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범

권기범은 이 시대를 특징짓는 코드로 모호함을 지적한다. 최근에 제작되고 발표된 많은 작품에 모호함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모호한 형상의 구축’이라는 같은 부제로 세 번의 개인전이 진행된 바 있다. 그것은 작업 초기에 화선지에 그린 꽃으로 상징되는 동양화와 자연의 본질 탐색, 그다음 영상작업에서 드러나는 자연과 문명의 충돌에 이어, 경계가 와해됨으로서 야기되는 새로운 문화적 국면이 작가의 관심사로 자리 잡게 됨을 알려준다. 구축이란 작가가 당면한 시대의 혼란을 작품이라는 장에 그러모으기 위한 방편이다. 권기범도 어릴 때부터 작품을 시작한 동양화과 출신의 작가답게 본질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러나 모든 가치들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어떤 본질을 표현할 것인가. 본질주의가 자명하게 가정하는 바와 달리, 본질은 매 순간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의식이 전통적인 미술과 현대미술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모든 가치 기준이 불분명하게 되었을 때, 자신으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것은 현대 미술가들의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권기범의 경우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싶은 충동에서 자연 발생적인 드로잉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드로잉은 모호함 및 모호함에 직면한 자신을 표현하는 적합한 방식이다. 연필과 붓으로 이루어지는 드로잉은 지우기와 그리기를 반복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최근 작품에서 혼성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도상은 독일계 일본인 모델에서 왔다. 잡지에서 발견한 사진을 소재로 하여, 머리 부분에 여러 형상들이 얽혀 있다. 마치 한 개인의 머릿속을 투시한 것 같은 (무)의식적 파편들의 조합에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형상들이 들끓고 있다. 조합의 과정은 작가가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관객의 해석에도 작동된다. 지각과 기억이 뒤얽히는 머릿속 풍경은 어떤 선조적 인과 관계도 해체되어 있다. 드로잉과 함께 주력하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벽화이다. <Jumble Painting>이라 이름붙인 벽화 작업은 2007년 영은미술관에서의 작업 이후, 매 전시마다 병행해왔다. 그것은 동양화의 형식이 아니라 동양화의 원리를,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표현한다. 그것은 이전의 영상작업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나 대나무 잎을 통해 자연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종이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모필을 움직이는 동양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원리를 내포한다. 바닥에 고무줄을 풀고 촬영하고 붙이고 떼어내는 등의 보정을 거친 후 벽면에 옮겨짐으로서, 중력과 장력 같은 자연의 힘이 만들어내는 형상이 넓은 벽면에 펼쳐진다. 선적 요소가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확대됨으로서 강력한 이미지가 구축된다. 이렇게 강렬한 표현 형식을 갖추게 된 모호함은 단지 원초적 혼돈에 머무르지 않는다.   


김기라

김기라의 작품에는 현대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기표들이 쇄도한다. 그것은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며, 여기에는 그 사회를 이루는 근본적 모순과 다양한 욕망이 점철된다. 많은 기호들을 수집하여 편집하는 행위는 고풍스러운 유화부터 꼴라주, 환경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설치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제작하는 그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작품의 출발이 되는 수집과 편집이라는 행위에는 편집증과 분열증이 내재해 있다. 다국적 기업의 패스트푸드가 등장하는 작품은 액자라는 형식에 사물을 가상적으로 소유하려는 근대 중산층의 욕망이 투사된 유화 형식을 차용하여, 현대의 정물화를 만든다. 매 작품마다 한상씩 차려진 음식들은 삶이 아닌 죽음의 기호들이다. 그것은 정물화에서 바니타스나 메멘토 모리라는 전통적 알레고리를 계승하면서, 브랜드로서의 맥도날드 현상을 사회적으로 탐구한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짜내는 구조는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생명을 좀 먹으면서 번성하는 체제라는 메시지이다. ‘Super Mega Factory’전에서는 고색창연한 예술형식부터 대중문화에 이르는 코드들이 총동원 되었다. 순수하고 균질적인 장소인 화이트 큐브는 극장 같은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신기루나 만화경 같은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이 꿈의 공장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축소모델이다.

이 전시의 작품 <20세기 슈퍼 히어로즈_Monsters>는 대중문화의 영웅들을 조합하며 만든 괴물이다. 대중과 친숙한 여러 캐릭터를 뒤섞는 방식은 최근 작업인 <specter_monster> 시리즈에도 지속된다. 이익을 위해 공장에서 대량적으로 생산되는 대중문화는 근대의 계몽주의가 축출했다고 믿어지는 전근대적 사고와 감수성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는데, 스펙터 몬스터 시리즈에는 아예 전 세계의 종교와 역사, 신화의 도상들을 꼴라주한다. 이 시리즈는 세계의 유물들이 모여 있는 대영박물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받은 인상에서 왔다. 식민주의의 잔재는 문화 관광이라는 새로운 상품으로 탄생한다. 이 시리즈는 바닥에서 머리를 위로 두고 서있는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많은 종교적 역사적 조형물에 내재된 기념비적 양식이다. 여러 조각품과 건축물에서 발췌한 요소들이 하나의 몸뚱이로 조합되어 탄생한 괴물은 기존의 기념비에 내재된 남근적 권력과 욕망이 더욱 부풀려진다. 작품들은 거대하고 웅장하고 단단한 것들을 잘게 찢어 무화시키려는 반(反)기념비적인 충동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그것은 우상과도 같은 잡종교들이 번성하는 현시대에 대한 초상이다. 잡동사니를 관통하는 힘은 자본이다. 자본이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모든 것을 상품으로서 호출하고, 그러한 상품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이란 단지 분해된 채 뭉쳐지는 것이므로 편집증과 분열증을 피할 길이 없다. 


김인배

김인배는 2006년 첫 개인전 ‘차원의 경계에 서라’전부터 하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3차원 구조물에 연필로 머리털이나 표정을 그려 넣은 독특한 조각을 선보였다. 마치 입체 캔버스에 드로잉을 하듯이 그어진 선들은 회화와 조각 뿐 아니라, 종들 사이의 경계를 이동시킨다. 이렇게 ‘차원의 경계에 서는’ 방식을 통해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감추어진 인간의 동물성과 무의식적 차원이 드러난다. 그의 전시는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무대이다. 2007년 ‘진심으로 이동하라’전에 등장하는 하얀 플라스틱 형상은 여전히 빈 바탕 면이 되지만, 흉내나 가상이 아니라 변형이 강조된다. 가령 두상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된 작품 <델러 혼 데이니>는 인간을 상징하는 얼굴을 소실점 저 너머로 멀리 밀어 넣거나 삭제한다. 인간의 얼굴은 그냥 머리통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전이는 인간성에 대한 가장 과격한 도전이라 할만하다. 작품 <사랑해>에서, 안팎이 뒤집혀진 같은 냉장고를 원형대로 바라보는 거인의 얼굴은 주변을 무표정하게 반사하는 입방체로 변해있다. 두상을 칭칭 감아 도는 선이 전신을 뒤덮은 작품 <샤모랄타 사모랏타>처럼, 바람 빠지는 풍선 같기도 하고 물고기 같기도 한 도상은 자화상이다. 이 유선형 변형체는 표준화 된 인간상의 제거와 삭제를 넘어서, 스스로 적극적으로 변신함으로서 억압을 야기하는 지배적 상징 질서의 그물망을 빠져 나가려 한다. 

2010년 뉴욕과 2011년 천안에서 차례로 선보인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전은 그의 작품에 내재되어 있던 리듬감이 두드러진다. 작품 <연산자>에서 삼각 지지대 위의 두상들은 요동치는 선으로 자연스럽게 접합된다. 구불거리는 선에 연결되어 늘어진 코는 이전처럼 입체 위에 드로잉 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입체에서 뽑혀 나온 선들로 공중에 그려진 것 같은 모습이다. 여기의 인간상은 다른 것들과 보다 용이하게 접합하기 위해 조각나 있다. 절단면과 연결망에서 생성되는 리듬은 사물과 인간에 공통적이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자율적 개체가 아니라, 군체로 나타난다. 작품 <clock>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부가 붉게 변하는 듯한 남성 토르소들은 자극의 강도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여기에서 거세에 대한 암시는 필연적이다. 거세는 맹목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작품 <너의 눈을 흔들어 마음에 바쳐라>를 비롯하여, 그의 두상에는 눈이 불확실하다. 눈과 성기로 대변되는 공간에 대한 지배는 불확실한 시간의 흐름으로 대치된다. ‘요동치는 정각’이라는 전시부제는 정지와 균형에 내재된 운동감을 암시한다. 작품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에서, 일련의 단위구조의 연결망은 보다 역동적이다. 작품 <Rising fastball>은 투수의 연속 동작을 하나의 형상으로 압축한 것이다. 그것은 로댕으로부터 시작되는, 조각에 시간의 추이를 담고자 한 현대조각의 흐름에 속한다. 


노충현

노충현의 그림 속에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핵심에 놓여 있지만, 대도시 특유의 번잡함과 화려함이 없다. 이 애매한 도시 풍경에는 볼거리나 이야기가 없다. 그는 주변의 풍경을 그리지만 관객들은 그 장소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걸어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포토샵으로 처리하고 형태와 색채를 가감하는 과정을 통해, 장소의 특정한 모습이나 사건보다는 일련의 분위기가 강조된다. 2004년부터 그려온 한강 주변은 살풍경하다. 작가는 살풍경이 자신의 작업을 아우른다고 본다. 그의 작품에서 살풍경은 살벌한 풍경보다는 쓸쓸하고 보잘 것 없는 풍경에 가깝다. 풍경은 실내외를 막론하고 시멘트, 녹, 흙먼지 같은 잔여물들이 끼어있는 우중충한 분위기이다. 요즘에 그리는 살풍경에는 비나 눈 같은 기후적 현상이 지배적인데, 풍경을 감도는 공기는 한강공원이나 동물원, 밀실을 그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독과 유폐의 분위기에 잠겨있다. 없는 풍경을 상상으로 만든 것이 아니므로 원근감이 있지만, 원근법적 투시에 의한 깊은 공간감 대신에 평면성이 자리한다. 그것은 추상화가 아니면서도 모더니즘적인 특징을 부여한다. 그의 풍경은 중경에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멀리서 바라본 풍경에 내재된 지배적이고 초월적 시점, 그리고 가까운 장면에 주목하는 소유와 안주의 느낌이 없다. 먼 곳과 가까운 곳 사이의 중간에 시선이 머무는 작품의 색조 역시 선명하지 못하다. 

무채색은 아니지만, 거의 색이 빠져 있는 것 같은 흐릿함이 특징적이다. 서울을 비롯한 전형적인 현대 도시는 선명하고 화려하며, 번쩍거리는 인상을 주지만, 그의 그림은 구체적인 장소로부터 출발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변주된다. 그것은 작가가 도시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황량함을 대변한다. 서울 대공원이나 어린이 대공원의 동물원에서 소재를 얻은 전시 [자리]에 나뒹구는 장난감들은 부조리 극 같은 무대의 소품들이다. 여기에도 한강공원 풍경처럼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부재의 풍경은 고립과 유폐를 낳는 현대적 공간의 상황을 연출한다. 동시에 이 비어있음의 자리는 소외를 신비로도 고양시키는 바깥을 형상화한다. 2009년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실밀실] 전은 고립과 유폐의 이미지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 확장한다. 감옥이나 고문실 등을 연상시키는 장소들은 공식화 된 장소가 아니면서도 은밀하게 공권력이 자행되는 곳이다. 그곳은 텅 비어있으면서도 보수화된 한국사회가 짓누르는 숨 막히는 분위기가 깔려 있다. 노충현은 2011년에 다시 살풍경으로 돌아왔다. 폭설이나 장마에 잠겨있는 도시의 모습은 인공을 압도하는 자연의 힘을 예시한다. 그러나 자연의 힘이 덧입혀진 도시에도 적막감은 계속된다. 새로운 버전의 살풍경은 일견 서정적으로 보이지만, 모든 것은 침수시키고 파묻는 시간의 파괴력이 극대화 되어 있다. 


손정은

2000년에 열렸던 ‘달의 정원’전부터 손정은은 설치를 통해 관객을 신화와 종교, 그리고 싸이코 드라마 같은 극의 무대로 안내해왔다. 기존의 조각과 달리, 공간을 장악해 가면서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풍경은 늘 무대장치이기도 했다. 최근에 열린 ‘명명할 수 없는 풍경’전은 에로틱한 환상이 증식되는 붉은 방, 동식물의 파편들이 수집된 실험실, 둥근 거울이 설치된 빈 무대 같은 상황을 연출한 바 있다. 공간 또는 무대는 닫혀있음으로 인해 열려있다. 설치된 다양한 오브제들은 작품 속에 진입한 관객에게 밀폐 감을 주는데, 그것은 감정적 밀도와 육체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것은 존재의 변모를 요구한다. 전시 공간 자체가 모든 것이 뒤섞으며 또 다른 것을 생성하는 자궁이나 연금술의 용기와 비교될 수 있다. 손정은의 초기작업은 숲 속에 공작새가 노닐거나 하얗고 푹신한 실내 따위의 파라다이스 같은 광경이 연출되곤 하지만, 세부를 이루는 것들은 그렇지만도 않다. 그녀의 작품이 심리극적이라면 그것은 값싼 위로나 치유가 아니라, 모순적 상황을 가속시킴으로서 카타르시스를 야기하는 잔혹극이다. 심리적인 공간 구성에서 관념이나 개념은 몸에 그 중심을 양보한다. 살점이나 피부, 피같이 유기체적인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들은 식인적인 환상에 의해 지배된다. 무엇인가 요리하고 먹는 섭식의 과정은 예술적 과정과 중첩된다. 
 
그것은 사랑의 과정이며 실험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테마는 첫 개인전 이래 ‘복락원’, ‘사랑 2006’, ‘외설적인 사랑’에 계속되며, 2011년에 열린 ‘명명할 수 없는 풍경’에서 종합된다. 사랑은 연애소설에 나타난 성역할 분담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것부터 사도마조히즘이나 포르노그래프의 탐구에 이르는 다양한 범위에 걸쳐있다. 성의 관계라는 것이 결국은 권력 관계이며, 이 관계 속에서 생과 사의 드라마가 전개된다. 성적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이 사디즘과 마조히즘인데, 갖가지 방식으로 죽고 죽이는 기독교 순교성인의 이야기 역시 가학피학성이 깔려 있다. 엄격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에게 성(性)은 금기의 위반을 통해 성(聖)과 속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주된 매개가 된다. 가령 파편화된 신체에 흩뿌려진 하얀 액체가 성수인지 젖인지 정액인지 명확히 구분할 기준은 없다. 연금술적 용기나 실험실의 투명 용기는 초창기 설치작업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형식적 장치이다. 만물을 이루는 상징적 원소를 연금술적 용기에 담아 뒤섞는 과정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상응한다. 그것은 원초적 혼돈으로부터 무엇인가 귀중한 것을 추출하는 보편적 과정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정일 뿐 결론이 아니어서, 작품은 언제나 모호한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손정은의 작품은 중첩된 이미지와 내용을 통해 보는 이 마다 다르게 독해하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이 놓여진다. 


송명진

송명진은 2001년 첫 개인전 ‘순간 멈춤-Image Capture’ 이래, 2차원적 평면 위에 3차원적 현실을 담는 회화의 기본 조건들을 탐구해왔다. 작품에 화이트 부분으로 나타나는 중성적인 평면은 밑도 끝도 없는 무한, 또는 가상공간이며, 이 공간은 무엇인가를 담아 전달하는 작은 상자를 벗어나 사건들이 벌어지는 실험적 바탕이 된다. 일견 자연 풍경으로도 보이는 송명진의 그림에는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주어진 사실은 사실로서의 자명성을 갖지 못한다. 회화적 붓자국을 남기지 않는 그래픽 같은 표현방식은 실재의 무게와 질을 휘발시킨다. 풍경의 구성요소를 이루는 잔디 판처럼 생긴 녹색 블록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공백들은 풍경의 표면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표면은 안을 감싸는 표피가 아니라, 뫼비우스 띠같이 그자체가 실체를 이루며 다양하게 변모한다. ‘green home’전에 등장하는 방공호, 정원, 제단 등은 얼기설기 이어진 가설무대 같고, 서사의 주인공들 역시 손가락으로 퇴행한 인간들,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그림의 주조색인 녹색(opaque oxide of chromium)은 색소 명에 내포된 광물적 속성과 달리 유동적이다. 그것들은 녹조류 같은 원시 식물처럼 증식한다. 작품 <Gardening>에 나타나듯, 붉은 단면을 노출한 채 꿈틀거리는 동물적 속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들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체계적으로 분지하는 나무의 모델이 아니라, 뿌리줄기적인 모델이다. 자연의 요소로 암시된 녹색 덩어리와 판들은 대지 또는 그림의 표면에 살짝 얹혀 있으며, 미세한 자극에 출렁대고 떠밀리며 배후의 공백을 들춘다. 작품 속 화이트는 공백이나 허공을 암시하면서 어떤 준거도 무화시킨다. 그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회화에 선점되어 있는 갖가지 좌표계들을 교란한다. 축소모델은 화이트로 나타나는 대양 같은 빈 공간 위에 섬처럼 떠 있다. 화이트는 회화를 비롯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갖가지 상징적 구조들의 토대인 현실계와 비교된다. 송명진의 작품에서 현실은 틀로 고정될 수 없는 구름이나 바다를 닮았다. 무엇이든 흡입하고 또 뱉어낼 수 있는 공백은 형상과 리듬을 생성하는 원동력이다. 녹색 형상은 구름같이 뭉글거린다. 여기에서 재현의 체계는 회화가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체계 중의 하나로 상대화 된다. 그것은 카오스의 바다에 떠있는 질서의 단편에 불과하다. 카오스는 수많은 차이들이 교차되고 연결되는 열린 공간이 된다. 작가가 고안한 요소로 세팅된 화면 속 모든 것이 휩쓸려가고 무너져 내리는 사건이 벌어지는 ‘Fishing on the flat’ 전에서 현실은 그 허약한 지지대를 드러낸다. 우뚝 선 기념비 역시 부드러운 표면으로 와해된다. 표면의 확장으로 생성된 새로운 깊이를 통해 작가는 회화의 입지를 넓힌다.    


유승호

깨알같이 새겨진 문자나 점으로 이루어진 유승호의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은 일단 작품의 표면에서 발견되는 그 엄청난 노동력에 놀란다. 거기에는 농부가 논에 모를 심는 듯한 육체적 노고가 그대로 전해진다. 전업 작가로 작품에만 매달려 열심히 작업하고도 1년에 3점이 나올까 말까한 밀도 높은 작품의 형상을 이루는 글자들이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가벼운 내용들로 채워지는 것은 역설적이다. 작가는 문자로 상징되는 의미의 무거움을 무한 반복을 통해 비워내고, 작품을 자신이 정한 놀이 원칙이 관철되는 장으로 만든다. 표면을 점과 문자로 빼곡히 채워가는 원칙만 분명하고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불확정성이 그의 작품을 단지 노동이 아니라, 예술의 차원에 속하게 한다. 글자는 의태어와 의성어들이 많다. 로켓 발사 때 나오는 ‘슈’, 산골짜기에서 메아리치는 ‘야호’, 슬며시 흘러나오는 웃음 ‘히히히’, 무엇인가 ‘우수수’ 떨어지는 느낌들이 형태를 채운다. 형태소를 이루는 글자들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 중력이 느껴지며, 희박한 공기 속에서 밀도 차이에 의해 서서히 분산되는 듯하다. 그의 작품의 형태소를 이루는 것은 주로 한글이다. 영어나 한문, 숫자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단어는 단지 형식을 꾸미기 위해 동원되는 소재가 아니라, 형태와 내적 관계를 맺고 작품의 내용과도 관련된다. 한글은 표음 문자로, 분해된 이미지와 잘 어울리며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포적 다양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유승호의 작품에는 심오한 의미를 담으려는 심사숙고가 아니라, 탄식처럼, 탄성처럼, 노랫말처럼 일상 속에서 즉흥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한글 문자가 많이 발견된다. 그 밖에 흔히 사용하는 영어 표현과 한글 사이의 동음이의어 말장난도 발견된다. 글자들은 작가가 최소한의 방향성을 설정한 의미와 관련되지만, 문장이 되지는 않는다. 형태소로서의 글자들이 이합집산 할 뿐 분명한 경계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한 실체보다는 사이와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초기부터 드로잉을 중심으로 작업해왔던 작가는 목탄이나 콘테로 하는 드로잉에서 경계가 흩어지는 요소를 발견한다. 유승호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알려진, 글자로 이루어진 산수풍경에서 이러한 경계 소멸은 정점을 이룬다. 화선지에 그어진 먹 선이 퍼지듯이 경계는 모호해 진다. 잉크 성분이 먹인 5mm 이하 굵기의 로트링 펜으로 동양화를 그리는 종이에 그린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수묵화이다. 작가는 ‘형상이나 이미지가 뿌옇거나 흐트러지거나 부유하거나 연약해 보이고, 그냥 있다가도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화사한 바탕색에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추상화는 시각성 보다는 청각성이 두드러진다. 그의 작품에 두드러진 문자성(literacy)은 쓰기와 그리기를 일치시키는 근대적 스타일이 아니라, 말하기와 덧붙이기라는 방식, 즉 구술성(orality)이 특징적이다. 

출전; 100.art.kr(문화관광부,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