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현의 그림은 꽃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꽃은 아마도 단일 항목으로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그림의 소재일 것이다. 내가 여태껏 봤던 그림들은 종류별로 분류해 본적은 없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그렇다. 꽃그림은 그만큼 흔하고 상투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보편적일 수 있다. 꽃은 그자체가 아름답기에, 오히려 그림의 소재로 적합하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림이 아름다움을 목적 - 진(眞)이나 선(善)이 각기 학문이나 윤리를 전제로 하듯이 - 으로 한다면, 단지 소재가 아름답기에 그림도 아름답다고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현대미술은 비(非)미적인 소재에 탐닉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기만술이기 보다는, 보고 싶지 않은 최악의 소재라 할지라도 관객의 관심을 끌만한 형식적 장치를 구사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소재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꽃은 ‘아름다움’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력한 소재일 것이다. 

꽃은 그 자연적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간주된다. 꽃 앞에서 미소 짓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꽃 앞에서 미소 짓는 사람이 모두 꽃그림에 대한 취향을 가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꽃에 대한 거의 생물학적이다 싶은 원천적 매혹은 그것이 열매의 전조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굴에서 나와 숲에서 헤매던 인류에게 최초의 식량을 제공해 준 것은 식물의 열매였다. 또한 화무십일홍이란 말도 있듯이, 꽃은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오래 보존하지 못한다. 그것은 젊음처럼 짧기 때문에 아름답다. 보다 긴 시간의 주기를 생각해볼 때, 찰나의 삶을 사는 유한한 인간 또한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순간적 아름다움의 고정과 고정을 통한 소유, 여기에 꽃을 즐기거나 그리는 집요한 욕망이 숨어있다. 꽃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상징하는 원형으로, 동서고금을 통해 수도 없이 재현되어 왔다. 지상에는 지금도 수많은 꽃이 피고지지만, 이 현상적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순수 추상의 세계에 보전되어 있다. 

재현한다함은 바로 이 원형의 재현을 말한다. 그것은 한갓된 가상이 아닌, 본질을 반영하는 아름다움의 추구이며, 여기에서의 본질이란 어떤 대상을 바로 그것이라고 규정지을 수 성질, 요컨대 ‘A는 A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일성이다. 이러한 동어반복이 세계 질서의 토대가 되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작가 역시 그를 정의하는 일상의 잡다한 정체성을 벗어나 ‘나는 나다’는 지고의 정의를 구현하고 싶어 한다. 방우현의 작품에서 정방형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꽃들은 아름다움의 본질과 원형을, 마찬가지의 완벽한 기하학적 형식 안에 안치한다. 지상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고정된 식물의 속성상, 그림에 첨가된 나비들은 꽃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 화룡점정처럼 추가된 나비들은 정중동의 미학을 구현한다. 여러 종류와 자세로 구현된 나비는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화면에 움직임의 환영을 부여하며, 꽃의 향기를 눈으로 보게끔 하는 공(共)감각적 역할을 한다. 나비는 꽃향기의 증거이자, 그 펄럭거리는 날갯짓을 통해, 꽃가루를 퍼트리듯이 향을 퍼트린다. 

가로가 길쭉한 대형 화면에서 꽃은 화면 가득히 잡혀 있기도 하다. 배경이 안 보이는 꽃의 무리는 평면성을 강조하여 꽃밭이자 꽃무늬 같은 효과가 있다. 3차원적 대상과 2차원적 그림이 충돌하지 않고 화해하는 예는 모네가 수련을 그린 그림 이래, 근대미술의 특징이었고, 그 이후 대상과 그림은 더욱 자율화되어 각자의 길을 가다가, 다시금 언어나 코드에 의해 수렴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거의 줄기와 잎도 안보일 만큼 빽빽한 방우현의 작품 속 꽃들은 씨앗 속에 접혀있는 유전자가 펼쳐져 복제되듯이,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원형에서 무수히 복제된 미의 결집체이다. 장관을 이룬 꽃의 무리는 그만큼의 더 많은 아름다움을 가정한다. 여러 종류의 꽃을 줄지어 배열한 것도 있고, 여러 색으로 이루어진 같은 종의 꽃을 다발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본질에서 나온 다양함을 말한다. 방우현의 꽃그림은 연꽃, 목련, 무궁화, 양귀비 같이 대략 그 종을 파악할 수 있는 재현성이 특징적이며, 구성의 방식에 따라 재현이자 장식적 패턴처럼 보인다. 

방우현은 꽃이라는 실재를 모방하지만, 모방된 실재는 현실이라기보다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미의 원형이기에, 아름다움의 절정에 놓인 꽃들은 꽃 그 자체라기보다 꽃다움이 지배적이다. 더불어 있는 나비는 꽃다움에 가장 어울리는 세트이다. 재현의 대상은 1차적으로 자연이지만, 신화, 종교, 개념, 이데올로기 등의 재현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재현은 추상과 반대가 아니라, 비슷한 계열에 속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이라는 말에서 접두사 재(再,re-)는 차이들을 잡아먹은 동일자의 개념적 형식을 뜻한다고 말한다. 재인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에 해당하는 어떤 공통 감을 요구한다. 재인식의 형식은 일치나 합치들을 고취한다. 가령 지칭은 재인식의 논리적 형식이다. 언어기호와 시각적 재현은 위계화 된 질서를 가진다. 재현은 무엇인가를 어떤 기준(원형)에 의해 알아보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현되지 않는 어떤 독특성이나 차이는 남아있기 마련이다. 현대미술은 동일성과 재현이라는 짝보다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짝에 기운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을 다시 표상하는 과정은 신화의 시대 이래 지속되었으며, 고전주의 시대에 정점을 찍은 후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근대의 사실주의에서도 여전한 힘을 발휘하였다. 전자매체 언어가 지배하는 시뮬레이션의 시대 실재에 대한 믿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세계의 합리성과 묘사 가능성을 가정하는 리얼리즘은 과학처럼 새로움과 입증 가능한 진리에 의존하기에, 기술과학이 물신화된 현시대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동일성의 논리에 충실한 재현의 과정은 상식적인 질서감각을 연출하고 현실원리를 구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안정감은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세계가 더 요동치고 불안정하고 위험해질수록 실재에 기반 한 질서의식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를 안심시키고, 더 나아가 위로한다. 그러나 꽃이 상징하는 아름다움의 원형이 단지 형이상학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원형으로의 복귀는 근본적 치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활짝 핀 꽃은 상처받기 쉬운 시대, 강력한 키워드로 떠오른 ‘힐링’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일 것이다. 작업하는 삶 또한 그자체가 상처의 연속이다. 작가 또한 스스로 위안 받고자 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