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비평〕
임정은 展, 5. 25-6.3 김진혜갤러리
이미지의 흔적에 빛을 드리우다.
김성호(미술평론가)
언제나 우리와 늘 함께 있는 빛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 “나 여기 있어”라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그를 늘 대면하고 살면서도 그를 잊고 사는 우리들의 ‘망각 아닌 망각’ 혹은 그에 대한 ‘부재에의 인식’에 갑작스레 그의 분신들이 찾아온 셈이다. 그들은 화려하고 신비롭다. 사실 그의 존재가 그렇게 화려하고 찬란한 본질이 아니건만 분신인 그들은 우리들 앞에 그렇게라도 나타나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전해준다. 그로부터 눈멀어 살고 있는 우리들 앞에서 그의 존재를 일깨우며 ‘빛의 전령’임을 자처하는 이는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작가 임정은이다.
2층 전시장 전체를 신비스러운 빛의 향연으로 물들인 임정은의 작품은 투명한 유리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표면에 원색의 기하학적 도형들이 그려진 무수한 사각형의 유리판들은 저마다 벽면에 지지를 한 채 빼곡하게 들어서서 빛을 잔뜩 머금고 맑고 청아한 색 그림자를 길게 토해낸다. 유리는 투명체의 속성으로 인해 우리들 시지각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며 간혹 그의 존재를 망각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그것이 ‘늘 함께 있지만 우리들 일상의 인식 속에 부재하기 십상인 빛’의 여전한 존재함을 새삼스레 증명해 보여주는 매개체로 전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임정은_variation of cube07Jan._유리, 거울, 혼합재료_20×20×0.5cm, 가변크기_2005~7
임정은_빛이 만드는 이야기_2004
임정은_identity07July_유리, 거울에 분사_36×36×7cm_2007
작가는 유리의 투과성에 매료된 듯하다. 물리적으로는 경계를 짓고 있지만 시각상으로는 경계가 없는 유리매체의 투과성은 그녀의 작업을 읽는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그것이 이른바 시각적 존재와 실재적 존재 사이의 관계항 탐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경계이면서 비경계를 표방하는 유리의 매체 위에 이미지를 얹어놓으면서 이를 극대화한다. 사각형 혹은 원형에 근간한 채 다양하게 변주되는 기하학적 도형 이미지들은, 단지 붓에 의한 물감층이 유리에 덜렁 드러누운 것이 아니라 스텐실 기법으로 프린트된 물감층이 200-300도의 가마에 들어가서 구워져 유리에 착색되며 ‘박힌’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시각성이 전면에 나서고 있지만 그 본질은 물질에 각인되는 흔적처럼 실재에 남아있는 것이다. 유리표면에 납작하게 흔적 지어진 색의 물질성은 또 다시 전시 현장에서 빛을 받은 채 현란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실재를 가볍게 하는 이미지로 치환되고 있지만 그 이미지가 유리판 위의 원본의 물질성을 확장하거나 과장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원본의 실재를 공고히 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미지의 물질적 흔적’(실재)에 빛을 드리움으로써 그림자(이미지)를 산포시키고 이를 통해 이미지를 극대화하면서도 실재(이미지의 물질적 흔적)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전략적 인식은 3층 전시장에서 또 다른 양태로 구현된다. 사각형의 변주가 만들어내는 입방체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담은 유리판을 여러 장 겹겹이 싸고 있는 박스 작업이 그것이다. 작가는 유리판 앞뒷면에 일명 모래치기(sandblasting) 기법인 유리에칭의 방식으로 사각형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유리에 새겨진 이미지의 거리감을 강조하기 위해 모래치기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유리의 표면을 깎아내는 깊이를 조절한다. 투명한 유리판을 깎아내며 만들어진 반투명의 개별적인 사각형들은 겹겹이 중첩시키는 유리판에 의해서 비로소 입방체로 변주되어 나타나는데 유리에칭에 의해 조절된 깊이감에 따라 그 투명도를 달리 하면서 입방체의 3차원적 현실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투명한 유리매체가 시각적으로 지니게 되는 비물질감의 특성 위에 빛을 차단하는 불투명한 입방체의 이미지가 자리 잡게 되면서 물질감을 현존화시키게 된 것이다. 작가의 언급대로 ‘빛이 만들어내는 상자’가 되는 셈이다.
임정은_existence will07Jan._종이에 혼합재료, 유리에 분사_60×55×7cm_2007
임정은_빛이 만드는 이야기_2004-1
일견, 이번 전시는 실제 이미지가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발현되는 환영, 입방체 이미지의 다양한 공간 내 변주와 그를 대면하는 착시현상의 유도 등 광학적 측면이나 옵티컬 아트의 유형과 다리를 걸치면서 시각성의 차원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구조적이면서 건조한 이미지가 앞서는 그녀의 작업으로부터 우리가 이미지의 표피층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서 아프게 분홍빛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면 ‘비물질적인 이미지의 물질적인 흔적화’에 담겨진 임정은 작업의 정서적 본질에 한층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이미지의 흔적에 빛을 드리우다", 『art in culture』, 2006. 7월호, p.143. (임정은전, 5. 25-6. 3, 김진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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