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그룹 들풀전
비담론적 장치를 탈주하는 ‘행동주의 소그룹의 시각 담론’
김성호(미술평론가)
80년대 민중미술의 근본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 돌파를 위해 고민해 오던 행동주의 미술 그룹 ‘들풀’의 전시가 새로운 이념의 기치를 들고 재개한다.
그룹 ‘들풀’은 80년대의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거나 계승한 회원들이 주축이 되었음에도 주로 그 활동배경이 90년대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시도했던 걸개그림 등의 공동창작 방식은 80년의 유산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한 이념의 한 목소리’이기보다는 ‘다양한 이념의 한 목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이유는 민주화되어 가는 달라진 시대의 기류도 원인이었겠지만 삶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미시적 사건들에 발언해야 하는 책무들이 그들의 행동주의 예술을 다양한 국소적인 사건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함으로써 단일한 공동의 이데올로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 탓이었다. 오늘날에는 그룹의 구성원들의 작가적 관심이 보다 더 다양해진 까닭에 한 목소리의 힘이 더 분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9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그룹 ‘들풀’의 위상은 민중미술 류의 ‘계몽적이거나 교조적인 리얼리즘’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면서도 여전히 ‘공동체의 힘 있는 미술’을 펼쳐나가고자 하는 지향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그룹 ‘들풀’은 올해 정기전의 테마를 아이러니하게도 ‘담론’으로 설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담론(discourse)이란 용어는 ‘주장, 구호, 강령, 훈시’와 같은 ‘닫힌 언술’의 범위를 넘어서 오늘날 ‘의견, 사상, 이론, 해석’과 같은 ‘열린 담화’의 체계로 풀이되고 있는지 오래된 탓이다. 전자가 소쉬르, 프로이트, 라깡으로 대변되는 구조주의의 산물이라면 후자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로 대별되는 후기구조주의의 영향권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 자체도 구태가 되어 가는 21세기의 시대에 ‘담론’은 피상적으로 행동주의 미술 유형에 적합하지 않는 용어가 된지 오래다.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공동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결집된 논의를 촉발하는 행동주의 노선에는 소통의 체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담론의 구성’과 ‘담론의 질서’가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즉 구호와 같은 기표 아래에 주장과 같은 기의를 매다는 일이 주요한 행동주의 미술에서는 상호간 뒤섞임을 통해 끊임없는 새로운 기호창출과 무수한 해석의 지평을 용인하기에 못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룹 들풀의 오늘날 위상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담론이란 주제어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행동주의 미술의 또 다른 위계를 확장하는데 유효한 개념으로 확장된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사건의 철학’인 셈이다. 즉, ‘비물체적인 것의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의 철학은 담론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점이며,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간극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양자의 겹침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광인에 대해 언급하듯, 정신병이란 대상은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정의되고 정신병원이라는 비담론적인 장치에서 유발되며 감시와 규율은 그것의 사건이듯이 말이다. 이 말을 그룹 들풀의 이번 전시와 빗대어 풀어보면, ‘들풀 정기전’이란 대상은 ‘해석, 비평’이란 담론 안에서 정의되고 ‘전시장’이라는 비담론적 장치에서 유발되며 ‘전시행위’는 그것의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와 관련한 우리들 논의인 ‘담론’에서 더 유효해진 것은 전시행위라는 사건과 전시장이라는 비담론적 장치이다. 들풀이란 야초(野草), 즉 ‘들에서 나는 풀’을 의미하면서도 특정 개체를 의미하기 보다는 이름 없는 잡풀을 통칭하는 보편성에의 명명(命名)이다. 그런 점에서 그룹 들풀에게 있어 화이트큐브와 같은 특정한 전시장이라는 비담론적 장치는 앞으로 이들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표출시키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물론 그룹 들풀의 최근 모습은 회화, 설치 등의 양식적 다양성은 물론 그 주제에 이르기까지 행동주의 미술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그룹 구성원들의 개별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면서 단지 그룹의 이름으로 한데 묶이는 것에 자족하고 있을 따름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룹의 이름을 여전히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이전의 위상 역시 폐기처분하지 않고 일정부분 지속해야할 당위성이 요청된다. 그런 점에서 행동주의 미술을 효율적으로 지속하기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실내의 전시공간이기 보다는 삶의 터전으로 흩어진 비고정적 전시공간-일테면 야외 혹은 공공의 장소-을 찾아나서는 노력들이 고려되어야 할 듯싶다. 그룹 들풀에게 있어서 담론의 활성화란 ‘비담론적 장치인 전시공간’의 획일성, 고정성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는 외연 확장이 그 관건으로 보인다. 그것은 고정된 특수성을 뒤엎고 하버마스 식으로 다양한 보편성을 찾아나서 열린 소통의 체계를 구축하는데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룹 구성원들 사이의 담론을 활성화시키는 내연 심화의 과정이 미술그룹의 위상을 담지한 채 지속적으로 병행되어야 할 터이지만 말이다. ■
출전 /
김성호, '비담론적 장치를 탈주하는 행동주의 소그룹의 시각 담론', (들풀 그룹전, 2006. 2. 3-10, 도봉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