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수 전(10.20 - 11.15, 갤러리 압생트)
최종운 전(11.8 - 11.28, TV12 갤러리)
최우람 전(11.1 - 11.30, 갤러리 현대)


손에서 단말기를 한시도 놓지 못하는 소통 인플레 시대는 단절감의 징후이며, 이러한 소통에의 강박 관념은 보다 넓게는 사회적 유통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생존 본능의 일부이다. 현대인들은 네트워크로부터의 탈락에 대한 불안을 넘어서, 보다 유력한 지점을 차지하려 노력한다. 인간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단말기는 ‘우리는 유전자들의 생존기계’(리차드 도킨스)라는 생물학자의 말까지 갈 것 없이, 이미 우리가 유기체와 기계와 복합된 존재임을 알려준다. 연결을 위한 단면들로 이루어진 기계는 유기체를 넘어서 인간과 사회, 생명과 역사에 대한 핵심적 비유가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은 인공물인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이 아무리 자연이고 싶어 해도, 예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이다. 조잡한 인공물을 넘어서 처음부터 완벽하게 태어난 자연에 근접하려는 오랜 예술적 이상을 관념론적 비약이 아닌, 동시대 기술 언어의 매개를 거쳐 이룩하려는 이들이 있다. 최우람, 한진수, 최종운, 이 세 젊은 조각가의 전시에는 자르고 연결 짓기를 자연/예술/기계의 공통어법으로서 다양하게 활용한다. 

이들에게 기계는 작품의 핵심적인 형태와 움직임을 만들며, 그렇게 펼쳐진 시간성은 개인화된 신화부터 신랄한 풍자, 그리고 대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서사를 들려준다. 미술가라기보다는 꿈꾸는 과학기술자에 가까운 최우람의 전시에는 어떤 분야의 관객들이 와도 입이 떡 벌어질 진보된 기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스펙터클이 특징적이며, 장대한 시공간적 스케일을 가지는 신화가 덧붙여진다. 녹색 거품 형상의 괴물이 반복 동작 중인 한진수의 전시는 종잇장 같은 표피 아래의 묵직한 기계장치라는 조합이 풍자적이다. 최종운의 전시는 자연과 종의 번성을 이어가는 힘을 분절된 단위의 조합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시에 해외 유명 미술가의 작품에 대한 패러디라는 점에서 자연-인간-예술 간의 의사소통체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기계를 특징짓는 분절화는 만물의 체계화의 전제 조건이기에, 기술언어를 내면화한 작품들에서 현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은 그 낯선 외관에도 불구하고 이미 반쯤은 기계가 되어버린 현대인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전시장 한켠에 걸린, 1977년 제작된 로봇 그림은 1970년생인 최우람의 이 전시가 어릴 때부터의 꿈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조각 9점은 그럴듯한 형태만 갖춘 것이 아니라, 숨 쉬듯 꿈틀대고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기계 생명체’라 불릴만하다. 생명이 ‘진화이며 형태의 변화이고 행동의 발명’(조르주 깡길렘)으로 정의된다면, 기계는 생명이고 생명은 기계인 그의 작품은 이 요건을 충족시킨다. 단순한 환경 적응을 넘어 창조적 역할이 있는 생명은 무엇보다도 그 다양성을 통해 예술의 귀감이 되어왔다. 그의 작품은 대개 곤충처럼 분절된 단위들이 연결된 형태이다. 금속판을 절단하는 더 진보된 기술이 적용되어, 작품은 정교함을 더한다. 최우람의 화려한 기계 생명체는 장식의 기원을 자연에게 되돌려준다.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자연을 구조적으로 모사할 수 있는 기술의 언어는 자연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변주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여기에다 고풍스러운 학명까지 붙인다. 학명에 포함된 자신의 이름은 발견과 발명을 중첩시킨다. 어차피 종이란 인간이 분류를 위해 임의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가 창조한 기계 생명체 또한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 

각 개체는 작가가 만들어낸 탄생 설화를 가진다. 이러한 서사를 통해 이 진기한 형태들은 인간 사회와 연결 된다. 곤충류나 파충류를 닮은 그의 작품에서 우뚝 서있는 영장류 또한 등장하는데 거의 4미터 가까이 되는 작품 <허수아비>는 네트워크를 상징하는 검은 전선들 뭉치로 거칠게 만들어진 기념비적 형상이다. 얼마 전까지 만물의 영장이었던 거인은 검은 날개에 망토를 두른 악마적 형태이며, 그것이 만들어낼 회오리바람은 모든 것을 파괴할 기세이다. 진보를 위해 영혼을 팔아버린 근대의 거인 앞에 제 꼬리를 먹는 뱀을 비롯한 괴물들이 조응한다. 인공구조물에서 인간사회에 대한 비유는 더 직접적이다. 번쩍이는 천사 상에 미러볼까지 가세한 황금빛 <파빌리온> 안에 붕 떠 있는 것은 검은 비닐봉지이다. 그것은 소비를 추동하는 물신적 체계의 강고함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허상을 풍자한다. 천천히 달리다가 갑자기 빨라지는 <회전목마>는 맹목적 속도가 만들어내는 폐해가 드러난다. 환상적인 유혹으로 치장된 장치들은 제로섬 게임으로 공회전하는 문명의 무대이다. 


한진수의 ‘Fantasy Factor’ 전은 정교한 기계장치들이 작동되고 있지만, 금속으로 된 거품 형태의 유령 같은 괴물은 표면과 본질과의 괴리가 극대화된다. 부조리해 보이는 기계는 정직한 기능의 표현을 초과한다. 겉도는 표면들을 위한 다양한 피부의 모델 또한 제시된다. 그것은 기계에 어울리지 않는 녹색에다가, 화려한 땡땡이 무늬들이다. 기계 설계자들은 첨단기술을 발휘하여 최대의 경량구조를 구현하지만, 소비자들은 거기에 다양한 피부를 입히곤 한다. 기술적 요소와 환상적 요소는 외적 장식 뿐 아니라, 내적으로 연동된다. 환상이 기술발전을 이끌고, 기술은 환상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화사한 색채의 날렵한 표면과 달리 늘어진 배처럼 아래로 처진 기계들은 둔탁하다. 이러한 중량감이라면 <녹색 괴물>은 아무리 날개짓을 해도 절대 날을 수 없을 것 같다. 기계는 날개를 펄럭거리며 공중을 떠돌 거품들을 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큰 덩치의 녹색괴물은 작은 녹색괴물을 뻥 튀기 한 형식이며, 고풍스러운 자동인형처럼 생긴 작은 나무 고양이와 큰 차이가 없다. 

로우테크가 적용된 그의 작품은 필요한 것을 두루 갖춘 전능함보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퇴행적이고 풍자적 형태로 기운다. 녹색괴물은 간략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형태지만, 동물, 식물, 기계, 유령 같은 모습이 발견된다. 환상적 요소가 실재가 되려면 대량 생산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환상은 실재가 된다. 그것은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에서 확연하다. 환상은 개인의 내밀한 무의식을 넘어서 집단화, 상품화된다. 그래서 ‘꿈의 공장’이라 불리웠던 헐리웃 영화산업 이래, 환상은 효과적인 기계를 필요로 하였다. 산업과 연결된 문화는 새로움과 기분전환을 소비와 연결하여 해결하는 인간, 즉 소비자를 낳았고, 그 욕망은 진정 채워질 수 없음으로 인해 거품을 양산하는 기계의 날개 짓은 계속될 수 있었다. 기계는 자연을 지배해왔지만, 곧 인간지배로 전환된다. 자본주의의 문화산업에 비판적이었던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합리화된 비합리성으로서의 현대문명을 강조한다. 한진수의 녹색괴물은 자유라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근대적 계몽이 그 반대로 귀결된 역설의 화신이다.   


최종운의 ‘The Title Match’ 전은 무엇과 무엇이 대결하는 장인지 불확실하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하위문화의 상징을 팝아트적인 요소로 재해석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LOVE>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공신화를 이끌었던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상어>를 재구성한 작품 두 개를 마주 놓은 것으로 보아 ‘타이틀 매치’는 여러 차원에서 벌어진다. 데미안 허스트의 원작에서 방부 액에 떠있는 상어는 죽음이라는 것을 애써 지워버린 현대적 의식의 단면을 드러내며, 1960년대의 몽환적 하위문화의 키워드였던 사랑 역시, 로버트 인디애나의 새로운 버전에 의하면 끝없이 자라나는 듯한 유기적 형태를 잃고 상업 광고 풍의 로고에 갇혀있다. 사랑과 죽음은 자연 뿐 아니라 예술의 생성과 소멸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동인이라고 할 때, 두 기성작가의 작품은 실재가 사라져 가는 시대를 간결하게 압축한다. 최종운은 이 두 작품을 변형함으로서 대화를 이어간다. 그의 말걸기는 더욱 서늘하다. 

최종운은 두 작품의 색을 하얗게 빼고, 형태 또한 수많은 박스로 픽셀화 하여 재구성하였다. 관념이나 생명은 더 잘게 쪼개지고 중성화되며, 신호가 바뀌면 순식간에 그 무엇으로도 호환될 수 있는 코드로 변화된다.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케이블 타이로만 연결된 단프라 박스들은 원작에 비해 좀 더 유연한 연결망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에 심어 놓은 LED는 계속 색상을 변화시키면서 가변성을 강조한다. 호흡이나 맥박 같은 변화는 그 기계/생명/예술이 작동중임을 알린다. 박스가 실제로 움직여지지는 않지만, 그 픽셀 같은 형태는 보다 동적인 시스템처럼 보이게 한다. 그것들은 마치 네트워크처럼 시간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계층적 구조를 이룬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간이라면 결코 초월할 수 없는 묵직한 주제를 팝과 포스트모던의 거장들이 그들의 어법대로 경감시켰다면, 최종운은 한 발 더 나아가 광자 입자 같은 것으로 휘발시킨다. 그의 작품은 마치 순간을 고정시킨 듯한 형태를 이루며 디지털 언어 같은 면모가 있지만, 두 거장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3차원 상에서 구현함으로서 막강한 물질적 현존성을 부여한다. 이전시대의 작가들이 관념이나 자연을 풍자적으로 고정시켰다면, 그는 관념과 자연을 이 시대의 보편화된 기호로 물질화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201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