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일반〕

 

2012년도 인물미술사학회 하계학술대회

이원일의 큐레이팅 연구 (1)

 

 

김성호(미학, 쿤스트독)

 

서론

이 글은 이원일 (1960. 11. 2 - 2011. 1. 11)의 큐레이팅이 ‘창조적 역설 (Creative paradox)’이란 개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는 몇몇 인터뷰1)에서 이러한 ‘창조적 역설’이 그의 큐레이팅이 지향하는 바임을 스스로 명확히 했다.

 

그런데 그 용어가 지닌 의미만큼이나 역설적인 것은 이 ‘창조적 역설’이란 개념은,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실제 큐레이팅에서 전시 주제나 소주제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은 그가 2009년 예정되었던 전시2)에서 이 개념을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전시가 연기됨으로써 이것이 구체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 개념은 다른 전시에도 실현되지 못한 까닭에 미실현의 것으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연구자는 그의 미실현된 ‘창조적 역설’이란 개념을 보다 더 구체화하는 작업에 집중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또 다른 인터뷰나 기획한 전시 카탈로그 서문에서 사용한 큐레이팅과 관련한 다른 개념들3)이 ‘창조적 역설’이란 개념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맞물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기획한 전시명, 혹은 주제명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난 개념들 역시 이 ‘창조적 역설’과 맞물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분석 작업에 집중할 것이다.

 

아울러 이 개념이 그간의 이원일의 큐레이팅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그의 큐레이팅 이론과 실제를 함께 검토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적 역설’이라는 미실현된 개념이 이원일의 전체 큐레이팅을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에 관한 하나의 모델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I. 이원일 큐레이팅의 지향점 - 창조적 역설

연구자는 먼저 이원일 큐레이팅의 지향점인 ‘창조적 역설’이라는 것을 역설이라는 몸통에 창조적이라는 방점을 찍는 통합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역설(paradox)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주의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로 논리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모순을 야기하지 아니하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4)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논리적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목적 아래, 부가적으로 이르게 되는 자기모순에 개의치 않고, 내재적 의미에 보다 더 주요성을 두려고 하는 상징적 표현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창조적 역설’(Creative paradox)이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것이 이원일의 큐레이팅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우리는 그의 창조적 역설이란 개념이 어디서로부터 근원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전적 의미에서 그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또한 그가 ‘창조적 역설’이 자신의 큐레이팅이 지향하는 핵심개념임을 강조했지만, 그가 어디서 그 개념을 빌려오고 있는지 필자가 검토한 자료에서는 확인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창조적 역설’이란 용어 자체가 학술의 장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탐 콘레이(Tom conley)의 저작5)에서이다.

 

그는 여기서 16세기 프랑스의 비주류 소설들에 나타난 서사 구조를 분석하면서 그것의 대표적 특징을 ‘창조적 역설’로 살피고 있다.6) 즉 그가 보기에 당시 비주류의 소설에는 ‘반서사(anti-narrative)를 실행하는 풍자(satire)와 같은 전략’ 7) 뿐 아니라, 유희(play), 대조(antithesis)가 뒤섞여 있는 구조8)를 통해서 ‘창조적 역설’이 발현되고 있다고 파악한다.

 

특히 콘레이는 ‘창조적 역설’이라는 것이 “메니푸스식(式) 풍자(Menippean satire)”와 관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9)  메니푸스(Menippus, 1639~40)는 고대 그리스의 클레스트리에에서 태어난 노예 출신의 철학자로 패러디, 유머, 환상에 가득한 냉소적 풍자를 남겼다. 카플란(Carter Kaplan)에 따르면, “메니푸스식 풍자는 세부들의 스펙트럼과 사실들을 낳는 실천(practice)이다. 그것은 독특하게 종합적인 구조-그러나 아직은 실재에 관한 특정한 관점이 없는 구조-을 만드는데(to form) 결집하는 사건들에 대한 인식들(perceptions of events)이다. (중략.) 그러나 무엇보다도, 메니푸스식 풍자는 이른바 “친숙함의 충격(the shock of the familiar)이라 불리는 과정들을 패턴화한다. 즉 매니푸스식 풍자는 인류가 지금껏 소유해온 지식과 지혜에 대한 재검토(reexamination), 재형성(reformulation) 그리고 재생 혹은 부활(renaissance)이 된다.” 10)

 

이처럼 카플란이 바라본 메니푸스식 풍자가 기존 질서에 대해 끊임없이 ‘다시(再, re)’를 실천하는, ‘(해부학적) 구조(Anatomy)’와 연계되는11) 것처럼, 풍자를 포함하는 개념인 ‘창조적 역설’은 콘레이에 따르면 명백히 ‘구조’와 관계한다.

 

그런데 그 구조란 더 정확히 말하면 “모순적 구조(ironic structures)”12)이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 언어 또는 주류의(major) 언어가 만들어온 구조와 틀을 유머, 패러디, 냉소로 흔들어대면서 균형을 잡아나가는 비주류의(minor) 자유로운 언어들로 세워낸 ‘새로운 구조’이다. 이러한 ‘모순적 구조’ 속에서 비주류의 개념을 풍자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세우기를 지속하는 ‘창조적 역설’이란 따라서 기존의 논리적 구조에서 볼 때는 ‘지식인의 질병’ 13)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일반화된 이념의 구조들을 전복시키고 논리적 구조에 관성화된 지식인들을 시험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아방가르드적인 예술 실천의 선조격으로 격상될 만하다.

 

‘창조적 역설’이 자연스럽게 유발시키는 이러한 ‘아방가르드적 실천’이란 개념 때문일까? 콘레이의 연구 이래 ‘창조적 역설’은 상상력, 교육과 관계한 연구14)로 구체화되거나 더 나아가 자유로운 예술 창작 정신에 근거한 사업경영과 자기 개발서15)로 확장,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창조적 역설’에 대한 콘레이의 개념과 그것으로부터 영향 받은 연구들을 검토해보면서 상기한 여러 개념들을 묶는 몇 개의 키워드를 아래처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table) 콘레이와 카플란 이론에 나타난 ‘창조적 역설’의 주체와 방법

 

연구자가 만든 도표 우측의 실천의 범주 속에서 우리는 기존의 재검토, 재형성, 재생 외에도 ‘대조’와 ‘반서사’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방법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콘레이 식으로 ‘대조적 유희(antithetical play)’ 16)로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원일의 큐레이팅에 대한 ‘실천적 연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대조적 유희’라고 하는 하나의 정의를 ‘대조’와 ‘반서사’라는 2가지 개념들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들이 다시(再, re)로 정의되는 여러 가지 실천 경향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살펴보도록 한다. 또한 ‘유희’, ‘구조’라고 하는 ‘창조적 역설’에 관한 나머지 개념들을 문맥에 따라 할당하고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이와 관련된 이원일의 실제적 진술을 들어보자.

 

“나는 끊임없이 핸디캡과 불균형이 어디 있는가를 찾습니다. 세계사가 백인들을 중심으로 쓰인 것에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나는 아시아인이고 한국인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콤플렉스를 역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결국, 균형 의식을 가져야해요. 내 전시기획의 핵심은 ‘창조적 역설’(Creative paradox)입니다. 내 아버지는 북한에서 내려와서 어머니를 만나 재혼을 하고 나와 동생을 낳으신 분이시고, 나는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보며 아버지가 우시는 것을 목격하고 자란 세대인 것입니다. MoMA에서 인터뷰를 할 때, 첫 질문이 “당신이 아시아를 프레젠테이션 하는 법적인 정당성을 이야기해보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박했습니다. “그럼 미국과 유럽이 일방적으로 써온 역사에 대한, 미술사에 대한 정당성을 1분 동안 먼저 나에게 이야기하면 내가 아시아의 이야기를 하겠다.” 그랬더니 “Maybe you`re right.”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부당한 서구 역사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설득력 있는 태도로, 화해와 균형의 모드로 가는 것이에요.” 17)

 

그가 들려준 MoMa에서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실제로 하나의 역설과 만나게 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해체적으로 계승한 메니푸스식 풍자가 엿보기기도 한다. 그것은 서구라는 주류가 만들어온 서사와 구조를 ‘재검토’하고 전복하려는 ‘반서사’이다.

 

이러한 이원일의 관점은 역설이 창조의 과정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파한 덴마크 물리학자 닐 보어의 다음과 같은 '창조적 사고(creative thimking)'와 다를 바 없다.

 

“역설은 편협한 사고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회초리질을 하며 전제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설을 발견하는 것, 즉, 때로 서로 다른 두 가지 모순적인 개념을 동시에 생각하는 능력, 바로 그 자체가 창조적 사고의 핵심이다.” 18)

 

그런데 이원일은, 인터뷰 말미에서 확인하듯이, 역설에 부가해서 용서, 화해, 균형이라는 태도를 바탕으로 삼음으로써, 주류의 서사를 해체하고 비주류의 서사를 ‘재형성’하려는 전복적이기까지 한 ‘창조적 역설의 실천’에 다른 이들의 정서적 교감과 공감을 요청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창조적 역설’의 주요한 지점이다.

 

그렇다면 용서, 화해, 균형에 바탕한 그의 창조적 역설이 어떻게 그의 큐레이팅에서 나타나는 것일까? 그는 미국 모마미술관(MoMA/뉴욕PS1)의 아시아현대미술전인〈Spectacle〉전의 초빙 큐레이터(Invited organizing curator)로 임명받은 후 가진 한 기자 간담회에서 다음처럼 이야기한 바 있다.

 

“아시아적 해체와 재구성, 혼성화의 일치와 불일치, 복합 문화적 카테고리간의 교차와 접변 현상 설명을 통해 창조적 역설(Creative Paradox)을 선보이겠다.'19)

 

그는 이 전시를 통해서 그의 큐레이팅의 핵심적 개념인 ‘창조적 역설’을 본격적으로 선보일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펀드라이징과 관계한 문제들로 인해, 2009년 예정된 이 전시는 결렬(잠정 연기)되고 말았다. 그가 창조적 역설이란 키워드를 제시한 것이 모마에서의 초빙큐레이터로서의 임무를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 아마도 전시가 이루어졌다면,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을 카탈로그나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구체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의 인터뷰에서 일정부분 그의 ‘창조적 역설’이 견지하는 실천의 방향성을 검토해볼 수 있다. 그가 말한 ‘해체와 재구성’이란 용어는 우리가 도표에서 검토한 ‘재검토, 재형성, 재생’과 연관된다. 아울러 그가 말한 ‘교차와 접변’이라는 용어는 도표에서 살펴본 ‘대조’와 관계한다. 마지막으로 ‘혼성화의 일치와 불일치’라는 용어는 도표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조(antithesis)가 뒤섞인 구조’ 그리고 실천에서의 ‘재형성, 재생’과 관계한다. 여기에 그의 주요한 화두인, 용서, 화해와 균형을 올려놓고, 그가 강조하는 아시아인, 한국인의 정체성을 주체로 잡아두면 비로소 그의 ‘창조적 역설’은 완성된다.

 

그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table) 이원일 큐레이팅의 핵심개념 ‘창조적 역설’의 주체와 범주

 

 

(2)편에서 계속----------

 

출전 /

김성호, “이원일의 큐레이팅 연구”,『2012년도 인물미술사학회 하계학술대회』, 인물미술사학회, 덕수궁미술관 세미나실, 자료집, 2012. 8. 24. pp.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