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모노톤과 파스텔 톤을 바탕으로 하여 구름, 나무, 고래 같은 도상이 등장하는 황성규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부분만 있는 응축된 형상으로 복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객에게 말을 걸기 위해 화면 한 가운데에 자리한 형상들은 그 존재감에 비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치 않다. 팽팽 돌아가는 스펙터클 사회에서 눈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어보기를 권유하는 그의 그림은 동화적이지만, 어떤 명확한 교훈은 물론 서사도 불확실하다. 바탕과 분명히 분리되며, 시리즈 형식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소재들은 상호적으로 엮이면서 이야기를 시도한다. 황성규에게도 미술은 소통이라는 화두를 가지지만, 4살 때 한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전전한 그에게 소통이란 미술에 자명하게 깔려있는 전제라기보다는 애써 획득해야만 하는 과제가 되었다. 오히려 그의 작품 한가운데에는 소통의 애매함이 있다. 그의 말대로 ‘단순히 슬프다가 아닌, 슬픈데 웃기고, 무거운데 가볍고, 진지한데 장난스러운’ 여러 의미가 중첩된 그림들이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감정이나 경험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감정이나 경험은 아니다. 그의 메시지는 전달되기 보다는 은은한 색감의 공기층을 통해 서서히 공감된다. 도상들 역시 여러 이미지가 복합되어 있다. 굳이 하나의 중심이 발견 된다면, 다양한 도상들이 일종의 자화상이라는 점이다. 검은 바둑돌 같은 형태의 먹구름이 화면 상단에 가득하고 거기에서 사람 다리가 나오는 작품 <go away>는 어떤 깊은 감정의 상태에 잠겨있는, 또는 갇혀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응축된 감정은 구름에서 비가 내리듯이 바깥으로 유출된다. <무제>라는 제목의 구름 시리즈는 먹구름 덩어리에서 검은 액체 방울이 떨어진다. 먹구름은 한 덩어리, 또는 여러 덩어리이며, 액체 방울 뿐 아니라 눈처럼 결정체로 떨어지기도 하고, 먹구름과 다른 색(파랑, 분홍 등)이 떨어지기도 한다. 모체로 보이는 먹구름으로부터 유출된 이질적인 것들은 예술이란 것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만은 아닌, 창발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검은 구름에서 떨어지는 원색의 방울들을 그린 <무제>는 시리즈 형식을 통해 정지된 형상에 운동감을 부여한다. 모든 색의 합체인 검은색은 다시금 각각의 색으로 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배경이 없어 여백으로 보이는 바탕 면과 함께 그의 블랙은 동양화의 먹 같은 느낌도 준다. 황성규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구름 이미지가 흰 구름이 아닌 먹구름이라는 것은 작품의 분위기를 고뇌나 슬픔 쪽으로 기울게 한다. 먹구름에서 무지개 빛 생기발랄한 유출물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표현이란 그 자체가 산고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 어두운 멜랑콜리가 깔려있다. 검은 물이 나오든 원색의 물이 나오든, 모체는 어떤 임계점이 지나야 산물을 내놓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임계점이 지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출 된다. 그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구름은 풍경이 아니라 자화상이지만, 그 자화상은 가면을 쓰고 있다. 작가는 먹구름 도상에 대해 마스크를 그리다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서 구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둡고 묵직한 것이 가리고 있는 형태이다. 

가면은 가리면서도 보여주는 것이 라는 점에서, 정체성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가면은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게 존재를 변모시킨다. 가면은 본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 내부의 타자를 활성화시킨다. 가면을 쓰면 가면에 상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 가면은 깊숙이에 있을지 모르는 본질을 위장하는 표면이라기보다는, 가면이 지시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태로 되기이다. 나무 역시 구름 못지않은 변화무쌍한 존재태를 가지는 자화상이다. 구름과 달리, 지상에 뿌리박은 그것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인간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 인류학적 상상계는, 땅에 발 딛고 서서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인간이 나무와 자신을 비교하기를 멈춘 적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그의 나무는 눈이 여럿이며 보는 방향이 다르다. 작가는 여러 위치와 방향을 가지는 나무의 눈에 대해, 성장하면서 시각과 관점이 달라지는 모습을 그렸다고 말한다. 나무는 땅에 붙박힌 존재이지만 성장에 따른 눈의 위치변화는 시야를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 나무 들은 거의 나목이다. 

고난의 계절을 대비하는 나무처럼 잎 새를 다 떨어뜨리고 둥치와 가지만 있으며, 몸체에는 거친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핑크 빛 나무를 그린 작품 <pink birch>는 눈들 사이로 살을 베어낸 듯한 상처가 보인다. 작품 <tree stumps>은 아랫 둥지가 잘려버린 그루터기들이 패턴처럼 배열되어 있는데, 단면이 여러 색깔을 가진다. 먹구름에서 컬러 눈물이 떨어지는 그림과 비슷한 경우이다. 뭔가 잘려졌거나 떨어지는 것에는 깊은 상실감을 주지만, 그러한 사건들 역시 세계의 다양한 단면을 드러낸다. 아름다움에는 잔인한 진실이 곧잘 포함되곤 한다. 도상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서사는 앞과 뒤가 생략되어 있고, 중간 도막을 보여주면서 관객의 상상을 이끈다. 황성규의 작품에서 하늘 색 바탕에 떠 있곤 하는 고래는 마치 구름과 같다. 그런데 고래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안에서 뭔가 발생하는 이미지인데, 같은 유기체이지만, 몸에서 나무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작가에게 유출, 즉 표현이란 과정의 어려움을 암시한다. 

고래와 나무의 이미지가 결합된 작품 <tree whale>에는 신음소리를 내는 듯한 고래의 입과 눈의 표정이 읽혀진다.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비나 눈물 이미지보다 더 강한 산고의 아픔이 예시된다. 그러나 고래가 힘차게 유영하는 작품 <whale with four eyes>에서는 무지갯빛 분출물이 뿜어져 나온다. 눈 네 개나 붙은 그것은 예지가 번뜩인다. 검은 뿔테 안경으로 무지개 광선이 발사되는 드로잉 작품 <자화상>을 염두에 둘 때, <whale with four eyes>의 고래는 <tree whale>의 고래보다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상승 국면에 있다. 그의 작품은 이처럼 서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상호텍스트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단번에 어떤 의미가 파악되는 투명성이 아니라, 거듭해서 읽어야 하는 불투명성이 특징적이고, 여기에서 소통이란 이러한 기호의 반복된 해석행위와 관련된다. 작품 속 가면 또한 표층과 심층, 아니 가면 그 자체와 같이 표층들 사이에서 떠도는 의미의 해석을 요구한다. 

구름이나 나무가 간접적인 가면인데 반해, 박스 형태로 나타나는 가면은 어릴 적 놀이의 경험을 직접 반영하는 ‘진짜’ 가면이다. 박스로 만든 가면은 쇼핑백을 둘러쓰는 것을 포함하여, 어린이들이 가장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가면이다. 가면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하는 말들과 들리는 말들의 애매한 미스매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먹구름 아래에 두 개의 박스 가면이 있는 작품 <무제>는 구름과 가면이 가지는 변화무쌍한 존재태의 비슷함을 알린다. 박스 위로 검은 연기(또는 구름)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가면을 감싸고 있는 사람은 머리꼭지서부터 전존재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가면 및 가면과 유사한 계열에 있는 황성규의 도상들은 감추면서 보여주는 소통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바벨탑의 신화이래, 인간 간의 투명한 소통이란 영원한 꿈이 아닐까. 예술이란 인간의 여러 소통 방식 중에서도 가장 불투명하다. 그러나 불투명함은 인간의 존재 조건 그자체이기에 예술은 더 쉽게 이해, 또는 공감될 수 있다는 역설이 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