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정직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의 형식적인 특징이나 인간의 관능성 그리고 감상성을 배제한 채 선택된 회화적 요소로, 정해진 규칙대로, 객관성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명확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추숙화는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이 작가노트를 길잡이 삼아 실제 작업과 견주어 보면서 작가의 작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가의 작업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작가의 작업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작업에 반영된 작가의 아이덴티티와 대면하는 일이다. 적어도 동일성의 논리에서 볼 때 그렇다. 이를테면 작업을 작가의 분신으로 보는 논리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 속엔 작가가 들어 있는가. 실제로 작가의 작업을 보면 이런 상식이며 통념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심지어 작가의 그림은 의도적으로 자기를 배제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연성과 관능성과 감상성처럼 순간순간 변하는 것들과 그렇게 변하는 것들에 반응하는 자기를 배제하는 것.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자기를 그린 것이 아닌가. 아이덴티티의 표상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배제하면서까지 성취하고 싶은 지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작가의 작업을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을 밝히는 일이 될 터이다.
그림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을 연상시킨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며, 표면은 표면일 뿐이다. 그림은 결코 비가시적인 것의 메타포가 아니며, 그림에 재현된 깊이는 다만 환영이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임수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그렇다면 흔히 그렇듯 환영적인 깊이나 세계를 보는 창과 같은 눈속임이 아니라면 그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평면이고 표면이다. 회화가 가능해지는 최소한의 조건에 충실하고 정직할 일이다. 정직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정직한 그림은 무슨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혹 금욕은 모르겠다. 재현과 서사와 메타포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자기반영성의 전제로부터 자기를 억제하는 것이며 자기를 돌려세우는 일이다. 나를 억제하면서 그림에 충실한 그림이며, 나를 배제하면서 그림을 오롯이 드러내 보이는 그림이다. 그림 자체, 회화 자체의 본성이며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그림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선택된 회화적 요소로, 정해진 규칙대로, 객관성을 가지고 그려진 절대적으로 명확한 그림이기도 하다. 작가는 평면과 표면, 반복되는 격자로 나타난 기하학적 패턴과 흑색의 단색조 화면을 회화의 요소로서 선택한다. 그 선택은 회화의 본질을 의미내용이 아닌 형식요소에서 찾은 모더니즘 패러다임과 통한다. 회화가 가능해지는 최소한의 조건을 회화 자체의 본성에 소급시키고 한정한 환원주의와 통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흔히 그렇듯 감각적 현실의 재현이거나 상징이기보다는 회화 자체의 본질이며 본성을 묻는 개념주의 미술에 방점이 찍힌다. 그리고 정해진 규칙에 대해선 그림을 그리는 계획과 순서와 방법이 될 것인데, 이에 대한 작가의 설명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프로세스가 이해될 뿐 정확한 실체가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아마도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혹은 어떤 내적 필연성(이를테면 예술의 자율성)에 의해 규칙이 정해졌을 것이고, 그 규칙이 작가(이를테면 작가의 아이덴티티)보다는 회화의 본성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일에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명확한 그림은 바로 이 규칙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질 수가 있다. 정해진 규칙에 따른 그림은 마치 기계적인 그림으로서, 작가를 능동적인 상태로부터 수동적인 위치로 자리 매김한다. 회화가 밀어올린 내적 필연성을 수행하고 조력하는 일이며, 흡사 회화_기계가 잘 작동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런 기계적인 프로세스나 작가의 수동적인 지위에 의해 작가의 아이덴티티보다는 회화 자체의 본성이 실천되고 실현되는 것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이다. 객관적인 그림은 이처럼 회화의 장으로부터 작가의 주관적인 개입과 해석이 배제된 그림을, 그럼으로써 회화의 본성이 오롯해지는 그림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명확한 그림은 말레비치의 절대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실천논리로부터 유래한 절대회화의 강령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작가 자신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인정하고 있는 반 되스부르크의 구체미술이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미술의 준칙과도 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업이며 과제(회화의 본성을 오롯이 드러내려는 기획에 맞춰진)의 밑바닥에는 추상미술을 창안한 칸딘스키도 한때 심취한 적이 있는 신지학에 대한 영향이며 공감이 깔려 있다. 거칠게는 개인이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 신을 대면할 수가 있다는 일종의 신비주의 사상으로서, 특히 순수한 색채가 신의 현현을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회화의 장으로부터 재현과 서사와 상징을 배제했던 추상미술 이후에 다시금 상징을 불러들이는 일종의 수정주의적 태도를 엿볼 수가 있겠다.
결국 모든 것은 상징이다. 양이 음을 드러내듯이 모든 존재는 상징을 매개로해서만 비로소 감각적 현실 속으로 들어와진다. 이렇게 절대도 상징이고 구체도 상징이고 신(회화 신?)도 상징이다. 이를테면 회화의 본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오롯해지는가. 그래서 어떻게 회화가 절대적인 경계며 구체적인 지경 그리고 신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는가. 결국 점이며 선이며 색채와 같은 형식요소를 통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동원된 형식요소는 모두 상징주의(재현적인 상징주의와 비교되는 회화적인 상징주의)의 한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추숙화는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회화의 본성이며 본질을 오롯이 드러내면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이고 구체적인 경지 위로 회화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만 회화일 뿐인가. 상징주의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는가. 아마도 스스로 정한 규칙에서, 자기를 억제하고 자기를 기계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애써 자기를 지우는 금욕적인 태도에서 그 여지는 찾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왜 스스로에게 규칙을 강제하는가. 그렇게 규칙을 강제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무엇을 어떻게 의미지우고 싶은 것인가(여기서 무의미마저도 의미 내지는 의미화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굳이 이야기해야 할까). 특히 흑색 화면은 금욕적인 태도에 걸 맞는 것이면서, 동시에 일말의 감각적인 깊이마저 내장하고 있다. 감각적인 표면을 넘어서 그 깊이를 헤아려보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인데, 이때의 깊이는 회화의 깊이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깊이이기도 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깊이의 성분은 환영적인 깊이가 아닌 표면적인 깊이라고 하는 아이러니와 모순율의 결과이며 소산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본 작가의 그림은 예전에 알고 있던 그림이 아니었다. 판이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 그림이 변하고 판이해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대략 뜨거운 추상에서 차가운 추상으로, 서정추상에서 기하추상으로, 즉흥성에서 계획성으로, 우연성에서 필연성으로, 감각에서 기계로, 확산으로부터 환원으로, 과잉과 방임과 분출로부터 금욕과 억압과 절제로의 변화가 감지된다. 이런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니체는 예술가 속에 판이한 두 인격체가 살고 있다고 했다. 바로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디오니소스도 작가의 인격이고 아폴로도 작가의 인격이다. 이를 작가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얼추 디오니소스로부터 아폴로 쪽으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작가는 비우고 단순화시키고 놔버리고 싶다고 했다. 무엇을 비우고 단순화하고 놓는단 말인가. 자기를 재현하고 감각적 현실의 표상을 그리는 일을 비우고 단순화하고 놓는다. 자기가 아니고 감각적 현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바로 회화 자체를 묻는 일이며, 회화 자체가 가능해지는 시점으로 자기를 되돌려 놓는 일이다. 현상학을 빌려 말하자면 의식의 영도지점에 해당하는 회화의 제로지점에 자기를 재설정하는 일이다. 그 제로지점에서 작가는 회화는 회화일 뿐이고 그림은 그림일 뿐이고 표면은 표면일 뿐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구체회화)에 직면하고 절대적인 사실(진리까지는 아니더라도)에 이른다.
그 현실이며 사실에서 찾아낸 작가의 그림은 무슨 청사진 같고 설계도 같고 건축 평면도 같다. 그리고 이런 인상은 회화보다는 일련의 드로잉에서 더 잘 감지된다. 청사진이나 설계도면 그리고 건축 평면도는 다 무엇인가. 바로 집이다. 작가는 바로 자기 내면에 일종의 인위적으로 축조된(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강제한 규칙으로 설정된) 질서의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아폴론적 충동은 질서를 지향한다. 이를테면 자연성과 관능성과 감상성처럼 순간순간 변하는 것들과 비교되는 항상적인 규율이며 준칙을 자재 삼아 내면의 성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 성소를 다시금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불러오기 위한 구실로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회화가 시작되는 제로지점에서 자기와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드로잉 위에 덮이는 흑색의 변주가 어쩔 수 없이 불러일으키는 깊이가 회화의 깊이이면서 표면의 깊이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의 깊이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깊은 흑색에서 깊은 어둠이 보이는가. 작가가 도달한 흑색은 비록 회화의 논리에서 찾아낸 것이지만, 그 흑색은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서정적이다. 논리와 서정을 하나로 거머쥐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 흑색은 신지학에서 일컫는 순수한 색채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