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강력한 인터미디어로서 사진과 함께 판화를 예시한 적이 있다. 미디어 시대에 걸 맞는, 미디어 시대를 견인하는 지배적인 장르이면서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전통적이고 첨단적인 매체로 본 것이다. 그렇게 판화와 사진은 상호 영향관계를 주고받으면서 이미지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판화는 사진과 더불어 현대미술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럼에도 여하튼 판화다운 판화는 전통에 충실한 판화일 것이다. 전통적인 방법을 견지하면서 현대적인 모드를 견인하는 판화일 것이다. 여기에 배남경, 이서미, 윤세희, 세 작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배남경, 나뭇결에 오버랩 된 존재의 결. 배남경의 판화는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듯 아련하고 아득하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지만 신기루를 보는 듯 흐릿하고 모호하다. 그 때 그 곳에 그 혹은 그녀가 있었다는 실체감보다는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비현실적인 아우라로 그림을 감싼다. 실체감이 희박한 만큼 오히려 암시력이 강조되는 편인데, 저마다의 감성의 결에 따라서 그림에 참여하고 향유하도록 유도하는 열린 그림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미미한 흔적을 남기거나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덧없는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기억의 끝자락을 따라 겨우 딸려 나온 것들이 그림과 그림을 대면하는 주체를 특유의 정서로 감싸이게 한다. 작가가 세계를 보고 대하는 태도가 정서적인 형태로 반영되고 배어나온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그 태도며 정서가 관조적이다. 주변의 일가로부터, 개인적인 생활사의 언저리로부터 채집된 것이면서도 삶이며 일상이 어슷비슷한 까닭에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다. 삶이 그렇고 일상이 그렇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히는 명명백백한 현실을 사는 것 같지만, 그 현실은 시간의 풍화며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렇게 현실은 희미한 흔적으로 겨우 존재하다가 종래에는 그마저도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렇게 기화되는 것들은 아름답다. 작가는 그렇게 기화되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느낀다. 그렇게 기화되는 것들이며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을 붙잡아 한시적인 영원이란 모순어법 속에 붙박고 싶다. 작가는 이렇게 현실이 아닌 현실의 흔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흔적은 어떻게 조형의 옷을 덧입는가. 배남경의 판화는 사진을 목판화로 재현한 것(물론 판각과정도 있지만, 기본적으론)이란 점에서 특이하다. 보통 판화에서 사진의 차용은 흔히 사진제판법으로 알려져 있다. 석판화와 공판화(실크스크린)를 비롯한 동판화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목판화에서 사진제판법을 차용하는 경우는 이례적인 만큼 성공적인 경우도 드물다. 아마도 그 구조가 성근 목판에다가 사진을 전사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지난한 형식실험을 통해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독특한 색감이며 질감이 우러나오는 목판화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흔히 사진의 질감(혹은 생리)과 목판화의 질감(혹은 생리)이 서로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는 선입견을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부연하면 판화는 회화에 비해 평면화의 경향이 강한 편이다. 보통은 색을 낱낱의 색판으로 분해한 후 이 색판들을 하나하나 중첩시켜 찍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원하는 색을 얻는 프로세스 탓이다. 배남경의 판화는 목판화이면서도 이런 평면화의 경향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는다. 특유의 기법(목판평판법)도 기법이지만 먹과 한국화 물감을 사용해 한지의 배면에 충분히 스며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화물감(수성안료)을 수차례에 걸쳐 반복 중첩시킨 그의 판화에서는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과 같은 먹의 색감이며 질감이 느껴진다.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시간의 결이 느껴지고, 그림의 표면 위로 부각된 나뭇결에 그 시간의 결이며 존재의 결이 중첩돼 보인다.
이서미, 환상동화와 일어서는 세계. 유년의 아련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들 중 입체동화책이 있다. 책을 펼치면 책 속에 누워 잠자던 그림 속 이미지가 일어나면서 환상적인 세계 속에 빠져들게 한다. 어른이 된 이후에는 더 이상 그 때만큼 쉽게 환상 속에 빠지지는 않게 됐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감행하게 해준 순간이며 계기였던 것 같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환상을 밀어내고 그 빈자리를 현실로 채워 넣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른이 된 이후에 모처럼 받아 쥔 크리스마스카드 속에 그 입체 그림이 숨어 있었다. 숨어있다는 표현이 적절한데, 카드를 펼치기 전에는 보이지도 않거니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서미의 팝업 판화는 바로 이 입체 카드에서 착상된 것이다. 판화를 찍어낸 후 일정 부분을 칼로 오려내 일어서게 하는 것인데(때로 따로 찍어낸 것을 오려 붙이기도 한다), 대개 건축물이나 사람과 같은 모티브에 해당하는 부분을 그렇게 한다. 이로써 그림은 평면으로 나타난 배경화면과 그 화면을 배경 삼아 입체로 일어선 모티브 부분이 대비되고 어우러지는 시각적 즐거움으로 유도한다. 회화도 그렇지만 보통 판화는 평면 매체인데, 작가는 여기에 팝업 기법을 도입해 그 경계를 입체로까지 확장한다.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것. 여기에 팝업으로 처리된 모티브 부분에 그림자가 생기면서 현실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림 속 환상세계와 그림 바깥의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것. 이처럼 작가는 평면과 입체, 환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든다. 이처럼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든다는 것은 어쩌면 어른의 일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의 놀이에 가깝다. 지금 비록 작가는 어른이지만 적어도 그림 속에서만큼은 유년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고 잊힌 어린아이의 놀이(사실은 어른들을 위한 놀이?)를 되불러오고 싶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분신이며 캐릭터인 일명 새서미(아마도 새를 닮은)를 그림 속으로 밀어 넣어 환상세계를 여행하게 한다. 그 환상세계가 무슨 무대 같다. 삶의 면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무슨 인생극장 같다고나 할까. 작가의 그림 중엔 실제로 무대며 극장을 소재로 한 경우가 없지 않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 중엔 반복되는 패턴이 많고 특히 사각의 패턴이 많은데, 아마도 저마다의 방을 연상시키고 오밀조밀한 아파트의 창문을 연상시키는 이 패턴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속된 표현에 삶을 한편의 연극이며 영화에 비유하는 말이 있다. 작가가 펼쳐 보이는 인생극장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할 것이며, 여기서 작가는 그 극장의 연출가가 된다. 그리고 그 무대며 인생극장 위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공연으로 올려 진다. 공연을 보면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르고, 그 계단의 끝자락은 하늘 길에 연이어진다. 여기서 계단은 저마다의 욕망을 상징할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욕망의 전형이랄 수 있는 바벨탑의 현대판 버전을 대비시켜 그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보이고 물 위를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삶은 무대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막막한 바다에 비유되기도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심연에, 어쩌면 어둠 자체일지도 모를 어둠에 비유되기도 한다. 작가의 그림은 밝고 경쾌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그림의 다른 한 자락은 이렇듯 심연에 맞닿아 있다.
윤세희, 도시에 대한 인상과 도시회화의 가능성. 영화 중 현대도시의 생리에 걸 맞는 장르로 치자면 느와르 영화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 안을 쫓듯이 파고들다가도 불현듯 줌아웃하면서 도시 전체를 조망해 보여준다. 그렇게 치열한 일상과 공허한 관조를 대비시켜 극적 효과를 강조한다. 그런가하면 한바탕 휘황한 조명이 환락도시를 핥고 지나가면 도시는 불현듯 어둠 속에 잠긴다. 우중이거나 막 비가 그친 끝자락처럼 상쾌하면서 우중중한(우울한?) 정서를 여운처럼 남긴다. 환락도시와 우울한 도시가 대비되고 오버랩 되는 것인데, 환락과 우울이 도시의 정서임을 알겠다.
윤세희의 판화는 치열하고 정직하다. 무슨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 방법은 대상에 들러붙어 대상에는 드러나 보이지 않는 어떤 정서를 드러나 보이게 한다. 도시를 그리면서 도시의 정서(이를테면 도시다움과 같은)가 배어나오게 한다. 드라이포인트로 일일이 새김질해 만든 그림 속에서 도시는 환락도시보다는 우울한 도시로 와 닿는데, 아마도 세부가 손에 닿을 듯 정치한 묘사와 흑백의 모노톤에 한정된 금욕적인 색채감정 탓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도시를 그리면서 도시의 어떤 정서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를 위해서 작가는 다양한 시점의 변주를 주효한 도구로서 제안한다. 먼저, 파노라마 시점이 있다. 가장자리로 밀집한 아파트 단지가 에워싸고 있는, 멀리 다리가 내다보이는 한강변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파노라마 시점은 옆으로 긴 그림에 걸맞고, 아득하고 먼 정서를 자아낸다. 막막한 느낌과 관조적인 인상을 전달하기에 어울리는 구도며 시점이다. 여기에 흐르는 듯 멈춘 듯 심연처럼 검은 한강이 대비되면서 극적인 긴장감을 더한다. 그리고 앙각시점을 들 수가 있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려다보고 그린 그림은 카리스마가 넘치고 피사체의 위용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탓에 이데올로기적이고 제도적이다. 각종 동상이 재현되는 전형적인 시점이며 방법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렇게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것 같은 마천루를 그렸다. 마천루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하늘이 있지만, 그 하늘은 마천루의 위용을 강조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역할에 지나지가 않는다. 이렇게 작가는 짓누르는 듯한, 최소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억압적인 도시를 그렸다. 그리고 부감시점이 주목된다. 이번에는 위에서 혹은 멀리서 아래를 보고 그린 그림인데, 상대적으로 넓은 시야를 아우르게 해주고, 전체를 조망하게 해준다. 일상의 전경들이 아기자기한 미니어처 모형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작가는 분주하고 번잡한 일상의 전경을, 억압적인 마천루를,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사실은 끝도 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한강변의 정경을 매개로 서울의 겉과 속을 파고든다. 그렇게 파고든 그림이 도시의 실체를 부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각된 도시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가 도시의 정서의 한 축인 셈인데, 작가는 이를 위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도구로서 도입한다. 볼록렌즈를 통해 보면 가운데가 커 보이고 가장자리가 조그맣게 보인다. 그리고 오목렌즈는 이와 반대로 보이는데, 어느 경우이건 그로테스크한 도시의 정서를 강조하고 극적 효과를 더해준다는 생각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업에는 입체와 설치를 통해 판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하려는 일부 시도들이 있지만, 작가의 장점이며 매력은 이렇듯 치열하고 정치한 묘사를 통해서 도시의 도시다움을 오롯이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에 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