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oop 5: 정신 착란의 공간(Delirious Space) 주4)
1998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마니페스타 2>에서 스칸디나비아 작가 멜가드(BjarneMelgaad)는 현기증 나는 현장적 효과와 심미적 쾌감을 유발하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바닥면 보다 약간 높은 난간에 서자 시야에 확 들어오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그리고 아주 맑은 깊은 푸른색이다. [뉴로맨서](1984년)의 저자 윌리엄 깁슨은 이런 시적인 표현을 했다. . 항구 위의 하늘은 채널이 죽어버린 TV 색 처럼 푸르렀다. 이 장면은 깁슨이 상상한 거대한 스케일의 TV 스크린 블루가 되어 나타난 것인가? 관객은실시간, 실공간에서 파란색 타일이 바닥에 깔린 수영장을 들여다 보고 있다는 자신에
다시 놀라게 된다. 직사각형의 파란색 수영장은 건물 내부에 본래 있던 것으로 깨끗한물로 가득 채워져 청명함과 신비감을 더해주는데, 수영장의 짧은 쪽 면에 대형 캔버스가 반은 물에 떠있고 반은 풀의 바깥 속에 걸쳐져 있다. 그림들은 백색 캔버스에 수영장 물색과 동일한 블루에다 빨강, 검정, 짙은 파랑으로 불규칙적으로 비벼대고 스크래치를 낸 이미지들이다. 조금씩 다른 크기의 그림들이 수영장의 벽에 기대어 적당히 흩트러져 있다. (도판14) 네트 위를 서핑하는 서프 보드 같은 커다란 크기의 드로잉들,개와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스티커들로 된 깃발들, 슈퍼마켓에서 팩으로 산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들이 바닥에 풀어져 있고, 약간 더러워 보이는 큰 식물에 걸쳐놓았다. 이것들은 인터넷 위를 서핑하는데 요구되는 케이블에 대한 은유인가? (정신의 착란, 열광의 상태에서는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펭귄이 기우뚱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작은 크기의 TV 세트가 바닥에 덩그라니 놓여있다. 멜가드의 설치 작업은시끄러운 설치 이벤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의 디지털 세계에 존재하는경험에 가상적으로 접근해 있다. 관객은 스크린 존재 속의 사건 일부가 된다. 신이지구에서 스스로 선택한 모습ꡓ이라는 아바타(avatar)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이
작업의 제목은 <그 자신의 한계 내에서 신을 찾는 예술가(요란다 잭 스미스 팽귄을 위한 실내 수영장)>이다. 이 복합 매체 설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의 디지털화 과정 속에서의 시간 개념의 변화가 실시간에서 현대 시각 예술의 시간 경향들, 자전적이고 일시적인 양상들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점이다. 새로 탄생한 장소, 그리고 시각과 오브제에 끼친 디지틀의 영향은, 우리의 낡은 관념들이 강력한 변화 과정에 놓이게 된다는 결론을 끌어내준다. 멜가드를 위시해 오늘의 많은 작가들의 작업이 해상도(감도)가매우 높아지고 있는 것은 작업의 성분들을 분자화시켜 상황 속에 풀어놓아 그것이 효과
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식에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관객은 전통적 의미의 감상자가 아니라 작품 앞에서, 작품 사이에서 리모콘을 움직이며 스스로 채널을 선택하고 감각 환경을 서핑하는 원격 관객(tele-spectator)로 전환된다. 미술 작품은 더 이상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ꡐ장소화ꡑ (혹은 무대화)하고 있다. [시간의 바다](1988)에서 [메가 데스](1999)에 이르기까지 미야지마 다츠오가 사용한 디지털 계측기(LED, light Emitting Diode)와 수행적(performative) 표현 방식은 최대한의 복수성(複數性)과 구속할 수 없는 특이화라는 새로운 환경-사건 환경-을 무대화
하는 일이었다. 요는 스크린 상에서건 오프 라인에서건 무수하게 섬광이 터지는 듯한
이미지들의 현기증을 우리 자신들이 가로지르며 한꺼번에 전체를 어떻게 파지할 것이냐
의 과제가 남는다. 주4)
Scoop 6: 언술적 공간(Discursive Space)
4회 광주비엔날레는 전체적으로 도시와 관련된 문제들과 이슈들을 부각시킨 전시로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도시 안에서의 특정 부지의 역사적 의미와 그것의 현재적 컨텍스트를 구성하고, 장소의 역사적 제약과 이주의 경계가 만들어낸 정체성의 정치학을 이슈화하고, 일시 정지라는 주제 아래 아시아와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군들을 '공시화된(synchronized)' 다성성의 전시로 묶어내었다. 이들 전시는 일상적삶의 공간과 미술 이벤트 장소 자체를 '언술적인 공간(discursive space)'으로 정의하면서 협상, 협동, 리서치, 조직, 인터뷰 등을 미술의 내용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드리는집중화된 시도를 보여주었다. 장소성이라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광주비엔날레는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시를 중심으로 현대적 삶의 시스템과 미술의 관계를 새롭게 주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생정치학(biopolitics, 일단 생물적이고 육체적인 것의 정치화, 그것을 가로지르는 기술적, 사회적, 임상의학적, 도시적, 환경적, 예술적인 것들의 교차 모두)이라는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도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오브제로서의 작품, 그것을 제작하는전통적 의미에서의 개인 작가 개념에서 벗어나 art documentation과 그것을 실행하는
그룹을 소개했다. 이러한 art documentation은 우리가 알고 있는 art 의 정의로 볼 때더 이상 art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art를 참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art라는 것은 제시되어 있지 않거나 가시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부재하거나 감추어진 형식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미술이 삶의 형식이 되고 미술작품은 삶의 형식에 대한 도큐멘테이션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도큐멘테이션이 반드시 정치적 입장의 올바름에기반하지는 않는다. 개별성을 희생하지도 않으면서 언어의 허구성을 교묘하게 폭로하는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이태리 작가인 지안니 모티(GianniMotti)의 풍경 사진들은 아름답고 충격적이다. 초원의 산비탈 마을에 거대한 산불이나폭탄 연기가 자욱히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판15) 그러나 작가는 아무런 설명도 주석도 달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몹시 의아해 진다. 알고 보면 여행사에서구한 마케도니아와 코소보의 실제 전쟁 상황을 담은 사진을 대형 인화한 것이다. 다큐멘타리 필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에서 보여지는 전투의 욕구와, 그 이미지들을 따라가는 해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전쟁 공포에 관한 발언들은 그 전쟁의 이미지들에 의해 훼손된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실제의 전쟁 이미지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에 관해 말해주는 해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마치실제 상황 쇼 (reality show) 같다. 비극은 해설에 있는 것이지 절대로 사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이런 변화가 전면에 가시화되었는데, 그에 대해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말한다. 미술이 생정치학(biopolitics)이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이 순전한 활동성으로서 삶을 생산하고 그것에 대해 도큐멘트하기 위해서 예술적 수단을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형식으로서의 art documetation은 생정치학 시대라는 상황에서 발전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미술이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라는 질문을 다른 맥락에서 직면하게 된것이다. 이는 미술이 더 이상 삶을 묘사하는(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건 순전히 형식적방식으로건) 것도 아니고 미술 속의 가공된 삶을 현시하는 것도 아니라 미술의 활동성그 자체가 생정치학을 구성하는 새 차원의 획득과 결합한다.
Scoop 7: 미래가 아닌 다른 곳
본인은 장소와 연관하여 너무 많은 것을 다루었다. 무대 처럼 여겨지는 장소에 무언가를 얹어놓는 것으로서의 미술이 아니라 미술 행위성(art performativity)의 개입으로인해 비로소 시작되는 장소의 개념, 그것의 출현 문제에서 시작하여 지금 여기의 상황까지 마치 생각의 뫼비우스 띠를 따라 순식간에 멈춰야할 지점에 당도했다. 그 과정에서 계속 우리를 쫒아온 것이 있다. 그것은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한 ꡐ볼 수 없는 것ꡑ이다. 미술은 궁극적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난 길이다. 볼 수 없는 것은 어느 정도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뇌는 필요한 것만을 보도록 눈에게 명령함에 따라 하인리
히 뵐플린(Heinlich Woefflin)의 말 처럼 대체로 아는 것(입력된 것) 만큼 보인다. 그로 인해 장소에 대한 생각이 보는 것, 보이는 것에만 관여할 때 미술은 바깥으로 난 문을 닫는다. 좀더 명확히 말해 우리 내부 안에서 다른 곳을 제거하는 일이 되고 만다.1992년 5월 리오데자이네로에서 개최된 생태 회의(펠릭스 가타리가 개회 발언을 한 후사망)에서 페르바르(Peter Pal Perbart)는 볼 수 없는 것의 4가지 종류를 열거한다. 그것은 내재적이라서 볼 수 없는 것(원시 문명이나 미개 문명에서 나타나는 주술적 힘),초월적이라서 볼 수 없는 것(일신교나 야만적인 전제 체제의 비밀), 주관적이라서 볼
수 없는 것(혼, 심리, 사적인 환상), 영상 도구들이 만들어내는 볼 수 없는 것(전적인가시성의 체계. 영상의 끝없는 과잉, 사이버 공간= 개념적인 비장소의 장소)이다. (펠릭스 가타리 [3가지 생태학]의 부록, 동문선) 그리고 이것들 각각은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형태들과 결합하여 가시성이라는 조망 체제(Scopic Regime)를 구축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볼 수 없는 것을 더 이상 갖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에 있다. 이 마지막 단계의 정치, 사회 체제에서는볼 수 없는 것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4가지 볼 수 없는 것
에 집착하는 퇴행적 도착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파생한다. 이는 모더니즘의 소진 이후미술 현상에서 특히 그 증후를 아주 분명히 보여주었다. (또한 주2)에서 보여준 시간개념의 변화를 다시 참고할 것) 그러나 볼 수 없는 것은 내재적이지도 초월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오늘날 강렬한 피막층으로 영상과 관계하지만 영상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언어와 관계하지만 언어에서 생겨나지도 않는다. 페르바르는 그것을 태고 이래 모든 살아 있는 것, 죽는 것을 그 머리에서 지켜온 죽음 그 자체, 죽음이라는 사건 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에 죽었건, 미래의 일이건 죽음이라는 사건은 모든각자가 제 스스로의 ꡐ탄생지ꡑ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천상에 있는 것도 지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들 ꡐ사이ꡑ에, 단지 가운데에, 배려 속에, 이것임(temporalization)의 시간 속에, 시간을 벗어난 광대한 공간, 그리고 극미세한 공간 속에 있다. 그것은 어디에나 속해 있으므로 무-장소(non-place)이다. 그것은 광대 무변한 우주의 심리적 복제가 아니며 언어적 무의식적 초월적 구조도 아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상상적, 재현적 상부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의 생명과 우주를형성하는 거대한 틈이다. 엄밀히 말해 현실의 틈이며, 도시polis의 차원을 이루고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욕망에 기초한 자연에 속한다. 그것은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며 프로그램화할 수 없으며 단지 탐사할 수 있을 뿐이다. 볼 수 없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현재시점으로 가져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속한 다른 공간을 보는 것(눈이 아니라 뇌로 본
다)이 정작 문제인 것 같다. 이미 펠릭스 가타리는 우리의 세계가 안고 있는 산적한 문제들(인간은 기본적으로 잘못 진화되어 왔다)에 접근하기 위한 세가지 생태학(정신,환경, 사회체socius)의 제안했고, [카오스모시스(Chaosmosis)]라는 최후 저술에서 생태 철학적 미학-윤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피력했다. 같은 논지에서 페르바르는 볼수 없는 것의 지각화, 그것의 정치화를 <정치><예술><임상의학>의 영역에서 실행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정치-예술-임상의학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의 렌즈를요구한다. 그 렌즈는 유토피아를 비춘다. 스위스 작가 토마스 허쉬혼ThomasHirschhorn)은 유토피아에 대해서 불가능한 임무를 넘어서는 것(beyond missionimpossible)이라 정의하면서 유토피아는 그것을 시도하고 실천하려 할 때, 그리고 잠재적 실패를 극복하고 재난의 두려움에 직면하여 도망치지 않는 용기를 가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 고 발언한다.([야누스] 14/03) 이는 유토피아가 무장소라고 해서 결코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1515년 벨기에 앤트워프에 머물면서 구상했던 단어로 그리스어 토포스(topos; 장소)라는 명사와 최고를 뜻하는 접두사 eu와 부정을 나타내는 ou라는 두 접두사가 합성된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좋은 장소, 행복의 장소를 뜻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곳,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 land)이다. 지리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사람들은 유토피아 이야기에 있어서 이 다른 곳을 섬이나 혼란에 빠뜨릴 모든 접촉이
두절된 광대한 처녀지, 사막, 대양, 상상의 무릉도원 같은 것으로 여겼고, 역사주의적유토피아는 허쉬혼이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의 일부를 위한 포스터에서 UTOPIA=ONEWORLD,ONE WAR,ONE ARMY,ONE DRESS 라는 문구로 표현했듯이 전체주의의 망령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것은 조지 오웰의 [1984년]과 스탈린주의를 패러디한 [동물농장]이
뒤섞인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린다. 인간의 유토피아 공동체들은 모두 실패했다. 지구의 어느 구석도 모두 지도에 표시되고 가장 외진 곳도 인간의 주파수가 지나가며, 제국(Empire) 시대의 사회적 공장은 지구를 벗어나 은하계 마저 잠식할 플랜을 세운다.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는 ꡒ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않는 지도는 주목할 가치가 없다!ꡓ고 경고했다. 벨기에의 미술가 윔 델보에의 지도 그림은 지도 속의 영토들을 사물들의 형태로 바꾸어 숨은 그림 찾기 그림으로 만들었고 국가와 도시의 지명들을 모두바꿔 버렸다. 우리가 다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다른 도시를 세울 수 있는 이 어디
에도 없는 곳은 어디에 있는가? 예술가들은 지도 안에 볼 수 없는 곳으로서의 유토피아를 그려넣는 자들이다. 그 자리는 생각의 실천이나 패턴 속에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일탈의 현실적 잠재성, 다시말해 기술적, 정치 사회적 구조, 온갖 제도적 교육적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의해 억압된 일시 착란(delirium)과 열광이 터져나오는 자리이다. (도판 16) 푸코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붙힌, 어느 곳도 아닌 장소로서의Nowhere. 여기서 no는 부정이나 대립이 아니라 선행하는 모델이나 유사물을 가지지 않는 어떤 우연성의 긍정을 통해 다가온다. 장소들의 근원인 대지ꡑ(Earth)는 낮은 곳이
나 한참 아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nowhere에서 도래한다. 따라서 유토피아는정치적 흥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블로흐(Ernst Bloch)가 [희망의 원리]에서 말했듯이 창조의 희망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 각자 스스로의 탄생지를 만드는 일이다. 유토피아는 미래가 아니라 다른 곳이다. 이 시대를 예시하는 미술가들, 문명의 의사로서의 미술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스텔스기 처럼 현재 시제 속의 다른 곳으로 비행해 가는 자들이다. 현재 시제 속의 다른 곳은 과거와 미래가 몰려드는 현재, 즉 시방 삼세가 모조리 관통하는 근방으로 이동하는 길(불교), 자신의 탄생지를 새롭게 출발
시키는 정오의 지점(니체), 볼 수 없는 것의 정치화(페르바르)의 지점이다. 뒤샹은 예술은 (세속의)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지 않는 지역들로 향하도록 안내하는 길 이라했다. 그 길은 뒤돌아 볼 수 없는 길이지만 언제든 극도의 실존적 긴장과 위험을 수반했다. 야만주의, 정신의 내부 파열, 소아적 퇴행, 관념의 폭력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우리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조언을 경청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잡초의 생태학이 있는 것 처럼 잘못된 사상의 생태학도 있다.
주1) 시카고 대학 교수인 인도인 문화인류학자 아전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자본주의 발달로 인해 전지구적 변화가 급속히 전면화되고 있는 현상황을 설명하는 개념용어로서 풍경(scape)이란 접미사를 붙혀 5개의 중요한 술어(ethnoscape,technoscape, financescape, ideoscape, mediascape)를 창안했다. 오늘날의 세상(전지구적/지역적)은 인구, 기술과학, 재정, 이념, 미디어라는 5가지 요소의 이동과 변화가만들어내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면서 각기 독특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고 본다. scape라는 접미사는 변동하는 것의 국부적 조망을하는 경우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다.(bodyscape, mindscape,seascape, humanscape ) 또한 다음과 같은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