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2021.11.11-2022.03.0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

보도자료로 먼저 만난 전시는, 이미 너무 알려진 그의 '국민화가'를 비롯한 여러 수식어를 내려놓고 보라 말한다. 일종의 '판단중지'하고 낯설게 보자는 것이다. 작가 박수근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이들이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펼쳐 보이는 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자부심까지도 느껴지는 듯하다. 꽤 많은, 기록할만한 이들의 생애를 걸쳐 다룬 회고전과 책에서 이러한 노력을 하곤 한다. '전설'로 박제 된 그들을 다시,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동시대 혹은 후대의 평가로 또 평가자의 번쩍번쩍하고 주렁주렁한 수식과 찬사가 달린 상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보자고. 작가 혹은 작품 대 관객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

(사진)철쭉, 1933 / 겨울 풍경, 1934
작가가 19세에 그린 수채화부터 돌아가시기 직전 그렸던 유화까지,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 174점을 전시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박수근의 작품'들'을 제대로 봤던 게 언제던가. 그 마티에르까지 파헤쳤던 2014년 100주년 기념전시가 떠오른다. 작가의 사후 56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뒤늦게 열리는 이유는, 박수근이 중요작가 순위에서 밀려서도 아니고 오직 작품을 채워넣기 어려움에서 왔다고 한다. 며칠 전 신문 기사에 기획자인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인터뷰가 실렸다. 2016-18년 박수근 전작도록사업으로 정리된 작품군이 있었기에 숙제처럼 남아있던 이 전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득 2016-18년,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박물관을 열람차 방문했던 박수근전작도록사업팀이 떠오른다. 그런, 사람의 손이 많이 간 노력들이 시간이 지나면 이런 결과물로 온다. 시간이 흐른 것들은 하나같이 시간을 더 필요로 한다.

(왼쪽) 박수근의 미술 용어 메모(소책자), 잭슨폴록을 비롯한 작가들의 이미지를 스크랩한 스크랩북(부분)
/(오른쪽) 《제8회 미협전》 스크랩북, 1956
작가의 손때묻은 스크랩북과 메모집 등이 꼼꼼하게 나열됐다. 동시대 미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한정된 재원 안에서 찾아 공부했던 작가의 모습이 연상됐다. 이것 외에 작가의 일대기를 일기처럼 써 내려간 '아내의 일기' 원본과 일부 전시 이력을 쓰지 않은 이력서 등의 자료들도 나열됐다. '꼼꼼하게 나열됐다'고 적은 이유는 하나하나 보여주는 이유들이 명쾌했기 때문이다. 아카이브가 전시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많은 전시에서 아카이브를 함께 보여주지만, 관객의 동선과 이해 순서까지 고려하는 일은 좀 드문 편인 듯하다. 그런 면에서 눈길이 갔다.

(사진)절구질하는 여인, 1952 / 절구질하는 여인, 1956
최대한 작품을 모아 전시를 한 덕에, 작가가 그린 시기별 비슷한 작품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사진)박수근이 구입했던 잡지(부분), 박수근의 삽화와 표지화
작가가 구매해서 봤다는 『미술수첩』, 『아틀리에』, 『미즈루』 같은 잡지들은 자료실에서도 늘 만나왔던 것들이라 작가와 나의 시간의 폭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왼쪽)노상에서, 1950년대 전반
(오른쪽)생선장수, 1958 / 노상의 사람들, 1960 / 노상의 사람들, 1959 // 인물, 1959 / 빨래터, 1954

(사진)박완서, 『나목』, (열화당, 1976) 중에서 후기 /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 (왼쪽에서 세번째 박수근)
전시에 빠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 중, 이들이 있다. 소설가 박완서와 사진가 한영수.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 함께한 사진이 남아있는 작가 박완서의 책 『나목』은 전시도 되어있고, 벽에 글귀로도 적혀있다. 물론 이 전시의 제목에도 남았다. 기획자는 이들의 역할이 단순한 들러리가 아니게 되기를 원하며, 애써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전시를 본 나는, 『나목』을 읽어야 한다는 숙제가 생겼다.

(사진)한영수, 서울 금호동, 1956-1963/2021 / 서울 명동, 1959/2021 / 서울, 1956-1963/2021
세 번째 관, 창신동 사람들의 입구는 사진작가 한영수의 사진들로 시작된다. 기획자의 애씀이 동선에서도 묻어나는 듯했다. 당시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 한영수의 시선은, 전시 가이드의 설명에서 처럼, 박수근을 닮았다. 사진들로 인해, 나는 이 시대에 한 걸음 다가간 느낌을 받았다.

(사진)고목, 1961
네 번째 관,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새소리로 시작된다. 양구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가 즐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느릅나무, '박수근 나무' 영상으로부터다. 이전 전시관들과 다르게 밝은 벽면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전시관은, 그래서 더욱 밝은 날 산책하는 기분을 만들어줬다.

(사진)고목과 여인, 1960년대 전반 / 양구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가 즐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느릅나무, '박수근 나무'
이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소장 기관에 요청했을 때의 작품 수는 20점이 안됐었다고 한다. 덕수궁관의 4개의 전시실 중, 한 개도 채우지 못할 수준이었다고. 그러다 올 초 떠들썩했던 '이건희 컬렉션'이 들어왔고, 그 외에도 개인 소장가들의 대여 결정이 있었기에 이런 전시가 가능했다고 한다. 우연이네 운명이네 하는 것들은 세상의 이치를 조금은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곤 한다. 이런 것도 운명일지도.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코멘트에 따르면, 소장가들 중에 연로하신 분들이 다수인데 '이번이 마지막'이라면서 대여해주셨다고. 십몇 년 전의 내가 봤던 전시가 그러했듯, 이번 전시도 다시 또 언제 열리게 될지 모르겠구나. 조금은 아쉽지만, 반대로 오늘의 관람 기회에 감사를.
사진.글.효례
(참조)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101190001360
한국일보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