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Seeing & Showing전

해석의 프락시스(praxis)와 미술에서의 상호작용

 

 

 

김성호(미술평론가)

 

 

 

〈Seeing & Showing〉展의 이해

2006년 인천문화재단의 젊은 예술가 지원의 기획전 공모에 선정되어 추진된 이번 전시는 전시명이 상기시키듯, 시각예술의 오랜 과제인 ‘보는 이’(관람자)와 ‘보이는 이’(미술가) 사이에 형성되는 소통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양자 사이에 다양한 유형으로 촉발되어 온 커뮤니케이션의 괴리를 전시라는 현장의 언어로 점검해보고 해결 가능한 의미망을 짜보고자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호함이나 난해성을 이유로 다수의 관람자로부터 자의반 타의반 소외되어 온 현대미술의 이른바 엘리트적 위계나 구습을 타파해내고 소통에 관한 조용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해결점을 정초하려는 대안’이기보다는 ‘소통 모델을 찾기 위한 하나의 가능한 실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Seeing & Showing〉전은 관람자와 미술가 사이의 소통의 과제와 더불어 그 사이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해석자 혹은 매개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된다.

 


치과병원에서 미술전시를 한다고?

전시공간이 아닌 특정 장소에서의 미술전시는 사전 답사가 필수이다.

 

한편, 인천이라는 특정한 지역으로부터 유발되는 요소(인천지역 출신이거나 그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참여 작가 11명의 구성, 구올담치과병원이라는 특정 장소)가 강조되고 있는 탓에 예술 공간과 비예술 공간, 특정 공간과 특정 지역, 지역과 중앙 등의 문제의식이 소통의 담론과 활발하게 부딪히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와 연관된 담론 생성의 장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온, 오프라인에서의 다차원적 구성(구올담치과병원에서의 1차전, 혜원갤러리에서의 2차 종합전, 웹 사이트에 마련된 사이버갤러리, 전시결과와 평가를 묶은 자료집의 발간)은 전시기획의 의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의미 있는 행보로 평가된다.

 

구올담치과병원의 1차전에서 11인의 참여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람자의 적극적 감상 행위를 요청하는 작업들을 선보인다. 실제로 관객의 움직임과 참여에 의해서 작품이 완성되는 인터랙티브 시스템을 구사하는 다수 작가들의 작업은 ‘Seeing & Showing’이라는 테마를 효과적으로 구현해내기에 적격으로 보인다. 최근 매체미술에서 드러나듯 폐쇄카메라 촬영을 통한 이미지의 동시전송과 동시편집을 병행하는 작품(한준희의 만화경 이미지)이나 관객이 조이버튼을 눌러가면서 감상하는 작품(이종석, 나무-기대어 서다)과 같은 뉴미디어의 예술생산 방식은 물론이고 박스에 달린 문을 열어 그 박스 내부의 내용물을 들여다보게 만든 작품(장진, 문)과 같은 아날로그적 예술생산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앙케이트를 통해 이미지를 구성(이수영, 이, tooth, 齒에 관한 아카이브)하거나 이미지에 대한 의식을 조사(나형민, 인천성)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상호소통을 시도하기도 한다. 게다가 적정가 무료 경매(윤기언-그림을 잡아라)를 통해 실제의 작품을 관객에게 소장시키는 인터랙티비티를 기획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터랙티비티, 즉 쌍방향의 상호작용적 커뮤니케이션 유형은 실상 기획자의 요구에 따른 미술가들의 고민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이들의 평소 작업의 유형과도 멀리 있지 않다. 이들 뿐 아니라 모든 미술가들에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창작활동에 있어 이러한 인터랙티비티가 늘 상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시를 이해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수화하는 손, Ⓒ김진석.

수화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대신하는 이미지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적 유형으로

보기와 읽기 사이의 문제적 인식을 드러낸다.

 

 

 

보기(Seeing)와 읽기(Reading)

미술가들은 왜 관람자들을 상정한 인터랙티비티를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보다 원론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보기’(seeing)와 ‘보이기’(showing)의 상관성 속에 존재한다.

 

‘보기’(seeing)는 관람자의 주체적 행위이다. 미술(Art)을 시각예술(Visual Art)이라 통칭하듯, 보기의 역할은 미술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아서 아사 버거’의 저작 『보는 것은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은 시각경험이 우리의 지적, 감정적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이 말은 ‘눈으로 확인되는 현상이 곧 정보’라는 우리들의 신념체계를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말로 이해되어 온 바 있다. “내 눈으로 확인하기 까지는 못 믿어” 식의, 부활한 예수 존재에 대한 ‘도마’의 불신은 비단 성서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응시, 주시, 관찰이라는 보기의 형태는, 증거의 형식으로 사실이 기반이 된 정보의 신뢰를 담보한다. 사실적 정보와 정체성 파악에 있어 우리들이 흔히 다른 감각보다 시각성을 우선으로 삼는 까닭이다.

 

최근까지도 정보의 증거 수단으로서 눈의 힘이 과대평가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에 이르러 시각성은 정보의 의미를 상실하고 지각(perception)의 차원으로 의미 설정이 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탓에 우리 눈에는 마술사가 소매에서 비둘기를 꺼내 날리고 커텐 뒤에서 있던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믿지 않고 단지 즐기고 말 뿐이다. 원근법이나 투시법, 음영법 등 유사과학적 태도로 대상을 재현해내며 마술의 어법과 다리를 걸치고 있던 미술의 시각언어는 현대에 이르러 다른 것으로 치환된 지 오래이다. 마티에르의 이름으로, 오브제와 사물의 이름으로, 이미지의 이름으로...

 

스텔라의 언급, “당신이 보는 것이 바로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는 모더니티를 이해하기 위한 주요한 진술이면서도 오늘날의 미술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띠무늬작업과 같은 단순 기하추상에 대한 여타 다른 해석의 무용론을 피력하는 그의 언급은 실상 미술이라는 것이 캔버스 화면의 즉물성(objecthood),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설파한 것이다. 이는 어떠한 텍스트적 이해보다 시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는 스텔라의 언급으로부터 유출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 “내가 보는 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것이다”라는 자의적 시각적 경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적 경험 외에 어떠한 해석도 무용하다는 스텔라의 언급과 상치되게 관람자의 입장에서 어떠한 해석도 모두 가능해진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명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움베르트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 논의가 시작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에코의 입장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해석학적으로 열려진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고 있다. 미술가의 내밀한 언어로 완성된 예술작품이 전시의 현장에서 관람자들에 의해서 또 다른 언어들로 확대 재생산되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스텔라’의 어떠한 해석 조차 무용한 시각적 즉물성이기 보다는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과 ‘존 버거’의 ‘보는 방식’(way of seeing)이 더 유효해진다. 즉 시각적 대상에 ‘읽기’(reading)의 차원을 부여하는 일이다. 즉 볼 수 있는 표상으로서의 이미지를 기호들의 집합체로 인식하고 그 기호의 체계를 풀어보려는 ‘읽기’의 방식을 끊임없이 시도할 일이다. 시각예술인 미술은 보기를 통해 출발하지만 인지와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읽기의 공간에 놓여있기도 하다. 보는 주체의 (미술에 대한) 지식 여하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보기의 주체인 관람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끊임없는 ‘읽기’의 차원을 개진하는 것이다.

 


카라밧지오, 〈도마의 의심〉, 1601-1603.

도마에게 있어 ‘보는 것’은 부활한 예수의 존재를 확증케 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에도 비주얼 이미지는 ‘증거’의 역할을 담당한다. "불이야"를 외치는 어느 남자에게 어디서 어떻게 불이 났는지를 '눈으로 꼭 확인'하고서야 그 정보를 믿는 우리들처럼...

 

 

 

보이기(Showing)와 해석하기(interpreting)

‘보이기’(showing)의 주체인 미술가는 자의적 해석을 감행하는 '보기'(seeing)의 주체인 관람자 앞에서 당혹스럽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읽기’를 수행하기 보다는 ‘보기’만을 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의적 보기로 자신의 작품이 무한정 열려진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 두렵다. 어떤 경우는 그러한 염려는 차치하고서라도, 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작품을 관람조차 하지 않은 채 다른 작품들만 둘러보고 성의 없이 총총걸음으로 전시장 문을 나서는 일상에 바쁜 관람자들의 일견 불손한 관람태도가 못내 밉살스럽기조차 하다.

 

하지만 문제는 미술가들이 전적으로 ‘보이기 위한’(to show) 목적으로 창작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달리 말하면 미술가들은 애초부터 자기성취감과 자기만족으로부터 예술창작을 실행하고 그 과정 속에서 생성된 결과를 타자와 공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기’를 실행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물론 작금에 들어 미술현장 시스템이 ‘보이기’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키고 있지만 말이다.

 

정작, 보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들은 매개자로 통칭되는 전시기획자들이다. 이들 역시 제2의 창작 마인드로 전시를 기획하고 이를 타자와 공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기’를 실행한다. 그들의 보이기는 구체적으로 화이트큐브든 오픈에어든 ‘진열하는 것’(to display)으로 발현되고 이는 관람자들의 ‘눈에 보이게 하는 것(to make visible)'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하듯,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은 위장 혹은 거짓말의 형식을 빌린다. 흰 머리, 새치를 가리기 위한 머리 염색이나 낮은 코를 올려 돋보이게 하는 성형수술이나 삐져나오는 뱃살을 감추기 위해 바지 밖으로 내어 입는 헐렁한 티셔츠와 같은 위장과 꾸밈의 형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전시에서도 이러한 위장의 형식은 예외가 아니어서 태생적으로 다양한 주제를 가진 개별 예술작품들을 하나의 주제에 싸잡아 꿰맞추거나 개별 작가들에게 창작품을 기획의도에 맞추어 변조하길 요청하면서 그 음험한 전략을 일상처럼 수행하기를 거듭한다. 일견, 전시기획자들의 보이기의 전략은 미술가들의 그것보다 순수하지 못하다.

 

하지만 기획을 순수해 보이지 못하는 위장 전략으로 폄하, 이해하는 태도는 매개와 해석의 부단한 움직임 속에서 창출되는 이들의 창조적 노동력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관람자에게 요청되는 해석을 기획자들이 먼저 실행하고 이 해석의 층위를 겹겹이 뒤집어쓰고 있는 탓에 그들이 순수해 보이지 못함을 이해할 일이다.

예술경험이란 일차적으로 ‘과잉정보 지향적인 미술가’(보이기의 주체)와 ‘중복 의미 지향적인 관람객’(보기의 주체)이 이루는 만남 속에서 형성된다. 여기서 미술가는 작품이라는 사물로 변조되거나 관람객은 수용자라는 광범위한 주체로 둔갑하기도 하지만, 예술경험을 형성하는 만남의 형태는 이와 같은 기본적 골격을 유지한다. 여기에 양자를 잇는 매개자, 해석자의 그룹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기획자는 주요한 주체이다.

 

미술가들이 관람자를 상정하며 인터랙티비티를 염두에 두듯이 기획자는 양자의 사이에서 적극적인 인터랙티비티를 상정한다. '해석하기'(interpreting)는 합치할 수 없는 두 주체의 간극을 좁히는 이러한 인터랙티비티의 역할을 강화해낸다. 간혹 “말이 필요 없어, 난 작품으로 말해”라는 미술가들의 비타협적 진술은 기획자들로 하여금 해석의 갈피를 못 잡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해석의 장을 열게끔 도와준다. 해석이란 미술사처럼 역사의 계보에 소속시키는 따위의 일이나 비평처럼 작가의 의도를 전치시키는 일 보다는 원래 의미의 재발견을 행하고자 애쓰는 주체이다. 이미지를 언어화한다는 점에서 ‘이미지 풀이’처럼 여겨지지만 오늘날의 해석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허쉬’의 경우처럼 정확하고 객관적인 해석을 도모하기 보다는 ‘가다머’의 경우처럼 해석을 이루는 과정을 해명하는 것에 집중된다.

 

따라서 해석은 현재적 관점에서 유래하는 유동성의 것이다.

 

기획자의 해석은 관람자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그들보다 높은 곳을 ‘작품 보기’의 과정을 실행하는데서 시작되고 논리적인 어법으로 ‘작품 읽기’를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심층적으로 전개된다. 이 ‘보기’와 ‘읽기’는 ‘해석’의 기초 단계이자 다른 용어이다. 기획자의 ‘해석하기’의 전략과 노하우는 마냥 ‘보기’만 실행하는 관람자들에게 ‘읽기’의 방법을 나아가 ‘해석’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한준희, 〈digital kaleidoscope〉, 2006. 《Seeing & Showing》전 출품작.

인터랙티비티 미디어 설치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관객의 해석하기’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Seeing & Showing》전의 사이버갤러리 중 윤기언 홈피

 


《Seeing & Showing》전 2차 전시 전경

 

 

 

 

 

행하기(Doing)와 상호작용(interactivity)

〈Seeing & Showing〉展과 관련한 우리의 논의에서, ‘보기와 읽기’, ‘보이기와 해석하기’로 확장된 논의 전개상 그 주체가 관람객-미술가-기획자의 모습으로 기술되었지만 미술현장에서의 상호작용의 주체는 이와 같은 순차적 양상을 결코 따라 걷지 않는다. (단지 구체적 이해를 위해 전개의 양상으로 살펴보았을 따름임을 부기해둔다.) 게다가 이 상호작용의 주체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는 만남의 현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합주체이다. 풀어 말해, 보기와 읽기, 보이기와 해석하기의 주체 역시 상황에 따라 관람객 혹은 미술가, 기획자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탈중심화의 복합주체인 것이다.(이 복합주체는 관람자의 ‘보기’나 미술가 혹은 기획자의 ‘보이기’와 같은 행위로 이분화되지 않는 불확정적 주체이다.)

 

가다머의 해석학이 결국 ‘실천 철학’이듯이 Seeing & Showing전이 확장하는 읽기와 해석하기는 실행(practice, praxis)의 성질로 귀결된다. 본고의 초입에서 거론한 6인의 작가 외에도 이 ‘해석의 프락시스’는 일어난다. 단지 인터랙티비티의 양상이 앞서의 작가들보다는 덜 직접적이라는 점에서 구분될 뿐이다. '여백은 비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리는 행위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작품(신찬식, 형상과 여백, 여백과 형상)이나 찰나의 순간성 속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움직임의 적극적 응시를 표방한 작품(김유정, 그림자 응시하기의 작업 “꿈꾸는 그녀”)이 그러한 예들이다. 인공의 불빛이 연출하는 부분적 이미지의 총합으로 생성되는 전체의 도시상을 보여주는 작품(정진용, 유토피아 이미지로서의 가상도시)나 일상의 잡다한 사물이나 풍경 이미지들의 나열을 보여주는 작품(박상희, 주변의 일상이미지 포착), 그리고 자연을 주체와 동일화하는 작품(박용창, 無念葵花-해바라기에 대한 상념)은 프락시스의 탈중심화된 복합주체를 십분 연상케 한다.

 

웹사이트 상의 사이버갤러리를 통해서 불특정다수의 ‘보기’의 주체들을 초대하고 이들과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참여 작가들과 기획자의 ‘해석의 프락시스’를 이들에게 이양한다든가 이러한 실천들을 자료집으로 남기는 다큐멘터리 작업은 출품작품 너머에서 생성될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을 시도하는 구체적 예가 된다. 더욱이 인천이라는 특수 지역도 그러하거니와 특정 공공장소에서의 1차 전시에 이어 갤러리 공간에서의 2차 전시를 기획하는 프락시스 전략은 문제제기와 평가를 한축에 꿰고자 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 보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술소통과 특정 공간을 접목하는 식의 복합적 장치가 주제의식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출품작품들과의 효율적인 만남을 이지러뜨리게 하는 아슬아슬한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6. 12. 2) ●

 

 

 

출전 /

김성호, "해석의 프락시스(praxis)와 미술에서의 상호작용", (Seeing & Showing전, 2006. 11. 18-30, 구올담치과병원, 2006. 12. 7-13, 혜원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