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이강미 개인전

인체를 대면하는 환유적 사유

 

 

 

 

회화가 대면하는 인체

회화가 일루저니즘을 제공하는 재현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회화의 본질적 차원을 모색하는 추상의 경향을 거쳐 타 장르와 이종교배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한 변화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면 작가가 대면하는 ‘자화상적 세계 인식’일 것이다. 보편적 관점에서, 거울을 마주하듯 편평한 화면을 마주하는 작업방식에서 생성되는 이러한 회화적 성찰과정은 신체적인 노동력보다는 정신적인 대면의식이 보다 더 주요해진다는 점에서 창작주체의 자의식과 세계관이 움트는 모든 창작과정의 출발점이 된다. 인체라는 진부한 소재를 오늘날 새로이 해석하는 작업들이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는 이유는 이러한 회화의 ‘자화상적 세계 인식’에 주목하는 탓이다.

 

작가 이강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의 전시 화두는 인체이다. 화면의 인체 이미지는 그녀가 꾸준히 탐색해 온 실제 모델의 인체 드로잉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작품 안에서 완성된 인체는 더 이상 모델의 것이 아니다. 모델의 인체는 개별적 특수자의 지위를 상실하고 보편자의 모습으로 화면 위에 자리 잡는다. 그럼에도 건조하고 개념화된 이강미의 인체가 이내 작가의 분신으로 변신하는 까닭은 작가가 실제모델에 부여하는 ‘자화상적 세계 인식’이 작동하는 탓이다. 보편자의 모습 속에 체험적 작가의 자아가 숨어든 셈이다.

 

 
이강미, 주어진 시간, 117x91cm, 혼합재료, 2006

 
이강미, 인체_환유적 사유, 30x30cm+3, 혼합재료, 2006

 

인체를 대면하는 환유적 사유

하이퍼 리얼리즘을 통한 특정인의 이미지가 표층에 넘실대는 척 크로스의 인체 작업이나 육질의 개별적 특수성이 도드라지는 루시앙 프로이드의 인체 작업의 유형과는 달리 이강미의 인체 작업은 ‘자신이 숨어든 보편자’의 이미지를 지향할 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화상적 세계 인식을 올곧이 담아낼 수 있는 까닭은 인체를 대면하는 작가의 비유적 인식 즉, 환유(換喩)적 사유로부터 기인한다. ‘환유’란 직유, 은유와 같은 비유의 한 방식으로 사물의 체험적 속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대유법(代喩法)을 일컫는다. 칼이 무력을, 백발이 노인을 비유하거나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탄생으로부터 죽음까지’를 비유하듯이 이강미의 ‘인체’는 육질의 몸을 넘어서는 ‘인간의 실존’을 비유한다.

 

인체의 형상이 간결한 그래픽 디자인의 도상처럼 표현되고 개념화되어서 특수자로부터 보편자의 이미지를 드러내며 인체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인체 표현을 위해 도입한 모래알맹이들의 집적의 방법론도 환유적 사유로부터 비롯된다. 모래 한 알, 한 알은 개별적 특수자이지만 모래 군집체는 무수한 보편자들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강미의 ‘모래 인체’는 군중처럼 하나의 지향점을 위해 모여 있지만 끝내 결속되지 못하고 개별적 특수자로 흩어지는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환유적 비유가 된다.

이강미의 작업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처럼 큐브 혹은 박스의 도상이미지가 인체를 가두고 있거나, 캔버스의 사각형 구조가 인체를 갑갑하게 포획하고 있는 형태는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규율과 법적 통제 혹은 인간의 실존적 굴레를 의미하는 ‘구속’을 유효적절하게 환유화시킨다. 실제로 육아와 가정을 위해 10여 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고 스스로 선택한 ‘사회로부터의 갑작스런 고립’의 경험이나 이를 떨쳐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뒤늦은 나이에 대학원에서 순수미술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체험을 갖고 있는 작가를 이해한다면,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갈 정도로 극대화되며 화면에 등장한 인체의 이러한 ‘구속의 이미지’는 작가 자신의 실존적 정체성에 대한 환유적 자각에 다름 아니다. 작가의 체험에 근간한 환유적 사유인 것이다.

 
이강미, 가두기 V, 64x41cm, 혼합재료, 2006

 


이강미, 가두기II, 73x60.5cm, 혼합재료, 2006

 

회화의 실험적 모색, 그 내부로

인간 실존의 이미지를 세련된 그래픽 디자인의 외양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성과임에도 작가의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회화적 결과’는 사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바이기 때문이다.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든가 모래, 실, 화장솜, 거즈, 철망 등 다양한 오브제를 화면에 응용하면서 회화가 할 수 있는 가능한 실험적 모색을 거듭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직면한 셈이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비회화적 결과’는 인체탐구와 관련하여, 역으로 매우 큰 장점일 수 있다.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환유적 사유’와 ‘자화상적 세계 인식’이 구태한 인체 탐구의 관습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진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강미가 언급하는 ‘비회화적 결과’는 그녀가 결코 회화적 감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시작의 전초점이 된다. 회화적 감성은 회화적 결과만을 지향하지 않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회화적 감성이란 자유로운 내적 표현의지가 더 주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실험에 근거한 채 회화적 의지와 회화적 감성이 자신의 내면에 충일한 이강미의 작업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회화의 또 다른 한 측면’을 계속 천착해 주길 기대한다. 회화가 여전히 세계를 대면하는 작가의 인식을 드러내는 장(場)이 된다는 신뢰를 이강미로부터 우리가 확인하는 까닭이다. ●

 

출전 /

김성호, '인체를 대면하는 환유적 사유', (이강미전, 2006. 7.11-17, 수원미술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