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구조적 치부를 구석구석 드러나게 한 미술계 여성의 야심은 단순했지만 맥은 정확히 짚었다. 자신의 능력이 학력, 권력과 결탁되어야 이 사회 어디든 무서운 힘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종착지는 대학교수였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직업이던 큐레이터는 교수만큼 존경받는 전문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큐레이터의 존재 이유를 제공하는 화가는 어떠한가. 그 또한 교수가 아닌 한 제대로 된 대접은커녕 설 자리조차 별로 없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가무악의 민족’이라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것은 마땅찮아 한다. 광대와 쟁이는 비천하고 책읽는 선비만이 고고했던 전근대적 의식이 생생히 작동하는 이 ‘문화적 지체(cultural lag)’ 현상이 한국 예술을 아카데미즘의 족쇄로 옭아매고 있다.
성악가도, 무용가도, 연극배우도, 모두가 교수여야 한다. 얼핏 보면 너나없이 예술교육자로 입신하려 드니 세계적 수준의 예술 육성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교수가 꿈인 얼치기만 양산하는 예술교육이 날로 번성하고 있다. 국제콩쿠르에서 수상한 영재들이 어느 순간 석·박사논문에 매달리니 그 번뜩이던 예능이 어디로 가겠는가?
예술이 교육된 행위인 것은 미적 표현의 숙련도와 완성도에 있어 일정한 기준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일상적 잡문을 문학이라 하지 않고, 득음(得音) 없이 소리지르는 것을 판소리로 보지 않는 것이 그 이치이다. 그래서 일정한 수준의 예술교육은 절대적이다. 그 다음은 상상력에 바탕한 창의력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 속에서 싹을 틔우고 생명력을 가진다. 논리적 사고로 접근하는 대학이 아니라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예술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예술교육과 학문으로서 예술이 미분화된 채 뒤엉켜 자리 잡다 보니, 이 땅의 예술대 교수는 예술가이자 예술교육자요 예술학자로서 말 그대로 전지전능한 존재로 군림한다.
과연 여기서 아카데미즘에 신음하는 예술의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심지어 예술영재 육성이 설립목적인 국립학교의 교수들조차 석·박사과정을 설치하게끔 법을 바꾸라고 주기적으로 데모를 하는 판이다. 이 기형적 예술생태계에서 백남준, 정명훈, 강수진의 탄생은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지난달 전 세계 팬들의 애도 속에 교황의 축원으로 영면한 위대한 테너, 파바로티는 스스로 대중의 눈높이로 내려가 노래하는 인간미까지 갖췄다. 팬들은 그가 박사인지 혹은 교수인지 알지 못한다.
반 고흐는 예술의 존재 이유를 인간이라 했다. ‘인간’에 대한 고민을 외면한 채 예술이 학문의 수단으로 구조화된 것은 아닌지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대로라면 한국예술은 아카데미즘의 굴레에서 자멸하고 만다. 예술이 ‘그들만의 리그’에 자족하고, 그것을 지원하는 시스템만이 (오)작동하고 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문예진흥기금이 한해 1000억씩 뿌려져도 예술가들의 60%가 월 100만원으로 살아가는 곳이 문화강국을 부르짖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문화 이벤트의 범람으로 생존 대안에 머리를 싸매도 모자랄 지경인데, 예술현장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문제는 예술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 국가의 불행이라는 데 있다. 선택과 집중도 좋다. 하지만 누구의 기준인가도 숙고해 보아야 한다. 히딩크가 없었다면 오늘의 박지성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유로운 창작 환경에서 나온 양질의 예술작품과 잘 보존된 문화유산이 문화강국의 토양이다. 거기서 국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격(格)이 있는 문화의식도 쌓여간다. 국부를 일궈낼 문화(콘텐츠)산업도 물론 여기서 시작된다.
- 세계일보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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