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 전 (10.11 - 11.23, 갤러리 스케이프)
이형구의 전시에는 과학 실험실의 분위기가 있다. 어떤 애매함과 모호함도 서식할 구석이 남아있지 않는 이 전시장은 대상을 낱낱이 주시하게 하는 분석적이고도 투명한 공간이다. 그것은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어두침침하고 눅눅하고 무질서한 상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해야 할 것만 같은 예술에 대한 통상적 기대치를 거부한다. 개념미술의 여파로 썰렁한 스타일이 한 차례 유행하긴 했어도, 그의 전시실 체감 온도는 그보다도 훨씬 낮다. 위로부터 냉랭한 조명을 받고 있는 두상들은 즉물주의적 시선 앞에 놓인 피사체로, 피부 아래의 진실까지 가차 없이 노출된다.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된 얼굴은 이전 시대에는 신적인 아우라 까지 품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조각난 형태들의 이음매를 그대로 노출하면서 보철의 도움을 받아 두개골에 살짝 얹혀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만들어낸 대상들이 사실, 즉 과학의 대상이라 할 수는 없다. 사실처럼 보이게 한 기술적 완성도에 대한 집요함에 의해, 즉물성은 곧장 수수께끼로 도약한다. 이형구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정서는 어스름함 속의 신비함이 아니라, 명료함 속의 신기함이다. 띄엄띄엄 놓여 진 두상들은 각기 구별될 수 있는 어떤 타입들로, 얍삽함부터 무지막지함에 이르는 다양한 부류의 인상이 수집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그는 이 전시에서 다양한 관상들을 분석적으로 종합했다. 여러 종류(성, 인종, 나이)의 두개골과 작가의 다양한 얼굴 표정 일부가 접 붙어 있는 두상들은 낯설고 이물감이 있다. 작가 스스로가 천 조각처럼 분리되어 기관 없는 몸체들에 들러붙는다. 그러나 이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들은 생각 외로 우리 주변에 편재한다. 우리사회는 피부나 표정 관리를 넘어서, 뼈를 깍아 내는 아픔도 마다않는 외모 지상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호학적 장의 실체를 구성하는 얼굴은 욕망의 예속화를 위한 계산과 체계적 구획의 대상’(펠릭스 가타리)이 되곤 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좋은 인상에 대한 욕망을 가지며, 거기에는 어떤 원형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원형은 서양 인형 같은 얼굴이 대세이긴 하지만, 성형 술과는 또 다른 의미의 기호학적 체계를 가지는 관상학도 포함될 수 있다. 이형구는 예전부터 관상학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이번 ‘face trace’전에서 관상이 형성되는 해부학적 깊이까지 탐구했다. 인상은 표면을 통해 파악되는 것을 넘어서, 해부학적 기저 면과 근골격계의 기제를 아우르는 기계 장치로 재탄생한 것이다. 인공 치아와 금속 보형물은 물론, 피부의 결이 살아있는 복합체는 서로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는 접속의 산물일 뿐, 조화로운 유기체라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얼굴은 다양한 조직체로, 기원적 모델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 얼굴에서도 여럿 발견되는 절단면들은 각기 다른 좌표계들을 가지는 이접의 산물임을 알려준다. 펠릭스 가타리가 [기계적 무의식]에서 말하듯이, 주체는 어떤 이질적 구성요소의 집합으로, 전체화할 수 없는 강렬한 다양성으로 간주된다. 이형구가 만든 얼굴 역시, 기호적 구성요소들의 상이한 배치의 산물이다. 여러 층위와 성질로 구별되면서도 연결된 얼굴은 동일자와 타자의 조합이다. 그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나 자신을 이루는 것은 그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에서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 인간화, 또는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다. 여기에서의 인간은 기호들로 된 망의 재배치 된 산물이지, 현실의 복사 또는 환상의 연출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생산이며, 이 형태들은 현실과 유사한 관계를 가지면서 현실과 평행하게 존재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2012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