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yll. 강민수가 자신의 작업에 부친 이 주제는 목가적인 전원풍경이란 뜻이다. 현실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인 풍경이고, 일상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풍경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하나쯤 품고 있기 마련인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현실도피를 위해 마련된 가상의 공간 혹은 장소 혹은 풍경으로서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 위로 싹튼다. 현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에 힘입어 현실과는 또 다른 가상현실을 저마다의 관념으로 축조해낸 것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해 자신의 내면으로 숨어든 것이란 점에서 내면에서 또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본 니체의 청사진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사람들은 진즉에 저마다의 내면에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라는 성좌를 축조해왔다. 철인정치를 꿈꾼 플라톤의 가상제국이 그렇고, 사회변혁을 위한 구실로서 제안되곤 했던 유토피아가 그렇고,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오버랩 된, 지상낙원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아르카디아가 그렇고, 고귀한 야만의 비전을 열어준 낭만주의의 폐허 이미지가 그렇다. 

 

아르카디아 인 에고 즉 죽음은 심지어 낙원마저도 피해갈 수는 없다는 전언에서 예시되듯 이런 이상향이며 유토피아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그리고 그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성질은 현실과의 관계로부터 온다. 이상향은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 위로 싹튼다고 했다. 이상향을 축조하기 위해선 현실을 부정해야 한다. 이상향은 욕망이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과 현실로부터의 욕망이 부닥치고 충돌하는 것이다. 낙원마저 피해갈 수는 없는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그렇고, 상징계의 틈새로 불쑥불쑥 비집고나오는 실재계의 출현이 그렇다. 상징계의 현실원칙으로 짜인 구조를 의심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다. 이런 이중성 내지 양가성을 보여주는 오브제가 인형이다. 인형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형에 투사된 동화적 상상력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면, 때로 인형이 낯설게 보이는 것은 욕망을 위해 억압했던 현실원칙의 복수로, 캐니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언캐니의 출현으로 볼 수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가상현실 시대에 이런 이상향이며 유토피아는 어떤 식으로 구현될까. 픽처레스크 곧 그림 같은 풍경이란 표현에 반영된 실제와 욕망(가상)의 전복현상으로 나타난다. 실제가 욕망의 기준이 되는 대신 욕망에 맞춰서 현실이 재단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에 이상향은 키치의 얼굴을 띤다. 언젠가 중산층을 대상으로 자신이 살고 싶은 집에 대해 설문을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설문을 합산해 욕망을 이미지로 구현해 본 결과가 재미있다. 호수를 끼고 있는 초원 위에 지어진 목조 주택 뒤편으로 자작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그리고 사시사철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이 멀리 내다보이는, 그런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영락없는 키치다. 어쩌면 선남선녀들이 최소한의 갈등도 없는 세상에서 자족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이상향의 발상이며 밑그림 자체가 이미 키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욕망 자체가 키치일지도 모를 일이다. 

 

강민수는 이런 키치에 필이 꽂힌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할 것만 같은 풍경, 아련하고 아득한 풍경, 신기루 같고 데자뷰 같은 풍경, 마치 기억의 고향과도 같고 그리움 자체인 것 같은 풍경이다. 가정법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는 그 풍경은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할 것만 같은 풍경이란 점에서 시뮬라크라와 통하고, 실재의 흔적을 간직한 풍경이란 점에서 현상학의 전제에 해당하는 기억의 저장고며 의식의 지향호와도 통한다. 작가는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존재와 부재와의 경계에 있는 것 같은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으로 옮겨 놓는다. 

 

어둑한 공간에 들어서면 놀이터가 나온다. 실물 크기의 미끄럼틀과 각종 놀이기구가 놓여 있고 공간 한쪽에는 피아노도 보인다. 그런데, 놀이터에 정작 아이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아이들은 놀이터와 벽면 공간을 스크린 삼아 그 표면 위로 투사되는 두 개의 엇갈리는 영상 속에 등장한다. 수년전 작가가 독일에 유학하던 시절에 자신의 아이가 또래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기록해 놓은 영상과 매스미디어에서 채집한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영상물이다. 각각 주관적인 기록과 객관적인 기록, 사적인 영상과 공적인 영상이 서로 대비된다. 영상은 작가와 자신의 아이로 하여금 과거의 자신과 만나지고 대면케 하는 일종의 타임머신 역할을 한다. 나는 그리고 내 아이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때 그곳에도 있었었지.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듯 그때 그곳에도 존재했었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맞닥트리는 이 존재론적 사건은 사진과 미디어의 기술 덕에 가능해진 것이지만, 사실은 존재로 하여금 비존재로 그리고 부재 속으로 밀어 넣는 범상치 않은 경험이다. 남미의 매직 리얼리즘 작가 보르헤스 역시 자신의 소설 속에서 똑같은 상황을 그려 보인 적이 있었다. 

 

현재형의 기술과 과거형의 기술이 공존하면서 오버랩 되는 이 경험은 시간이 왜곡되고 비틀리는 아이러니한 순간 속으로 존재를 밀어 넣는다. 그렇게 현재 위에 포개진 과거, 존재 위에 드리워진 부재 속으로 밀려들어간 나는 그곳에서 그 때의 나를 만나고 부재하는 나를 본다. 내가 나를 본다? 존재하는 내가 부재하는 나와 대면한다? 자신의 아이를 기록한 영상에 작가의 회상이 포개지고 존재일반의 공감이 겹친다. 사적인 영상이지만 이처럼 공감을 이끌어내는 탓에 특수성과 보편성을 얻는다. 어쩌면 나는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살고 있는지 모르고, 존재가 아닌 부재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영상 밖에 있는 나는 영상 속에 있는 내가 연장된 것이며, 존재는 부재가, 현재는 과거가 연속된 것이 아닌가. 사적 영상물은 이처럼 존재와 부재의 애매한 경계 위로 존재를 호출한다. 어쩌면 그리움 자체로 변질되고 승화된 회상과 기억의 경계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매스미디어에서 채집한 영상물이다. 영상에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 흐르고, 그 장면들 사이사이로 미아들이며 실종된 아이들의 신상정보 사진이 컷으로 들어온다. 흐르는 장면과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부재 속에서 끄집어낸 듯 스틸 컷이 오버랩 되는 것인데, 러시아의 전위적인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외관상 서로 무관해 보이거나 이질적인 두 장면을 중첩시켜 일관된 서사읽기를 방해하고, 일관된 서사가 사실은 허구임을 폭로하고, 그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틈새와 균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전략이며 방법론을 작가의 영상에 적용시켜 보면 스틸 컷은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담은 영상의 무심한 서사 읽기를 방해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방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스틸 컷은 무슨 말을 하고 싶고 무엇을 주지시키고 싶은 것일까. 도대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아이들은 영상 속에서처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안전할까. 스틸 컷이 보여주고 있는 실종된 미아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잠정적인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영상이 자전적인 영상과 대비되면서 그 현실은 자신의 아이의 잠정적인 현실로 확대 재생산된다. 논리를 좀 비약시켜 보자면,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미아였고, 부재하는 것처럼 살아왔고, 잠재적인 실종상태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부재하는 아이들이며 실종된 아이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는 유학시절 독일 현지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 키드냅(유아 납치) 사건을 보도로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당시 아이를 키우고 있던 터여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당연한 일을 당연지사에 그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으로 옮겼다. 자신의 작업을 위한 물꼬를 트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로부터 납치된 아이들이며 실종된 아이들, 불확실한 기억과 모호한 재생, 존재와 부재와의 애매한 경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정서적이고 미학적인 지점들 이를테면 아이러니와 멜랑콜리와 노스텔지어를 작업의 중추로 삼았다.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의미하는 Idyll이란 근작의 주제는 이 계기며 중추 모두를 함축한다. 근작이라고는 했지만, 어쩌면 이 주제는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전제일 것이다. 여하튼, 입체 형식의 공간설치작업으로 나타난 근작은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으로 먼저 선보인 바 있다. 그림에서 공간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재현적인 현실에서 현실적인 재현으로 확장된 것인 만큼 그림과는 사뭇 다른 실재감을 준다. 그 때 그곳에 존재했었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감을 손에 쥐어준다고나 할까. 

 

영상은 작업에 서사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놀이터를 비추는 조명 역할도 한다. 영상이 꺼지면 서사도 꺼지고 조명도 꺼진다. 그렇게 어둑한 공간에는 주인을 잃은 빈 놀이터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그 빈 놀이터에 서면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며 부재하는 것들이 내는 소리, 기억이 밀어낸 소리며 내면에서 온 소리가 들린다.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 그 묵언의 소리며 무언의 소리를 듣다가 불현듯 눈을 들어보면 뭔가 낯설어졌음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하얀 놀이터가 창백한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실체는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진다. 빈 놀이터가 부재하는 아이들을 표상한다면, 놀이터의 창백한 몰골이 아이들의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성정을 떠올리게 한다. 나도 어른이 되기 전에 저처럼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지. 그리고 부재하는 아이들이며 실종된 아이들의 무슨 혼령과도 같은 침묵이 부지불식간에 이런 자기 연민을 깬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내가 어린아이였던 시절로 데려다준다. 존재와 부재,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의 허물어진 경계 위로 호출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어쩌면 그리움 자체일지도 모를 존재의 원형 속으로 밀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