한 낙토 시리즈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손동진은 1952년 동경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1954년 동 대학원을 수료하자마자 프랑스로 떠난다. 그가 이듬해 국내의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는 당시의 도불 이후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통에 관한 작가인식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서양의 고전과 근대미술에 접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온 후 이러한 나의 생각은 다소 수정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너무나도 구라파의 근대적인 미술활동을 추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곳에 와서 우리가 가진 고전을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게 됨은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낙랑, 신라, 고구려시대의 찬란한 예술전통을 우리가 각성한다는 것은 귀중한 일일 것이다. 전통 속에 약동하는 새로운 생명-나는 이러한 의식 속에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8)
서양의 고전과 근대미술에 대한 갈증으로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해서 수많은 명화들을 보고 얻었던 감흥과 더불어 손동진은 서구 고전의 대가들 앞에서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한 듯 느닷없이 찾아온 착잡한 심정 탓에 창작에의 번뇌와 방황을 거듭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15세기 피렌체 화가 파울로 웃첼로(Paulo Uccello)의 작품을 맞닥뜨린 후 창작에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의 언급대로 “타국의 전통 있는 예술을 아무런 혈연도 없는 우리가 구라파의 근대예술활동을 표면적으로 추종한댔자 예술에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9)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곧 우리가 가진 고전시대의 찬란한 예술전통에서 도약하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의식으로 서구미술과 대결하려는 통렬한 각성을 통해서 한국 전통에 대한 재발견에 당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는 손동진에게 있어, 파리에서 일련의 체험적 사건들로부터 연유한 ‘각성’을 통해서 이르게 된 ‘한국 전통에 대한 재발견’이란 결국 창작세계에서는 경주의 전통으로부터 출발하게 된 것임을 확증하는데서 출발한다.〈탈춤〉시리즈나 〈윤월(潤月)〉10),〈한일(閑日)〉11), 〈작품〉12)과 같은 작업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십이지신상을 표현한 작품 〈운(韻) Rhyme〉13) 그리고 신라5-6세기의 토기로서 국보 91호를 표현 혹은 변형한 작품 〈기마상(騎馬像)〉14)과〈목마〉15)와 같은 작품들 나아가 〈신라시대〉16), 〈경주(慶州)의 이미지〉17) 와 같은 작품들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 전통의 인식과 더불어 신라의 고도 경주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키기에 족하다.
이렇듯, 1954년 1차 도불 이후 1950년대 중반-196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이나 한국에 귀국 후 제작한 1970년대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경주 발(發) 한국 전통의 재발견과 그에 대한 모색’이 작업의 중심주제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제 1차 도불이후 손동진이 재발견하였던 한국 전통을 미술언어로 가시화했던 1959년 당시의 개인전을 바라보던 프랑스 현지의 시각은 어떠했을까? 루이 들랑그(Louis DELANGHE)라는 미술평론가는 다음처럼 그의 당시 작업을 평하고 있다.
“동양적인 기원을 부인할 수 없는 그의 매우 개성적인 색채감성은 서구의 고전 및 현대 회화에 대한 진취적 인식을 드러내면서 화면 구성에 대한 면밀한 모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태어난 손동진은 온통 시와 하모니 그리고 신선함이 가득한 작품들을 우리에게 가져왔다. 이들 속에는 진정한 탐구와 더불어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한 큰 사랑과 미묘하고도 세련된 감성이 표현되어 있다.”18)
구체적으로 당시의 카탈로그를 살필 길이 없으나 이듬해 1959년 중앙공보관에서의 개인전에 대한 리뷰로 파악되는 김병기의 글19)을 살피면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이르는 과정”이나 “서구의 고전과 동양의 감성이 어떤 아름다운 결합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에서 추측할 수 있는 형식적 특성과 한국적 전통에 관련한 주제에의 관심을 역력히 확인해낼 수 있다. 1958년 당시 짧은 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현지에서의 평가가 사실 작품에서 나타난 조형결과에 대한 피상적인 분석에 그치고 있다는 인식이 가능한 것은 손동진의 ‘경주로부터 발원한 전통의 재발견’이라는 사실을 심층적으로 검토하지 못한 탓으로 파악된다. 서구인의 눈에 당시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음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그에 대한 인식은 손동진에게 있어서 1차 도불시로부터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 근원적인 배경은 그의 고향인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로부터 발원한 분명하다. 당시 작품과 작품론에는 붉은 빛과 오방색의 색면 구성이라던가 전통 유물에 대한 소재주의나 우리 것에 대한 정신성 탐구가 잘 묘사되고 있듯이, 그의 전통에 대한 재발견은 어린시절 경주에서의 성장과정에서 겪은 개인적 체험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즉, 기암괴석과 황토가 어우러진 경주 남산(南山)의 반월성(半月城) 옛터의 구릉을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체험이 그것이다. 그곳은 찬란한 역사와 전통이 아로새겨진 천년 고도 경주의 불국토(佛國土)가 아니던가?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주홍, 갈색 등의 붉은 빛 화면들은 그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경주 남산의 황토를 상징하고 있다.
한편, 상기의 관점에서 손동진 작업에 나타난 일관된 전통에 대한 관심을 그가 성장한 경주에 기반한 가계적 배경으로부터 추출한 ‘민족-부르주아지’개념으로 분석해내고 있는 황지우의 견해20)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손동진의 가계가 천도교(天道敎)를 가종(家宗)으로 하고 있어 그가 태어나 성장할 시점에 그의 가계에미친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연스레 습득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조선조 후기 경주 지역에 최제우의 동학 세력이 크게 세력을 떨쳤을 뿐 아니라 1919년 3.1운동에 미친 천도교의 영향력을 추정해볼 때, 손동진의 출생년인 1921년 당시 그의 가계에 내재된 민족주의적 정서와 그 영향력을 충분히 상상 가능하게 한다. 특히 그의 외조부 조창수(趙昌洙)의 하와이를 근거로 한 해외독립운동의 영향력은 어린 손동진에게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심어주었을 가능성을 추측케 한다. 여기에 고대 신라 6촌 중의 한 촌장인 손순(孫純)을 조상으로 하고 다수의 학자들을 배출했던 가계사와 더불어 물질적으로 유복했던 당시의 가정환경21)은 손동진으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의 인식을 가능케 했음을 십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손동진의 경주에 기반한 가계사에 깃든 반외세주의, 수구 민족주의를 함유하는 ‘민족-부르주아지’의 인식은 그의 예술세계에 있어서 우리의 것, 한국적인 것 그리고 전통의 문제를 고찰할 수 있게끔 한 원천이 되었음은 바이오그래피를 통해 고찰해 보는 작가론 연구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전통에 대한 재발견이 제1차 파리 도불 시기로부터 기인하고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경주로부터 발원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작품에 드러난 형식적 특성이 경주의 유적, 유물의 이미지와 그 정신성의 구현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출하고 있는 우리들의 연구에 보태는 또 다른 작가론에 대한 선이해의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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