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 9.16 파리 근대미술관
예술은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작업했던 러시아 구성주의 사진가 로트첸코(1891-1956)의 대규모 회고전이 파리의 근대미술관에서 열렸다. 구시대의 산물인 이젤회화를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매체를 추구했던 그에게 사진이야말로 문맹의 대중을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매체가 된다. 그가 “예술은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연극과 영화, 텍스타일, 그래픽 디자인, 책과 잡지의 편집 등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분야를 통해 예술이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표현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카메라의 시선을 파괴하고, 과감한 부감촬영과 상향촬영, 근접촬영의 구사, 강렬한 콘트라스트와 획기적인 앵글의 사용 등은 시각에 대한 고정관념에 충격을 주고 의식의 전환을 꾀하는 ‘눈 속의 혁명’ 이었다. 하지만 1933년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모든 예술가의 독트린이 됐을 때, 이 시각의 혁명은 ‘형식주의’로 낙인 찍히고, 로트첸코는 예술가 연맹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만다. 로트첸코의 형식적인 시도에 초점을 맞추 고 있는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역사적 문맥은 포커스 아웃 처리되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프로파간다를 만들었던 공산주의의‘생산제일주의’와 공식화가로서의 로트첸코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위지(Weegee) : 베리슨 콜렉션
6.20 - 10.15 파리 마이올 미술관
위지(1899-1968)는‘주관적 다큐멘타리 사진’을 개척한 포토저널리즘의 신화적 인물. 폴란드 태생 유태인으로 부모를 따라 1910년 미국에 이민 온 이후, 뉴욕의 로워 이스트 사이드 빈민가에 정착했다. 금주법이 발동하고 폭력조직들 사이에서 보복전이 한창 진행되던 1927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후 1935년부터는, 독립 리포터로 활동하면서 밤마다 맨하탄 경찰서 주변을 맴도는 밤의 야수처럼 사건을 쫓아 다녔다. 위지는 스튜디오로 개조한 자신의 자동차에 후레쉬, 필름, 타자기 등 촬영과 기사작성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고, 신속성을 더하기 위해 경찰들이 사용하는 단파를 잡을 수 있는 수신기까지 설치해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사건현장에 도착해 사진을 찍었다. 강한 후레쉬 아래 그대로 노출된 시체 사진처럼 범죄와 사건의 현장들을 여과 없이 노골적으로 찍은 그의 사진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란 상반된 반응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의 사진들은 위트와 아이러니라는 필터를 통과하고 있기에, 단순히 자극적인 스펙타클을 원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사진 속에 나타난 뉴욕은 경제대공항 직후의 어둡고 불안한 사회이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 유명인과 익명인, 부랑아들과 경찰이 어색하고 우스꽝스럽게 공존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위지 특유의 감각을 통해 더욱 부각된다. 스스로 이방인 혹은 주변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회계층에게 그가 던지는 시선은 가식적인 동정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때 생기는 진실한 관심과 부드러운 애정이 담긴 것이었다.

피에르와 질(Pierre et Gilles)의 <이중 자아>
6.26 - 9.23 파리 주 드 폼므
<이중 자아>는 사진과 회화라는 상반된 두 매체를 결합하면서 시작된 피에르와 질의 지난 30년 간의 공동작업을 기념하는 회고전. 신화, 종교, 대중문화, 사회적 문제 등 테마별로 구분한 다소 식상하고 도식적인 전시구성과 함께, 이들의 작업을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한 소극적이고 무미건조한 디스플레이로 인해 기대에 못미치는 전시였다. 다만 이 전시가, 키치라는 개념이 하나의 중요한 ‘예술적 전략’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대미술에 있어서, 과연 이들의 작업은 키치와 예술 사이 어디에 위치하며, 예술은 키치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어서 나름대로 그 의미를 찾을 수는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