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람 전(2012.11.1 - 11.30, 갤러리 현대)
기계이자 생명체이자 조각작품을 보여주곤 했던 최우람은 10년 만에 열리는 국내 개인전에서 신화적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추가했다. 키네틱 조각의 형태로 제시된 기계 생명체 시리즈는 각각의 탄생 설화를 내장하면서, 그자체로 놀라움을 주는 정교한 외관과 움직임을 넘어선 사회적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상징적 형식의 건축 구조와 인체 형상 또한 등장한다. 그가 창조한 기계 생명체에 붙여진 고풍스러운 형식의 학명처럼 각 작품마다 하나씩의 서사가 딸려온다. 서사는 관객 앞에 있는 낯선 존재의 독특한 형태와 움직임의 연원 또한 알려준다. 최우람은 자연이라는 무한한 자료집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구조와 형태를 조합하여 3차원 공간에 새로운 인공생명체를 존재하게 하고, 여기에 움직임과 서사라는 시간적 요소를 부여한다. 영향력이 있는 과학기술이나 이론에는 늘 상 의미 있는 서사가 깔려있었다고 볼 때, 서사는 장식적으로 덧붙여진 요소라 할 수 없다.
7살 때 그린, 기계장치로 가득 채워진 동물과 인간 이미지는 이 전시가 가능했던 어릴 적부터의 꿈을 엿보게 한다. 신화가 인류의 유년기적 사고를 반영한다면, 유년기 또한 계통/개체발생적인 관계를 통해 신화를 반복하며, 이 전시를 가능하게 했던 무의식적, 의식적 추동력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기술과 예술이 서로를 고양시키는 극적인 경우이다. 그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조각가의 길을 걷다가 우연히 이런 부류의 작품을 하게 된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전시는 로봇을 좋아했던 소년적인 꿈이 펼쳐진 장이다. 지하 전시실의 벽에 붙여진 50여점의 드로잉은 움직이는 조각을 가능하게 한 영감의 발상과 전개과정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그것들은 종이 위에 쓱쓱 그려진 자유로운 발상이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정교한 형태로 현실화 될 때까지 투입되었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의 흔적들이다. 최우람의 작품에서 제작은 작가에게 최초의 영감이 있은 후에 누가 실행해도 상관없는 익명적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협업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현대미술에서 발상과 제작이 분리되어가는 경향은 스스로 서있을 수 없는 불완전한 작품이나 장식물을 양산했고, 실제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창조적 발상들을 사장시켜왔다. 개념미술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손이 게으른 몽상가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표현 의지와 욕망을 가진 당사자가 그것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기술 또한 겸비할 수 있다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은 보다 유기적으로 연동될 것이다. 작품을 이루는 마디들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한 그의 기계 생명체들에 비해 인간은 다소간에 거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기계 생명체들에 자연주의적 정밀함이 있다면, <허수아비>로 작명된 인간의 모습은 가감이 보다 확실한 표현주의 풍으로 무대를 지배한다. 전자는 정교한 분절화로 후자는 얽힌 선 뭉치로 가시화된다. 둘 다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 아닌 환상적 괴물이지만, 현대인간을 상징하는 ‘네트워크의 신’은 부정적 기운이 감돈다.
그것은 검은 선들로 휘휘 감겨 그 내부가 감추어진 위장된 표면, 어두운 악마의 모습으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같은 면모, 주변에 불길한 기운을 퍼트릴 것 같은 잠재적 움직임이 특징적이다. 기술의 날개를 달고 신처럼 전능해지려는 불온한 욕망을 표현하는 그 거대한 형상은 근대부터 실질적인 가속도가 붙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기획을 상징하는 듯하다. 전선뭉치로 된 신화적이며 근대적 영웅은 자신의 탄생 기원을 자연에 두지 않으며, 앎을 통한 세계 지배와 소유를 꿈꾼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기획은 신화적이고 예술적인 상상력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존재들을 타자화시키고 궁지에 빠트려왔다. 현대의 예술가는 인간의 상상과 자연에 서식하는 다양한 종을 자신의 수단을 통해 복원 또는 생성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진보를 향한 단선적인 사고가 성장과 파괴를 동시에 야기해왔다면, 이 전시에서 많이 발견되는 둥근 구조는 앎을 통한 자연의 지배보다는 삶을 통한 자연에의 순응을 중시했던 순환 원리에 가깝다.

제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작품 <우로보로스>는 이원적 사고에 의해 분리된 것을 이어주는 고대의 신화적 형상을 첨단기술로 재연한 수작이다. 그러나 순환의 원리는 타락하여 공회전을 남발하기도 한다. 놀이 기구 템포로 서서히 돌아가다가 갑자기 빨라지는 작품 <회전목마>는 속도의 숭배가 낳은 파국적 모습이다. 황금빛 기념비인 <파빌리온>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빈 비닐봉지이다. 화려하고 견고한 구조를 갖춘 소비의 전당에는 빈 욕망만이 헛되이 떠돌고 있다. 최우람 전에서 장대한 시공간의 스케일을 가지는 신화적 자연이 경이로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자연사에 비해 짧지만 보다 파괴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왔던 인간 문명은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전시를 채우는, 경이로운 기계생명체를 가능하게 했던 기술적 진보의 양면이다.
‘자동인형’에 대한 사전적 정의처럼, 최우람의 작품들은 ‘동력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기계’이자, ‘판에 박힌 일을 단조롭게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인간’을 동시에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 문명의 산물인 기계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복제, 번식하고 진화해 나가는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간과 기계는 어느 역사적 단계에서 어느 하나로 환원됨 없이 공(共)진화한다. 인간이나 자연의 원 모습과 차이가 있는 최우람의 유사 생명체들은 작품은 인간 이후와 기계 이후 시대에 비롯될 양자의 만남을 예시한다. 이 만남은 각 작품에 스며있는 신화적 스케일의 서사를 통해 활성화 된다. 그것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의 탄생, 또는 질서가 와해되는 과도기를 거쳐 다시 형성될 새로운 질서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친숙한 유토피아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은 그러한 거대 서사가 빈말로 들리지 않을 만큼 설득력 있는 구조로 작동중이다.
출전; 월간미술 201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