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현대인의 특징으로서 상실감을 꼽는다. 신의 상실(니체)과 중심의 상실(한스 제들마이어), 정체성 상실과 존재감의 상실 등등. 신으로 통하던 중심을 내어주고 인간 본연의 자존감을 획득한 것이지만, 그렇게 자유의지와 함께 부조리의식을 떠안은 것이지만, 덩달아 정체성과 존재감마저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인간이 저 홀로 서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이 매개가 되면서 과정이 왜곡되어졌을 터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길은 상품으로 통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모든 유형무형의 것들은 한갓 상품이 되고 소비재로 전락한다. 상품적 가치가 없는 것들은 존재가치를 심각하게 위협받는데, 자연 역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이며 상품으로 전락한 것들 중에는 자연도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에게 자연은 없다. 다만 관광지나 유원지, 웰빙과 힐링,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과 같은 상품화된 자연이며 가공된 자연이, 자연이라는 아이콘이 있을 뿐. 현대인에게 자연은 다만 풍문으로나 떠도는 그 때 그 시절의 향수나 전설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모랫바람 부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삭막하고 팍팍한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가 뿌리내릴 여지가 별로 없다. 여기서 자연은 고향과도 같다. 그러므로 자연을 상실했다는 것은 고향을 상실했다는 말과도 같다.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현대인의 허전한 마음은 바로 이처럼 뿌리의식이며 원형의식의 상실감에 기인한다. 정리를 하자면 자연과 고향과 원형은 하나의 꼴에 부쳐진 다른 이름들로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와도 통한다. 어쩌면 예술의 기획은 자연과 고향과 원형에 대한 상실감의 회복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일지도 모른다.
김유정 역시 예외적인 것 같지는 않고, 더욱이 작가의 경우에 더 그렇다. 적어도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식물과 화분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관심은 재현적인 것에 맞춰져 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손에 잡힐 듯한 실체감이나 꽤나 사실적이고 잘 그린 그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그림은 재현을 넘어선다. 바로 감정이입이다. 식물과 화분에 감정이입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상실감을 그린 것이다. 식물과 화분을 상실감의 메타포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상실감은 상실감의 회복을 향한다. 상실감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이미 상실감의 회복을 전제하거나 예비하고 있는 행위가 아닌가. 그리고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상실감은 작가의 사사로운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공연한 경험이란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는다. 여하튼 그렇게 상실된 자연의 빈자리에 이식된 자연이며 인공자연이 대신 들어선다. 이식된 자연도 자연이고 인공자연도 자연이다.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고 왜곡된 와중에도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싶다. 그런 이식된 자연이며 인공자연으로 치자면 인간에 의해 양육되는 각종 식물과 채소, 화초와 화분을 그 예로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김유정은 그런 화초와 화분에 필이 꽂힌다. 그 생리나 꼴이 꼭 자기를 보는 것 같고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식물은 동물과는 다르게 존재감이 좀 희박한 편이다. 누군가가 개입해서 일부러 환경에 변화를 주지 않는 한, 식물은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움직임이 없고, 생장하는 과정도 생육의 정도도 잘 감지되지가 않는다. 심지어는 죽어도 죽었는지 모르고 지나치는 일도 있다. 한마디로 동물에 비해 생명체라는 것이 잘 실감나지가 않는다. 이처럼 없는 듯 있는, 죽은 듯 살아있는 식물은 그래서 오히려 더 세심한 관찰과 주의가 요구된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이 요구되는데, 다른 말로 옮기면 사랑이 되겠다. 감수성이란 결국 대상을 향하는 사랑의 강도와 밀도의 문제인 것.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중엔 꼭 식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없는 듯 있는, 죽은 듯 사는 사람들이다. 그 존재가 잘 감지되지 않는, 쉽게 자기를 내어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다 그런지도 모른다. 자기를 대리하는 페르소나 뒤에 숨어 저마다 쓸개를 핥고 있는지도 모른다. 밤이면 밤마다 발로 거울을 닦으며 머리를 빗는 슬픈 짐승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태를 단순화하는 감이 있지만, 동물성이 강한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사람들이 외면을 향한다면, 식물성에 기울어진 사람들, 그래서 적어도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존재감이 희박하게 와 닿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내면을 향한다. 외부와의 소통을 통해서 존재의 영역과 범주를 확장하는 대신, 자기 내면에 축조한 성좌를 공 굴리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움직임이 없는 식물, 살았는지 죽었는지 잘 실감나지가 않는 식물을 이런 내면화의 경향에 대한 표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외면이 된 내면의 표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작가의 관심도 식물의 바로 그런 부분에 맞춰지고, 이미 내면인 식물을 그리고, 식물의 내면에 자기의 내면을 포갠 그림을 그린다. 식물에서 자기를 본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작가는 한갓 식물을 그리고 화초를 그리고 화분을 그리지만, 이 모든 그림은 사실 자기의 내면을 그린 것이다. 일종의 마인드스케이프 곧 내적풍경을 그린 것이다. 자기의 내면을 어루만지면서 내면과 대면하고 대화하는 과정이 만든 그림이다. 자기의 외상을 그린 것이고, 존재 일반의 트라우마를 그린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이나 해석은 작가가 그린 식물이 한눈에도 예사롭지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작가는 색에 좀 인색한(아님 엄격한?) 편이다. 대개의 그림들에 흑백 모노톤의 절제된 색채감각이 적용되고 있어서 실제를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와 닿는다. 모노톤의 화면은 때로 잿빛으로 어필되기도 하는데, 살아있는 식물을 그린 것임에도 실제로는 식물의 주검이나 흔적을 그린 것 같고 식물의 화석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네거티브 곧 일종의 암화방식도 흥미롭다. 대개는 어두운 화면 위에 스크래치를 가하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섬세한 잎맥이며 꽃의 디테일이 하얗게 드러나 보이는 탓에 그 이미지가 역전돼 보인다. 알다시피 네거티브는 포지티브를 뒤집어 보인 것이다. 자기 내면을 뒤집어 보인 것이다. 어두운 화면이 내면이고, 어두운 화면 위로 부유하는 잎맥이며 꽃잎 위로 내면의 어둠을 밀어올린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서 한갓 식물이지만 내면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유정의 그림은 알다시피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것이다. 프레스코는 건식과 습식이 있다. 건식은 회칠한 표면 위에 안료가 얹히는 것이고, 습식은 안료가 벽 안쪽으로 스며들어 일체를 이룬다. 습식은 회칠한 물기가 미처 마르기 전에 그림을 끝내야하므로 사전의 충분한 계획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젓은 상태의 색채와 건조한 이후의 색채가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를 미리 예상하거나 감지해내는 감각도 필요하다. 그렇게 회칠한 표면의 안쪽으로 침윤돼 일체를 이룬 먹빛이 수묵화를 닮았다. 이렇게 마치 내면이나 심연의 표상과도 같은 어둑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나면, 비로소 그 위에 식물이며 화분 등의 모티브를 덧그려나간다. 바늘처럼 그 끝이 뾰족한 도구나 사포로 표면에 미세한 스크래치를 조성하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디테일이 여실한 그림을 그리는 것.
이렇게 작가는 어둑한 화면 위로 어둠을 밀어올리고 내면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식물이며 화분들은 말하자면 어둠이 밀어올린 어둠이며 내면이 밀어올린 내면이다. 마치 암화와도 같고 백묘와도 같은 그림이 실제를 역전시켜 내면화의 경향을 강조한다. 어둠을 드러나게 하고 내면을 뒤집어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드러나 보인 어둠이며 뒤집어 보인 내면이란 무엇인가. 바로 상처며 트라우마다. 바늘 같이 뾰족한 도구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화면이라는 몸체에 흠집을 낸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이런 흠집이 만들어낸 흔적인 것이고 상처의 흔적인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렇게 외상의 표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면의 어둠을 헤집어 자신의 상처를 캐내고,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자신의 상처와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상처의 외화를 통해서 상실감을 회복하고 상실된 것을 복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한갓 식물에게서 위로 받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를 얻어갈 수가 있었다. 아마도 식물성에 기울어진 작가의 성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늘로 긁어낸 흠집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면의 살에 난 상처를 헤아리는 행위이며 자기반성적인 행위에 비유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시각을 넘어선 촉각적인 그림, 시각과 촉각이 그 경계를 허물어 한 몸을 이룬 회화적 경지를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불현듯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화분에 눈길이 간다. 다시 보아진다. 새삼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