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봤다. 오케스트라의 유려한 선율도 아름다웠지만, ‘한국 피아노의 희망’이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연주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는 내내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이 ‘젊은 거장’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압도됐다. 약관의 피아니스트가 어쩌면 저렇게 뚝심 있게, 유연하게 피아노를 어루만질 수 있을까? 피아노로 하여금 제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맘껏 부르고 제가 추고 싶은 춤을 맘껏 추게 할 수 있을까? 감탄을 연발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연주 말미를 맞았다. 연주 뒤 계속된 관중의 박수로 김선욱은 끝없는 도돌이표처럼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해야 했다.
사실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으면서 그의 음악을 충분히 이해하고 거기에 매료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연주하는 내내 그라는 인간이 얼마나 뚜렷이 보이고 느껴지는지 그게 진정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남다른 상상력으로 펼치는 마음속 세계가 내 눈앞에서도 그대로 펼쳐지는 듯해 놀라웠다.
역시 예술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을 쓴 사람, 혹은 연주하는 사람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 인간과 그의 상상력, 창의력, 삶에 대한 통찰, 문제의식, 그리고 유한한 삶을 걸고 저 무한한 우주와 투쟁하는 그의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이다. 약관의 청년이 피아노 연주를 통해 그 모든 것을 분출하며 자신의 전 존재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는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답은 그의 탁월한 상상력에 있다. 상상력이란 상, 곧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세계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은 세계를 재구성할 줄 모른다. 그는 남이 구성한 세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다른 사람의 상을 판박이로 따르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그 사람을 느낄 수 없다. 사람을 느낄 수 없는 예술, 사람을 느낄 수 없는 종교, 사람을 느낄 수 없는 정치, 사람을 느낄 수 없는 경제, 사람을 느낄 수 없는 교육은 세상에서 가장 파괴력이 강한 폭탄이다. 상상력이 없으면 모든 게 피폐해진다.
뛰어난 예술가는 그가 꿈꾸는 상을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 준다. 그 상상이 그 어떤 현실보다 강력해 우리의 심장이 고동치고 맥박이 빨라진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상상에 자극을 받아 우리의 상상력 또한 기민한 활동을 시작한다. 상상은 상상을 낳는다. 그게 진정한 상상력의 힘이다. 김선욱의 상상은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는 그렇게 장엄하고 광대한 관객의 바다, 곧 상상력의 바다를 지휘하는 지휘자가 됐다.
상상은 관찰과 기투(企投)의 과정을 거쳐 꽃피어난다. 관찰은 단순히 대상을 꼼꼼히 바라보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창조성 연구가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위대한 통찰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 즉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말했다. 보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것은 관찰이 아니다. 보되 마음에 감동이 없는가? 그것 역시 관찰이 아니다. 예술가든 과학자든 진정한 관찰자는 종국적으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다.
그 숭고한 아름다움 앞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던지게 된다. 기투다. 내 지식과 의식으로 그것과 다투는 게 아니라, 신 앞에 손들고 나오듯 나 자신을 그것에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다. 피카소는 말했다.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한다”고. 의식과 지식으로 찾으면 늘 등잔 밑이 어둡다. 이성은 저렇게 밝게 빛나는데, 왜 해답은 보이지 않나? 하지만 그냥 나를 내맡기면 갑자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공연도 좋고 전시도 좋다. 이 가을에 나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을 대상을 찾아보자. 나를 내던질 기회를 가져 보자. 자기를 내던져 보지 못한 인생만큼 세상에 슬픈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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