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미술의 고립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공동체 - 그것이 불확실한 것으로 다가오면 사회라고 하자 - 와의 유대가 단절된 현대미술은 근본적인 결핍을 안고 있다. 자율성의 확보라는 역사상에 빛나는 예술의 수확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예술은 신화나 종교의 시대만큼의 자체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다.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달성되었을지 모를 예술의 순도나 강렬함은 단지 그 자체만을 위해 서 있을 뿐이다. 네트워크 지상주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홀로 서있음이라는 실존적 조건은 개체들이 이 세상이란 곳에 태어나 생존하는 문제만큼이나 묵직함을, 그리고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사회로부터의 고립은 예술을 너무나 무겁게 했거나 신비롭게 했다. 아래로의 하강과 위로의 상승 어딘가에서 붕 떠 있는 것이 현재 예술이 처해있는 상황이다. 예술은 애매하게 붕 떠있기 보다 적극적으로 날기 위하여, 대중성과 공공성이라는 양 날개가 필요하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현실 그 자체나 초현실 그 자체로 환원되어버린 것들은 무의미하다. 현실로의 함몰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너무나 쉽게 ‘일상은 예술이다’를 외치며 현실의 진부함을 단지 반복하는 부류, 현실을 관념화하며 도식을 재생산하는 부류, 아니면 돈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고 예술을 직장 문제로만 생각하는 부류가 그것이다. 그것들이 일상의 예술, 리얼리즘, 현실주의 등으로 불리웠다고 해서 현실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초현실로의 함몰 또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실과 더 이상 상호작용하지 않는 무익한 관념성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예술은 효과적인 방법론을 갖추지 못한 진리 탐구, 또는 기성의 종교나 사이비 신비주의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초월적이지도 않은, 삶과 평행선상에서 긴밀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예술, 또는 예술적 삶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상을 위해서는 예술 내적인 문제 뿐 아니라 그 안팎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에게 예술적 현실을 포함한 모든 현실은 그냥 현실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연 마저도 그러하다. 인류학자 크리스 젠크스에 의하면 인간은 더 이상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것을 대면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경험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언어적인, 그리고 차츰 인습, 관습, 습관이라는 상징적인 어휘를 통해서 경험한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며, 인간에 앞서 존재하는 상징적 우주는 한계로도 가능성으로도 다가온다. 현대미술의 사회적 고립은, 대중성과 공공성의 문제를 더 이상 예술 외적인 문제로 다가오지 않게 한다. 예술성은 예술계를, 대중성은 시장을, 공공성은 공공영역을 자신의 장으로 삼는다. 시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은 1차적으로 대중성으로 다가온다. 대중이란 민족이나 민중, 시민, 요즘 부상하고 있는 다중과도 다르게 대량생산과 소비시대와 더불어 태어난 집단이다. 예술이 단지 내부자들끼리의 소통을 넘어서 유통, 즉 생산과 소비의 회로에 편입될 수 있으려면 대중성을 고려해야 한다. 필요는 물론, 단순한 필요는 넘어서는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된 시장은 풍요와 활기가 넘친다. 그러나 시장은 독점으로 기울어지기 십상이다. 미술시장 역시, 물신주의의 정점에 선 소수만이 미술계의 건재라는 알리바이를 보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중적인 것과 민주적인 것은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공성이다. 공공성에 상응하는 주체는 대중이 아니라, 시민이나 다중이다. 신자유주의의 독주는 신자유주의의 열렬한 선전가와 주창자들마저도 그 부작용을 경고하게 만들었다. 

편재화 된 전자매체를 매개로 소(유)통 되는 코드화 된 문화가 예시하듯, 표피적인 흥미로움에 호소하는 대중문화는 더 큰 권태로움만을 가져온다. 권태로움은 가혹함의 이면이다. 이전시대에는 코드화(상품화) 할 수 없었던 시공간을 포함하여, 공기처럼 대중을 감싸는 문화를 조금씩 소비하다 보면, 삶은 더 소소하고 사적인 것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단말기에 복속된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약처럼 계속 소비될 것만을, 그리고 자극의 강도를 높일 것을 요구함으로서, 무기력한 소비자 대중을 낳는다. 의미보다는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에게는 자신과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회피시켜줄 수 있는, 요컨대 소비를 계속 가능하게 해줄 돈만이 유일한 현실이 된다. 노동과 여가의 단절로 인해 노동은 더 지루하고 여가는 더욱 자극적인 것으로 변했다. 노동은 시스템화를 통해 비(非) 숙련 화되었으며, 모순의 시스템은 과도한 경쟁으로 유지된다. 공공성은 의식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질곡에 빠질 수 있는 대중적 삶에 대한 각성을 요구한다. 공공성은 대중성처럼 집단적 현상이지만, 그 실현방식은 보다 정치적이다. 공공성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다수의 삶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충만하면서도 빈곤한 예술성

경제적인 의미에서 대중성과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공공성은 예술이 더 화려해야 하거나 더 큰 명분이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을 보다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현재 예술의 지속가능성은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아닌 제도를 통해서 연명되고 있다. 크고 작은 흥밋거리로 가득한 스펙터클 사회에서 미술은 소수의 문화가 되어 버렸다. 소수의 예술에서 성취되곤 하는 충만함과 강렬성은 예술이 단지 잉여나 장식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유일한 시공간의 짜임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아우라)를 가지는 예술작품의 힘은 기계복제의 시대에 와해될 위험에 놓여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신비는 여전히 필요하다. 그것은 핍박한 물질적 현실과 인간 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의 충만함과 강렬성이 대중의 물질적인 만족이나 공공적 정의의 구현만큼이나 인간에게 필수적인 근본 가치임이 공인되어야 한다. 

또한 현대 예술에 결핍된 대중성과 공공성을 내장하기 위해서 예술자체도 변화해야 한다. 훈련과 재능의 복합체로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은 단순히 공통적인 것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추구하며, 예술에서의 차이는 분화를 거듭해온 현대적 생산방식에 역행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예술은 철학이나 정치경제학의 총체성의 이상과도 다르게, 골이 깊어진 각 분야 생산방식의 간극을 잇는 상상력을 통해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현대예술의 고립은 분화에 안주하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이해가능한 차이가 아니라 완전한 차이로 고립되어 버렸다.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에서 발견되듯이 예술신학으로 고양된 근대미술은 흡사 종교와도 같이 절대적 타자에 호소할 지경이 된 것이다. 그린버그의 정교한 비평 논리로 완결된 지고한 회화의 평면성은 종교의 분위기를 떨쳐내려 한 모더니즘과 형식주의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전문화된 과학이 과학을 넘어서 현대적 삶 전반에 영향을 주는 것과 달리, 전문화된 예술은 단지 ‘예술계’(단토)의 인정을 통해서 존재한다. 

개념미술은 예술계의 승인만 얻는다면, 단순한 사물이나 어떤 개념, 태도 역시 예술 작품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뒤샹이 제시한 레디메이드는 예술이 더 이상 본질이 아니라 절차, 즉 배치나 맥락, 의미부여의 문제임을 알린 최초의 작품으로, 현대미술책 소개서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개념화는 미술의 확장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대중과 공공으로부터 멀어진 예술계의 인증만을 요구할 뿐이었다. 예술의 개념화는 예술을 예술계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계의 인정을 받는 예술가 개인이라는 신화와 조응했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라는 개념에 기반 하는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의 산물로서의 작품이란 오늘날 도전받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자율성이란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근대의 이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돈 슬레이터는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개인주의, 이성, 자유 등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서구적 진술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진술에 의하면 개인은 이성에 의해 정의되는 한 자유롭고 자율적이다. 

이성은 근대적 개인이 전통사회의 비합리성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내적 자원이다. 계몽주의는 개인을 세계철학의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자유주의는 개인을 규범과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자유주의의 내용은 개인이 자기이해를 규정하고 추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회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기이해 추구는 스미스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사회가 질서정연하고 발전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며,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합리적 경제행위와 시장이다. 장기간 동안 이성, 자유, 사회발전이라는 신성 삼위일체는 경제적 인간의 경제적 자기이해의 추구로 명백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지배의 한 전략임이 드러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액체 근대]에서 법률상 개인의 숙명과 실제상 개인의 운명 사이에 드리워진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을 강조한다. 법률상의 개인의 여건과 실제 개인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진정 바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 사이에는 엄청나게 넓은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해방이라 함은 단지 법적일 뿐인 개인의 자율성을 실제적인 자율성으로 바꾸는 과업이다. 

현대 인문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언어학은 개인 이전에 존재하며 개인을 구성하는 상징적인 형태로서 언어를 강조한다. 선재하는 이 거대한 상징적 공간을 통해 무의식과 주체가 구성된다. 라깡이 지적하듯 인간이 상징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현대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의 가설은 창조적 개인으로서의 예술가나 예술작품이라는 기성의 관념을 변화시킨다. 작품이 아닌 텍스트를 강조하는 롤랑 바르트는 현대의 작가가 작품에 선행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동시에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지고한 창조자라기보다는, 단지 변화시키는 기술과 결합의 기술만을 가질 뿐이며, 작가가 텍스트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고전적인 텍스트는 독자에게 수동적인 수용을 강요하지만, 새로운 텍스트의 척도는 종결된 생산물이 아니라, 독자를 이끄는 생산 작업에 있다. 좋은 작품은 쉽게 읽히거나 보여지기 보다는 새로운 생산을 가능하도록 한다. 공동의 생산과정 속에 놓인 열린 예술작품은 창조적인 개인과 수동적인 소비자로서의 관객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서, 더 많은 소통과 더 풍요로운 예술언어를 일굴 수 있다. 


3. 유일화 된 시장, 소비자로서의 대중

현대예술의 고립은 인간의 지각방식이 변화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사진을 필두로 한 기술적 발명품의 영향이 크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 즉 생산에서 소비로 방점이 옮아간 탈근대와 더불어 도래했다. 소비와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 대중문화가 있다. 문화는 예술보다 폭이 넓은 개념이다. 한편 문화를 예술로만 보는 관점도 있다. 크리스 젠크스는 [문화란 무엇인가]에서 문화를 인간 성취의 정수를 지칭하는 것은 엘리트적인 시각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의 문화는 인간이 창조한 성취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상징적인 재현을 요약한다기 보다 회화, 문학, 음악, 개인의 인격 완성 등에서 우수한 것만을 지칭한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기반 하는 산업화된 문화, 즉 문화산업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이미 도래한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관점으로 부정만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화는 시대정신처럼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틀’(헤겔)로 간주된다. 문화는 개인에게 사고방식과 행동규범을 제시하고 이를 합리화한다. 그래서 문화는 ‘사회질서를 정당화시키는데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들, 이해관계, 공유하는 믿음체계 등을 함의’(크리스 젠크스)한다. 

물론 문화는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창조적으로 탈주하는 방법도 제시한다. 전반적인 삶의 양식이라 할 만한 문화 속에 예술이 포함되어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의하면 근대 이전에 문화라는 말은 본디 ‘자연스런 성장의 육성’을 의미했으며, 다음에는 비유적으로 인간을 배양하는 과정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보통 무엇을 육성하다는 뜻에서 온 후자의 용법은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문화로 바뀌었다. 그것은 첫째 인간 완성이란 개념과 밀접히 관련된 ‘정신의 보편적인 상태 내지는 습성’을 의미하게 되었고, 둘째로 ‘사회 전체에 있어서의 지성의 발전 상태’를, 셋째로 예술의 총체를, 넷째로 19세기 후반에 와서는 ‘물질, 지성, 정신에 걸친 전반적 생활방식’을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문화의 개념은 발흥하는 산업과 민주주의에 대응한 반응이라는 점이 강조되지만, 문화 역시 산업과 민주주의로 해소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중문화이다. 소비사회 속에서 대중문화는 문화의 우세종으로 자리 잡았고, 상대적으로 소수자의 문화인 예술과 차이를 갖게 되었다. 

다수의 대중에 기반 하는 대중문화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는 듯하다. 현대에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역시 역사상 어느 때 보다도 많다. 게다가 개념미술을 통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지 않았는가. 이전시대에 예술가가 보편적 지식인이나 전문가였던 것만큼이나, 이제 예술가도 대중인 것이다. 현대의 노동방식에 내재한 단조로움과 가혹한 경쟁의 논리는 부담 없는 재미와 위로를 문화로부터 요구하게 된다. 대중문화는 ‘달콤하고 가벼운 것에 대한 열망과 이것들이 우세하도록 만들려는 열망’(매슈 아돌드)에 사로잡혀 있다. 소외된 노동이 소외된 여가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 시대의 좌파 지식인들은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 해방된 세상이 오면 예술은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도 장담하기도 했다. 가령 문화산업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의 적대자로 고급 예술을 옹호했던 신좌파 지식인 아도르노는 노동자가 쇤베르크의 음악을 즐기는 어떤 이상적 단계를 꿈꾸었는데, 역사상 진보적 계급이 진보적 예술을 즐겨했던 예는 거의 없다. 수동적 소비자의 문화에서 노동자나 지식인, 예술가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예술이 소외된 대중에게 재미와 위로를 주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예술은 예술가 자신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킨다. 예술가는 자신을 소외시키는 사회에 대항하여 자기만의 성을 쌓을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다. 소비사회는 시장을 열어놓았다. 시장을 악마시할 필요는 없다. 고가의 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차별성을 추구하고 관심을 끄는 것에 주목하는 대중에게 특이함을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독점이 문제인 것이지, 시장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돈 슬레이터는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대량생산과 소비에의 대량 참여는 상품세계의 확장을 가져왔고, 화폐화 된 모든 형태의 부를 통해 특권에 기반 한 전통사회를 무너지게 했다고 말한다. 사적인 상업적 부가 자의적 권위에의 저항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에 상업은 시민성과 관계된다. 상업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은유로 다가왔고, 화폐경제 내에서 상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공공영역 내에서의 관념, 대화, 견해 등의 자유교환을 야기했다. 그랜트 매크래캔에 의하면 19세기에는 소비혁명이 하나의 영구적인 사회적 사실로서 자리 잡았다. 소비혁명은 산업혁명에 의해 초래된 사회 혼란과 싸우는데 필요한 문화자원의 일부를 제공했으며, 이는 지금도 사실이다. 모순은 좀 더 조밀하게 계층화된 시스템을 통하여 아래로 전가되고, 전가될 수 있는 한 소비는 생산관계의 모순을 지탱시켜준다.


4. 탈근대 시대 예술의 필요조건으로서의 공공성 

소수자의 문화로서의 예술, 대중적인 문화 외에 공공성이 더 필요한 이유는 사회가 점점 더 시스템화 되어가고 있고, 자연은 물론 몸과 무의식의 차원까지 구조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면서부터이다. 구조화란 중성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형된다. 그러나 구조와 인간의 관계는 원활치 않다. 현대 관료제에서 볼 수 있듯이 구조는 인간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구조자체를 확대재생산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내려와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 함께 결정해야할 일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공공성이 요구된다. 공공성은 공동체를 호출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개인이나 대중보다도 더 불확실한 존재이다. 이전시대에는 민족이나 민중 같은 유기체적 사회에 뿌리를 둔 집단적 주체들이 가정되기도 하였지만, 이미 현대 사회는 유기체적인 비유를 넘어서 확장되고 있다. 

전체와 부분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총체성이 다수의 표면들로 해체된 것이다. 거대한 표면으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표류가 아닌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공공성이라는 좌표가 필요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에 의하면, 공동체의 한 유형으로서의 민족성은 ‘역사를 자연화’하고, 문화를 ‘자연적 사실’로 간주한다. 식민지 경쟁이 극심했던 근대에는 국가가 주도하고 감독하는 문화투쟁, 즉 ‘자연적 공동체’를 만들려는 국가적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후 자본주의가 전개되면서 다국적 기업들이 지배하게 된 시장은 근대 민족국가를 소멸시켜갔다. 기업들, 즉 지역적 이해와 제휴관계가 이리저리 분산되고 변화하는 전지구적 기업들에게 이상적 세상이란 ‘국가가 아예 없거나 최소한 덩치가 좀 작아진 국가들만 있는 세상’(홉스봄)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의 지구화는 민족 공동체를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 간 평화로운 공존이 아닌, 적대감과 투쟁을 악화시킨다. 

예술성이 예술계를, 대중성이 시장을 전제한다면 공공성은 공공영역을 요구하는데, 역사적으로 공공영역이란 19세기에 상승하는 중산계층에 의해 잠시 형성되었다가, 곧 시장에 의해 잠식되어버린 이상적인 개념으로 평가된다. 공공성은 예술성이나 대중성과 달리, 좀 더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예술성의 내밀함과 강렬함, 대중성의 재미와 기분전환에 더하여, 공공성이 만들어 내야할 것은 의미와 목적이다. 시민이 주체가 된 공공영역이 시장에 의해 잠식되고 있으므로, 새로운 공공성의 주체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집단이면서도 개인인 다중(multitude)이다. 다중은 민족국가의 경계가 전 지구적 차원으로 해체되는 탈 근대적 단계에 상응한다. 중심과 주변, 안과 밖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제국의 네트워크는 전 지구적 지배 장치가 되었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에 의하면 자율적인 개체의 민주적 연대인 다중은 새로운 지배에 대항하는 대안의 주체이다. 

주권이 전지구적으로 조직된 맥락에서는 제국과 다중이 직접 맞선다. 탈근대에서 반란의 탁월한 형태는 복종으로부터의 탈출, 즉 척도로부터의 탈출이며, 그리하여 측정 불가능한 것에 자기를 여는 것이다. 탈근대의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가장 공통적인 것이기도 하다. 단수이며 다수인 탈근대의 다중은 죽은 노동이 아닌 산 노동을 지향한다. 다중의 정의에 내포된 개념들은 대중에 비해, 예술적인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다중 자체가 재현이 아닌 생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공성의 주체인 다중에게는 척도의 시간 대신에 불확정적인 시간이, 초월적 명령을 행하는 중앙집권화 대신에 지역적이고 직접적인 활동이 중요하다. 다중에 의해 쟁취되는 공공성은 자본과 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활짝 열어 제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움직임에서 예술은 이전시대의 아방가르드와도 다르게, 다시금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debut 2(북노마드와 제너럴그래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