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김수철 개인전
물질적 상상력으로부터 그노시스(Gnosis)로
- 김수철 회화에 내재한 연금술의 미학
김성호(미술평론가)
회화-물질과 이마쥬
회화에 관한 최소한의 정의를 우리는 ‘색채들이 모여서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평평한 평면’으로 규정한다. 현대미술사에서 탈이미지의 추상화나 탈평면의 조각화가 회화의 정의를 흔들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는 색채’라는 ‘이마쥬’(image)와 ‘평평한 평면’이라는 ‘마티에르(matière)’의 형식적 특성은 회화를 규정하는 자기 지시적 기능으로 오랫동안 군림해왔다. 즉, 이마쥬(이미지)와 마티에르(물질)의 관계지형이 회화의 근원적 정체성이었던 셈이다.
김수철의 회화 역시 이러한 이미지와 물질 사이의 관계지형에 걸터앉아 있다. 일견, 그의 변형캔버스(shaped canvas)나 부조(浮彫)의 장치가 부피를 지닌 탈평면 회화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 근원적 모색은 여전히 이미지와 물질의 관계라는 회화의 근원적 고민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캔버스나 판넬 위에 아크릴 물감과 미세한 석분(石粉)을 한데 섞어 5mm 정도의 두께로 여러 겹 올려 바른 뒤, 그 위에 다시 바인더와 섞은 흑연가루를 1mm 정도의 두께로 올려 바르는 회화의 바탕 만들기는 ‘이미지와 물질’에 관한 김수철의 작업을 읽는 유효한 출발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흑연가루 대신 작가가 ‘그을음’이라고 호칭하는 카본블랙(carbon black)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검은 층과 돌가루 층이 형성한 대략 6mm의 두께의 회화 바탕은 작가에게 있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물질적 장(場)이자 회화의 지층이 된다. 이 바탕 위에 작가는 대비되는 양가적 이미지를 화면 좌우 혹은 상하의 병렬적 방식으로 창출해나가기 시작한다. 한쪽은 세모나 둥근칼의 조각도로 표피층을 파서 들어 올려 만들어낸 조각적 네거티브 이미지들이고 다른 한쪽은 흑연을 묻힌 면천을 손가락에 감아 일일이 문질러 광(光)을 내 만들어낸 회화적 포지티브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주-네거티브 공간에 포지티브가 잠입하고 주-포지티브 공간에 네거티브가 침입하는 특성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조각도로 표피층이 파내어진 네거티브의 공간은 표피층의 껍질이 들어 올려진 채 그대로 돌출되어 남아있다는 점에서 포지티브 이미지로 변환되고, 흑연 묻힌 면천으로 문지르며 흑연을 바탕 위에 지속적으로 밀착시켜 올려낸 포지티브의 공간은 이내 작가가 깨끗한 면천으로만 문지르는 과정을 통해 흑연이 도로 닦여지면서 네거티브의 공간으로 변환되기도 한다. 어쨌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일부 공유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의 화면에서 조각적 어법의 이미지와 회화적 어법의 이미지는 일관되게 명료한 방식으로 충돌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그의 회화에서 대립되는 양가적 이미지들이 결국은 ‘하나의 바탕으로부터 근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데 있다. 즉, 조각적 네거티브 이미지나 회화적 포지티브 이미지는 모두 석분+아크릴+흑연(혹은 카본블랙)이라는 ‘물질로부터 잉태한 자녀들’인 것이다. 물론 그 산고(産苦)의 주역은 분명 물질과 이미지 사이에 개입하는 작가 김수철이지만 물질은 그의 회화를 존재케 하는 근원적 존재이자 상상력의 출발점이 된다.
김수철, GNOSIS, 41x41cm, 흑연, 그을음 on panel, 2010 (부분)
물질적 상상력과 물질적 이마쥬
대비되는 양가적 이미지의 병렬적 배치와 그 단순한 구조를 증식하는 조형방식은 일견 그의 작업을 이분법적인 이미지들로 대별시켜 놓게 만든다. 깎임과 들어 올려짐, 오목과 요철, 중첩과 탈각, 더하기와 빼기, 보임과 보이지 않음,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조각과 회화 등...
하지만 이 모든 양가적이고 이분법적인 이미지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물질’이라는 하나의 회화적 지층으로부터 잉태한 것들로서 일원론적 근원을 지니고 있다. 흑연층은 물론 돌가루와 함께 섞인 아크릴 물감층을 한꺼번에 조각도가 들어 올림으로써 마치 나무나 종이껍질이 들어 올려진 것처럼 형성된 네거티브 조각 이미지나 바탕을 면천으로 문지르며 바탕의 밀도를 변화시키는 포지티브 회화 이미지는 모두 ‘잠자고 있는 바탕 물질을 깨워내고 그것과 대화하며’ 만들어낸 이미지가 된다.
김수철, GNOSIS-天蓮華, 1098 × 528cm, 흑연, 그을음 on panel, 2004
김수철, GNOSIS-天蓮華, 흑연, 그을음 on panel, 2004
그것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식으로 말하면 ‘형태적 이마쥬’(image formelle)를 벗고 되찾은 ‘물질적 이마쥬’(image matérielle)에 다름 아니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대상의 표면에 머무르는 ‘형태적 상상력’(imagination formelle)이란 얼음의 외형처럼 고정화된 것일 뿐이고 대상의 표면과 내면이 함께 침투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이란 얼음, 물, 수증기처럼 변화 가능한 것이다.
잠자는 바탕물질을 조각도로 상처내서 깨워 내거나 면천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 만든 김수철의 ‘물질로부터 온 이미지’란 이러한 물질적 상상력으로부터 근원한다 할 것이다. 특히 모방, 표현을 지향하기 보다는 상상에 기반하는 그의 이미지가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검은색 물질’ 위에 창출된다는 점에서 물질적 상상력은 그의 이미지에 영양을 공급하는 근원이 된다. 상상은 인간의 주관적 가치체계이며 상상력은 이미지를 재생하는 능력이라는 것이 어김없이 확인되는 지점이다. 물론, 스스로 모양을 만들어가는 ‘물질의 자발성’을 김수철이 전략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에게 있어 ‘물질적 상상력’이란 ‘물질에 개입하는 창작주체의 상상력’으로 풀어 말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김수철 회화의 매력적인 지점은 물질에 개입해서 창출되는 이미지가 그의 상상력에 근간한 것이지만 그 생성된 이미지의 실체란 빛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나무뿌리, 불꽃 혹은 연기의 이미지처럼 보이는 도드라진 저부조의 입체들은 칼질의 방향과 빛이 만나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 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속살을 드러낸 아크릴물감의 색층은 조명의 광도나 각도가 제대로 맞아야만 그 본래의 색을 드러낸다. 면천으로 문질러 동그란 문양으로 겹겹이 광을 낸 흑연의 퇴적층들도 빛의 각도에 따라 아스라이 사라지기도 극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가히 ‘빛에 의한 현현(顯現)’이라고 할만하다. 또한 빛과 대면하는 관객의 시선과도 교차한다. 이는 작품은 가만히 있되, 관객의 참여로 이미지가 비로소 움직이는 옵아트의 잠재적 운동(mouvement virtuel)의 유형과 매우 유사하게 맞물린다. 빛에 의한 광학활성 작용에 의해서 의도하지 않은 착시현상(illusion d'optique)이 유발된다는 점에서 그의 회화는 광학미술(Art optique)과 잇대고 있는 지점이 있지만 그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다.
단지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자의 시각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그를 통해 이미지 저편의 심상(心象)적 인식과의 소통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적 상상력으로부터 온 그의 이미지는 관객의 창조적 상상력으로 전이를 꿈꾼다 할 것이다.
김수철, GNOSIS-天蓮華, 57x80cm, 흑연, 그을음 on panel, 2006
연금술의 미학 -Gnosis와 天蓮華
김수철은 자신의 작업에 그노시스(Gnosis)라는 그리스어로 된 제명을 붙였다. 라틴어 cognoscentia에서 유래된 이 말은 앎, 인식, 깨달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1-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로마와 소아시아지역에 창궐한 기독교적 신비주의인 그노시즘(Gnosticism) 주의자들이 기독교의 믿음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신봉한 영지(靈知), 즉 ‘영적 인식’의 단계를 지칭한다. 그노시즘은 물질을 추한 것으로 여기고 정신을 고결한 무엇으로 간주하면서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이나 그의 인성(人性)을 거부하면서부터 기독교의 이단으로 내몰려 3세기 이후에는 몰락하게 되지만, 그 이전 까지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신지학의 캐논(canon)처럼 여겨져 왔다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수철이 언급하고 있는 그노시스는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추상적인 차원에서 언급했던 천상적 신비에 대한 인식이나 깨달음을 지칭하고 있거나 ‘궁극적 구원을 위한 영적 인식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적) 현상’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그노시즘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영적 인식이라는 것을 ‘비의적(秘儀的) 체계로부터 기인하는 설명 불가해한 그 무엇’으로 규정하려는 태도가 김수철의 작업 면면에서 감지되는 까닭이다. 절대자가 빛으로부터 와서 어둠에 속박된 빛의 영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이 영원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비의적 지식을 준다는 그노시즘의 신화는 김수철의 회화를 대변하는 하나의 은유이거나 시적 표현 같지 않은가?
김수철의 회화 역시 어두움(검은 바탕의 물질)에 속박된 빛의 영(네거티브 조각과 포지티브 회화를 통해 모색하는 빛의 이미지들)을 해방시켜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같은 인식의 영적 체계인 그노시스는 기독교가 언급하는 ‘성령’인 프뉴마(pneuma)이거나 벤야민이 언급하는 ‘예술작품의 영적 분위기’인 아우라(Aura)와 일맥상통한다.
김수철, GNOSIS, 50x366cm, 흑연, 그을음 on panel, 2010
따라서 우리는 김수철의 그노시스로부터 연금술(鍊金術)의 미학을 읽는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금속이나 기타 물질을 통해 금을 발견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연금술이란, 기실 끝내 찾을 수 없었던 이른바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발견하고자 했던 노력에 다름 아니던가? 그것은 동서양 공히 ‘금의 정령’으로 혹은 ‘만병통치약, 불사약’으로 논해지던 과학과 철학의 궁극적 정수였다. 오늘날 연금술을 통해 읽어내는 미학이란 “하나의 물질 속에 내재한 특정 형상을 제거하여 원래의 물질을 파괴한 후에 다른 특정 형상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의 끝없는 변성(變性)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내면적 발전과 같은 ‘영적 인식과 진화’에 대한 깊은 철학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것은 그노시스와 연금술이 만나는 ‘신화의 장’(場)이다.
김수철의 검은 흑연 층의 평평한 평면은 반짝이는 흑연광(光)의 중첩으로 인해 표면 밖으로 쌓아올려지거나 조각도에 패이며 돌가루 층의 내면 깊이로 잠입하는 변성(變性)의 움직임으로 끊임없는 연금술적 진화를 지속한다. 물질적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 물질적 이마쥬로부터 변성의 진화를 지속하며 영적 이마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로 풀이할 수 없는 작가만의 영적 체험의 이마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신화적 체험은 천상계에 핀다는 영묘한 꽃인 ‘천연화’(天蓮華)와 만나면서 김수철의 연금술적 상상력과 그에 힘입는 독특한 미학을 배가시켜내는 것이다.■ (2006. 11. 4.)
출전 /
김성호, '물질적 상상력으로부터 그노시스(Gnosis)로-김수철 회화에 내재한 연금술의 미학', (김수철전, 2006. 10. 31-11. 9, 대안공간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