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행성이 다가오고 있다. 지구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그 행성은 지구에 우울한 바이러스를 퍼트릴 것이다. 그랑 블루는 막막한 대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고 지극한 우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미 낭만주의에서 블루는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알브레히드 뒤러는 오리무중의 생각에 잠긴 예술가를 그려놓고 멜랑콜리아라고 이름을 붙였다. 예술가가 우울한 것은 세계에 대해서,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사색하느라 우울하다. 어쩌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본성이며 속성으로서 일정한 우울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보면 우울은 생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우울은 우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처럼 비생산적인 계기를 어떻게 생산적인 계기로 바꿔놓을 것인가. 우울은 동력이며 능동적인 실천논리가 될 수가 있는가.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며, 삶의 질에 대한 체감온도랄 수 있는 행복지수는 꼴찌에 해당한다. 이 수치가 말해주듯 급조된 근대화가 물질적인 풍요는 가져다주었을지 몰라도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해준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생산성과 효율성은 극대화했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축적된 부의 분배에 관한한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어쨌든 우울한 것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나 예술가들은 의식적인 그리고 때론 무의식적 수준의 그 원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적 감각을 타고 났다. 그렇게 예술가들은 사회의 병리학을 반영하고, 때론 그 병리학을 생산적인 동력이며 실천논리로 바꿔놓는다. 어쩌면 사회 병리며 때론 존재 병리에 반응하고 반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생산적 계기를 생산적 계기로 바꿔놓는 실천논리를 실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우울한 병리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 촉수들이 있고, 이를 통해서 그 실천논리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점들이 예시된다. 

 

김도희, 신치로이드 60. 신치로이드 60은 갑상선 호르몬 분비 이상에 기인한 무기력, 우울, 저체온, 저혈압,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 그리고 언어장애 등등의 증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처방되는 약물이며, 작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 10년 넘게 매일같이 이 약물을 복용해오고 있다. 자신의 증상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작가에게 주어진 소품은 달랑 구겨지고 낡은 장지 한 장이 전부다. 한 달간 약물을 끊고 신체적 고통에 맞서 싸우면서, 이 장지를 깔거나 덮고 생활하며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정작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장지 한 장 일뿐, 정작 장지에 내재된 고통은 보이지도 않거니와, 장지의 흔적을 고통의 흔적으로 읽지도 못한다. 작가의 이 작업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그 무엇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구겨진 종이)에 비해, 볼 수 없는 것(구겨진 종이에 담겨진, 작가의 극심했던 고통의 실체와 흔적)은 다만 시각의 한계에 지나지 않으며, 이로써 작가는 (대개는 이처럼 그 자체 불완전한 시각정보에 의존하기 마련인) 판단의 오류를 자각시키고 있는 것이다’(오상길). 

 

임수진, 자폐인형. 임수진은 심리장애를 자폐인형으로 풀어낸다. 누군가가 툭하고 건드리면 공처럼 안쪽으로 동그랗게 몸을 마는 <소파인간> 혹은 <자폐소파>, 누가 부르면 마치 계란 속 노른자처럼 하얀 이불 속에 폭 파묻혀 숨는 <노른자 인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절주절 곱씹다가 마침내는 그 말들과 생각들에 온통 얽히고설키고 만 <털실인간> 등등.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깔고 앉는다고 생각하고(깔개인간), 자신의 몸 위로 밟고 지나간다고 생각한다(껌 인간 혹은 껌 딱지 인간). 그는 자기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외면하기 위해 머리를 땅 속에 파묻은 채 물구나무를 서고(타조인간), 마침내는 자신이 마치 비누처럼 닳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비누인간). 그리고 그는 몸통으로부터 목을 길게 빼 올린 채 자신에게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 날 수도 있는 이 모든 일들을 골똘히 생각한다(반성하는 인간). 공감이 가면서도 엉뚱하기도 한 이 모든 주체들은 임수진의 자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기반성적인 자의식으로부터 태어난 자화상들이다.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는 이러한 자폐에의 인식을 그러나 작가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낸다. 자신의 심리적 자아를 마치 사물처럼 대상화하는가 하면,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한갓 인형놀이로 전이시킨다. 그리고 그 인형은 자폐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전개되는 양상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되고, 변질되고, 변태된다. 

 

천성명, 달빛 서린 광기 속에서 그림자를 살해하다. 천성명의 조각은 자기가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로에서 작가는 자기가 분열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렇게 분열된 자기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렇게 분열된 자기를 찾아내서 죽인다. 그렇게 살아있는 자기가 죽어있는 자기를 본다. 문턱이고 관문이며 통과의례다. 작가의 작업에는 그 과정이 상징적이면서도 일관되게 그려지고 있다. 이렇듯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 천성명의 조각은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욕망, 결여와 분열 같은 존재론적인 상처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길어 올려 보여준다. 그 상처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상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서사, 자기 자신의 타자(성)에게로 소환되는 서사가 분열된 자기를 극화한 일인극을 보는 것 같고, 존재론적인 상처의식을 극화한 상황극을 보는 것 같고, 침묵을 통해서 말을 하는 무언극을 보는 것 같다. 인생은 한편의 연극(혹은 영화)과 같다고 했다. 그 연극무대 위에 천성명은 자기살해극(그 자체가 정화의식과 통과의례와 관련이 깊은)을 올려놓는다. 아마도 그 연극은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아예 끝이 없을 것이다. 정체성은 자기부정을 요구하고, 자기갱신을 요청하며, 따라서 진정한 자기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투성이의 작가의 조각은 이렇듯 존재에 대한 부정과 갱신, 결여와 결핍의식을 껴안게 만든다. 

  

이재헌, 달 위의 남자. 이재헌은 <달 위의 남자> 시리즈에서 아버지의 개인사를 다룬다. 전두엽 손상으로 기능이 훼손된 아버지는 이따금씩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있는 아버지는 무슨 낯선 사람 같다. 그 낯선 사람은 어쩌면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 자기만의 세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기만의 생각 속에, 자기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아버지를 달을 여행하는 남자 혹은 달 위의 남자로 은유한다. 그리고 그 은유로부터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본성을 캐낸다. 인간은 어쩌면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가 현실원칙에 부닥칠 때 고통으로 폭력적이게 되고, 다만 달을 여행할 때 곧 현실원칙으로부터 일탈할 때 곧 자기만의 생각과 세계 속에 빠져 있을 때만이 평화로울 수가 있다. 작가는 고통을 연구한다. 고통을 직시하고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고통을 지운다. 그러면 고통이 지워진 자리에 고통의 흔적이 형상으로 남는다. 그 형상은 고통을 닮았는가. 그 형상은 고통을 증언해줄 수가 있는가. 그 형상은 고통과 상관이 있는가. 지우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생성되는 형상이란 무슨 의미인가.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이런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들을 파생시킨다. 

 

김수연, 헤테로토피아. 사회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장소로 모여든다. 바로 육체와 영혼이 거래되는 장소다. 도심에 둥지를 튼, 도심 속 변방인 그곳은 버려진 곳, 폐허가 된 곳이며, 도심의 쇠락을 침묵으로써 증언해주고 있는 곳이다. 이를테면 재개발 건축현장의 빈 방이나, 버려진 공장지대, 교각 밑 어스름한 곳과, 수변시설물 같은.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저마다의 발가벗은 몸을 전시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혼과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동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며(자신과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피폐해진 영혼을 냄새 맡는 커밍아웃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현듯 그곳에 들이닥칠 지도 모를 물신을 위해 아직 남아있는 자신의 몸이 갖는 상품적 가치를 확인하고 전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곳은 장소도 의심스럽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의심스럽다. 그곳도, 그 일도 친근하면서 낯선데 알만한 장소 탓에 친근하고, 비정상적인 상황 탓에 낯설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누가 그들을 지목하고, 그들에게 비정상성의 낙인을 찍고, 그들을 타자로써 추방하는가? 작가는 자본주의 물신이 팽배해진 시대에, 천민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이 노골적인 시대에 일어날 법한 사회적 현상들,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소외의 계기들을 추슬러 한편의 드라마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그 드라마의 색조가 암울하고 비극적이고 비장하고 장엄하다. 이로써 마침내 노예는 자기정체성을 쟁취하고,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허위를 넘어설 수가 있을까? 작가의 작업은 이런 암울한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윤현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사람들이 뛰어내린다. 빌딩 위에서 뛰어내리고,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고, 한강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고, 청계천변 위로 뛰어내린다. 학생이 뛰어내리고, 주부가 뛰어내리고, 연예인이 뛰어내리고, 공무원이 뛰어내리고, 사장이 뛰어내리고, 실업자가 뛰어내리고, 신불자가 뛰어내린다. 삶의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잉여인간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멀쩡한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아주 이따금씩은 삶이 공허한 사람들이 뛰어내린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자살하는 사람들이다. 윤현선의 사진은 이처럼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세기말적인 풍경이고, 묵시록적인 풍경이고, 자본주의가 그려낸 풍경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런데, 그 날개가 꺾였을 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이카루스에게 남겨진 것은 추락이었고 죽음이었다. 작가는 묻는다. 누가 이카루스들의 날개를 꺾었느냐고.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이 삶을 살게 한다. 그 소박한 이상이 좌절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지금 여기는 혹 자살을 권하는 사회는 아닌지, 작가는 반문한다. 

 

고영미, 훨훨 날려 보내다. 너를 떠나보낸다. 그런데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훨훨 떠나보낸다. 세속에도 이별은 있다. 그러나 보통 그냥 떠나보낸다고만 하지 훨훨 떠나보낸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훨훨 떠나보낸다는 것은 세속에서의 이별은 아니다.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떠나보낼 때 훨훨 떠나보낸다고 한다. 훨훨은 하늘로 떠나보내는 모양새를 닮았다. 새의 날갯짓을 닮았다. 저승에 가면 부디 매인 데 없이 가고 싶은 데 마음껏 날아다니라는 염원을 닮았다. 그렇게 작가는 주검들을 하늘로 훨훨 떠나보낸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산 사람들을 떠나보낸다. 다만 천형을 온몸으로 증명해보일 뿐인 문화생산자들을 떠나보내고, 경제주의의 변방으로 내몰린 잉여인간들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작가는 그 주검들을 위해 운다. 그 주검들을 위해 만장을 들고 애도의 행렬을 뒤따른다. 만장에는 주검들을 애도하는 산 사람들의 기원과 주술이 글귀로 적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글귀가 조금 이상하다. 글귀이되 읽을 수가 없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이 하고 싶은 말들, 했어야 했던 말들, 하지 못한 말들, 그래서 미처 실체를 얻지 못한 말들을 상징한다. 산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진, 실체를 얻지 못한 그 헛말들이 안쓰럽고 눈물겹다. 

 

한기창, 아모레파티. 한기창의 작업은 트라우마가 작업으로 승화된 사례를 보여준다. 생사를 넘나드는 교통사고와 이에 따른 치명적인 외상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연스런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했고, 작업 역시 그 연장선에서 풀어내게 했다. 자신의 외상과 직면함으로써 외상을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과 작업이 서로 별 개의 영역과 범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체성과 현실성과 설득력을 얻는 존재론적 작업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자신의 외상을 반성하고 반추하는 과정에서 유래한 작업이 뢴트겐 정원이며 스테이플 산수화다. 대개는 흑백 모노톤의 엑스레이 필름을 이용해 꽃밭이며 정원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며, 캔버스 천 대신 압박붕대 표면에 스테이플로 고정시켜 산수화로 재구성해낸 작업이다. 의학과 죽음과 치유의 기호를 삶의 기호로 탈바꿈시킨 역설적인 작업의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근작에선 그 주제의식을 아모레파티 곧 운명애로까지 확장 심화시킨다. 니체에게서 차용해온 이 말은 운명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를 예시해준다. 흔히 운명은 수동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니체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자기를 갱신하는 구실이며 계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능동태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점에서 차별된다. 그리고 주문을 걸어온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자기를 궁지로 내 몰아라, 그러면 내면이 열릴 것이다, 라고. 

 

이보람, 희생양. 유토피아는 없다. 모든 건전한 제도는 희생양 위에 축성된 것이다. 사람들은 폭력을 폭발하고 싶고 폭력을 보고 싶어 한다. 그 폭력 욕망에 내어줄 희생양을 적시적소에 제공하지 못하면 제도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 그렇게 제도는 희생양을 내어주고 폭력욕망을 잠재울 수가 있게 된다. 누군가가 희생양으로 지목되어야 하지만, 적어도 나만은 피해가기를 바랄 뿐이다. 인터넷에는 이런 희생양 이미지로 넘쳐난다.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죽어 마땅한지 그 이유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나에게 일어난 일도 아니고, 대개는 나와 무관한 익명적인 이미지들이 아닌가. 이보람은 인터넷으로부터 이런 희생양 이미지들을 취해와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 그 과정에서 희생양 이미지 본래의 적나라한 폭력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진다. 깨끗하게 표백되고 소독된 이미지가 혹 동참을 요구해오거나 연대책임을 물어올지도 모를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현실을 한갓 이미지로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실재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 이미지를 통해 한 차례 걸러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무감하고 무책임하게 만든다. 일종의 면죄부를 발부해준다고나 할까. 작가는 이처럼 현실을 한갓 이미지로서 소비하는 현대인의 속 편한 현실인식을 건드린다. 혹 그 속 편한 현실인식이 때론 이기주의일지도 모르고, 그 자체가 또 다른 희생양을 생산하는 암묵적이고 잠재적이고 실질적인 계기며 구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완, 자본주의의 레퀴엠. 그저 흔한 축구공이며 야구공인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양이 사체를 갈아 만든 축구공이며 생닭을 갈아 만든 야구공이라고 한다. 죽음(혹은 주검)이 매개가 돼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공들은 푼돈을 받고 하루 종일 가죽 공을 꿰매는 일에 동원된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풍경의 설원 또한 케이크로 만들어진 것이며, 풍경이 케이크와 함께 썩어가고 있다. 썩음과 부패가 불러일으키는 죽음에의 환기가 낭만적인 풍경과 충돌하면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낭만적인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썩음과 부패를 내장하고 있고, 죽음과 파멸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아름다움을 결합시킨 것은 낭만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다.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선미합일사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죽음의 순간이 아름답다. 숭고의 미학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이 감정은 극적이고 장엄하다. 그런데, 여기에 자본주의의 욕망이 덧붙여진다면?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각종 명품 브랜드가 디스플레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부패한 죽은 참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명품은 죽음마저도 넘어선다는 뜻일까. 불현듯, 감미로운 선율이 자본주의의 욕망에 바쳐진 죽음의 서곡이며 레퀴엠처럼 들린다. 

 

윤동천, 정치에 바치는 오마주. 윤동천은 정치적 현실을 똥물이고 똥판으로 진단한다. 정치가들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공약),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해대고(자라는 코), 그러다가 궁지에 몰리면 오리발을 내민다(내밀다). 철새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당적을 옮겨 다니고(특질), 겉과 속이 다르고(속), 정작 들어야할 소리에는 귀를 틀어막고 있다(경청). 작가는 이런 정치가들에게 몽둥이와 밥주걱, 쥐덫, 파리채와 끈끈이, 살충제와 세척제, 총명탕, 그리고 똥바가지를 바친다. 오마주치고는 좀 그런 오마주다. 이렇게 뒤틀린 오마주는 김수영과 신채호를 끌어들이면서 바로잡힌다.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김수영의 시를 끌어들여 정치적 현실에 침을 뱉고, 신채호를 끌어들여 천고 곧 하늘의 북소리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보통사람들의 각박한 살림살이를 대비시킨다. 신채호는 민중을 하늘로 봤고, 따라서 하늘의 북소리란 민중의 소리를 의미한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언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언어가 사용되는 용법을 통해 그 사회를 들여다볼 수가 있다. 언어는 부지불식간에 사회의 속내를 드러내는 무의식과도 같다.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속내를 반영하고 드러내는 널리 회자되는 말 중에 멘붕이라는 말이 있다. 멘탈 붕괴의 줄임말이며 조어다. 그 모어에 해당하는 말이 아노미다. 

 

멘탈 붕괴 즉 정신적인 공황상태 내지 패닉상태를 의미하는 아노미는 <자살론>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에게서 유래한 말이다. 뒤르켐은 일종의 자살의 유형학을 시도하면서 아노미형 자살이라는 새로운 자살 유형을 제안한다. 외관상 현대인의 삶의 질이 풍요로워지면서 그 관성의 초점이 물질문명에 맞춰지게 되고 따라서 정신문명과의 거리가 생기고 갭이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진 거리며 갭 사이로 공허가 파고든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현실과 이상간의 균형이 깨지면서 어떤 사람(예컨대 생산의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에게는 공허를 불러오고 정신적인 공황을 불러오고 종래에는 자살을 불러들이는 것. 이렇듯 자살마저 초래한 것을 보면 물질적인 풍요가 반드시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뒤르켐 역시 그 불일치에 주목했을 것이다. 

 

조르주 바타이유 역시 자본주의가 생산성 제일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에 그 초점을 맞추면서 필연적으로 잉여를 생산한다고 본다. 뒤르켐의 공허에 해당하는 잉여는 그러나 바타이유에게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잉여가 생산성과 효율성에 복무되지 않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론 생산성과 효율성에 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오히려 자본주의의 관성을 타파하고 고쳐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 가운데 핵심적인 것이 예술이다. 마치 질 들뢰즈가 자본주의 기획을 수정하기 위해 욕망을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듯, 바타이유 역시 잉여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며, 그 양쪽 경우에 똑같이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의 실천논리다. 그리고 그 실천논리의 계기며 항목에 욕망과 잉여와 더불어 우울을 추가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우울한 기질을 전복적인 실천논리로 바꿔놓느냐는 것이 될 터이다. 다시,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아라. 그러면 내면이 열릴 것이고,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니체의 주문을 되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