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호
자연에 최소한의 것만을 추가하여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이명호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최종 장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사진-행위’라고 명명하면서 과정을 강조한다. 그것은 텅 빈 캔버스를 피사체에 개입시켜서 나무를 잘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나무 뒤에 드리워진 캔버스는 실재를 비현실화하면서 시각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던 재현을 정면으로 다룬다. 처음 시작은 나무였지만, 바다처럼 보이는 사막, 그리고 얼마의 세월을 새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막의 바위, 심지어는 지구까지도 캔버스 앞에 놓아 보려는 야망을 가진다. 수백분의 일초 이내의 순간에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사진의 메커니즘은 ‘사진-행위’를 통해 엄청난 시공간의 스케일로 확장된다. 재현은 행위로 옮겨짐으로서, 현실과 환영의 경계는 매 순간 갱신된다. 이명호가 ‘나무’ 시리즈를 시작한 2000년대 중반, 한국의 미술 시장을 석권한 경향은 그림을 사진처럼 그리는 것이었는데, 그의 ‘사진-행위’는 이에 역행하여 사진을 회화처럼 제작한다. 그러나 하얀 캔버스 앞에 놓인 나무라는 단순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은 단순하지만은 않다. 어떤 대상이나 환경을 연출하는 과정은 매우 많은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는 대형 프로젝트이다. 그에 비하면 최종적인 작품의 규모는 크지 않다.
작품 속 평범한 참조대상과 바탕 면처럼, 이명호의 작품은 무(無)에 가까운 절제가 특징이다. 포토샵으로 최소한의 보정을 거친 산물은 마술적이고 모호하다. 세필로 그린 그림인지, 천에다 나무 이미지를 전사한 것인지, 분재를 세워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에게 작품은 행위의 흔적이나 실마리일 뿐, 작가의 미학적 비전을 시각화시키는 장이 아니다. 그에게 작가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들추고 환기시키는 자일뿐이다. 나무나 돌, 사막 같은 무명의 존재들에 대한 관심,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텅 비워 놓은 듯한 장면들에는 잊혀 진 가치들을 복권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여기에서 사진은 ‘시공간에 필름을 잠깐 담그는’ 시적인 매개자인 셈이다. 근래에 작가는 사막과 초원 지대를 장기간 돌아다니며 ‘바다’ 시리즈를 제작했다. 수백 명이 사막 저편에서 긴 캔버스를 잡고 있고 2km 뒤에서 이 장관을 사진으로 담는다. 사막의 굴곡진 표면은 펼쳐진 캔버스에 부분적으로 가려져 수평선 위에 아스라이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작가는 원래 바다였던 사막, 물이 이상이자 희망이기도 한 이 장소를 반전과 역설의 무대로 바꾼다. ‘나무’ 시리즈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나무의 상징주의가 내재되어 있다면, ‘바다’ 시리즈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삶과 죽음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속세의 삶을 상대화한다.
이형구
오랫동안 조각 예술의 중심이었던 인간은 이형구의 작품에서 변형의 출발점이 된다. 인간과 기계적 장치의 결합, 인간과 동물의 형태 및 기능의 혼합은 2004년 첫 개인전 이래 국내외의 전시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사이보그와 괴물 등이 등장하는 공간은 통상적인 미술전시장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무균 실험실이나 수술실, 자연사 박물관을 떠오르게 하는 건조한 공간에서 정교하게 재현된 괴생물체들이 사실이 아니라, 허구의 산물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허구가 사실임직함의 장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은 미술로부터 멀리 벗어나려는 작가를 예술의 핵심에 다시 위치시킨다. 만화를 비롯해 허구가 생산되는 과정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관찰로부터 온다. 이형구는 사실이 사실로 성립하기 위한 다양한 조건들에 주목하고, 그것이 성립하기 위한 구체적 기제들을 파고든다. 그것은 허구가 사실로 서기 위한 조건들의 탐구이다. 가령, 만화 캐릭터처럼 의인화된 동물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의 근골격계는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가. 요즘 만들고 있는 용의 경우, 이 상상의 동물을 구성하는 사슴, 공룡, 박쥐같은 여러 동물의 해부학적 형태를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 생물체의 뼈 조각 하나하나를 만들어 조립하고, 그럴싸한 라틴어 학명까지 붙이는 행위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예술가와 과학 기술자 사이의 어딘가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변형의 출발은 인간, 특히 자신이다. 그는 스스로를 실험대에 세운다. 보철기구로 인간을 변형시키는 작품들은 <Animatus> 시리즈와 비교해 본다면, 자명하다고 간주된 사실에 내재된 허구의 몫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에서 세계의 척도로서의 인간은 그 중심이 흔들린다. 인간은 헬멧을 비롯한 다양한 보철기구에 의해 이리저리 변형된다. 입체 작품을 위한 드로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바꿀 수 있는 기구들과 접속된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생식기를 보호하거나 손가락을 2-3개로 축약하는 기구들도 보이는데, 그것은 환경오염이나 스트레스에 의해 생식능력이 떨어지거나 컴퓨터 단말기에 앞에서 손가락만으로 현실을 조작하는 인간상이 예견된다. 그것은 생각하고 노동하는 전통적 인간의 모습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퇴화이기도 하고 또 다른 진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형구의 작품은 진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이 공진화하면서 합체되는 과정이다. 그것들은 괴상해 보이지만 다양한 장치들에 이미 접속한 상태로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2010년 ‘eye trace’전에 나온, 어류나 곤충의 시선을 체험하게 한 기구들은 동물을 비롯한 타자들을 전유하고 착취하기에 급급했던 인간중심주의적 시선을 해체하고, 기존의 휴머니즘을 대신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발명을 위한 조건을 탐사한다.
정승
정승에게 한번 끼우면 자르지 않는 이상 뺄 수 없는 케이블 타이는 기계 문명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생산력의 향상을 위해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는 진보 및 역사주의는 부조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선적 진화론에 내재된 시간의 불가역성은 폭력성을 내포한다. 그의 작품에서 자동차나 복사기 같은 매끈한 기계는 케이블 타이에 뒤덮여 야만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인간과 함께 진화하는 기계는 인간의 모습을 비추어준다. 기계와 인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욕망하는 기계’가 된다. 두 대의 선풍기가 아무 이유 없이 붙어서 뒤틀리는 작품에서 작가는 ‘진화를 위한 몸부림’을 본다. 기능들로 분화되고 다시 융합되는 과정은 이익을 위한 자본의 진화이다. 그의 초기 작업에서 최첨단 과학기술의 총아인 자동차는 완전히 뜯겨진다. 그 안의 모든 것을 비우고 틀만 남기고 찢어서 벌려 놓은 모습은 괴기스런 거미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승인받기 위해 학교의 수위부터 시장에 이르는 복잡한 절차를 통과해야 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궁극적 목적이 불분명한 채 자기 확대만 반복하는 관료주의의 실체를 발견하게 한다. 수많은 멀티 탭을 이어 붙여 전기기구가 작동하게 만든 작품 <멀티 콤플렉스>는 구조가 무의미하게 뻗어 나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이미 기능주의를 초과하고 있으며, 시스템 그 자체의 생존만을 위해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바닥에 잔뜩 쌓인 인쇄물을 끊임없이 흡입하고 내뱉는 로봇 청소기에서 작가는 ‘기계의 진화’를 본다. 소비와 생산은 쓰레기에서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무한 반복구조와 다를 바 없다. 여기에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내재해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는 불분명하다. 인간자체가 구조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머리와 팔이 잘려진 사람이 탄 자전거 200대가 트랙을 도는 작품 <서클링 콤플렉스>는 집단으로 정해진 궤도를 돌고 있는 현대인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가 이 장난감을 발견한 것은 지하철에서 어딘가 바삐 가는 도중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장난감은 보이지 않는 구조가 강제하는 현대적 삶으로 다가왔다. 원은 반복된 구조를 상징하는 형태로 그의 작품에 종종 나타난다. 최근 작품에서 인형과 결합한 둥근 형광등은 만다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작품에서 현대사회의 구조, 기계적 구조, 종교적 구조, 예술적 구조는 중첩된다. 구조들은 연동되면서 인간의 몸은 물론,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권력을 생산하는 것이다. 2011년에 전시된 <Spectacleless Complex>는 일본에 원본이 있는 중국제 짝퉁 인형 2000개를 경기장의 관중처럼 배열했다. 그것들은 주변의 빛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살아있는 듯 흔들거리다가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진다. 스펙터클 사회에서 이러한 추락만이 볼만한 사건이 된다. 정승에게 전형적인 현대인은 클론이며, 일정기간 동안 입력된 행동을 반복하다 우연적으로 사라지는 소모품이다.
정재철
정재철의 작품은 전시를 통해서 종합적으로 보여 지기는 하지만, 전시장에 모인 사진이나 영상, 오브제, 설치, 조각 등은 그자체로 주목되는 형식적인 완결성을 갖춘 것이기 보다는 유목의 편린들일 뿐이다. 그는 세계 곳곳, 특히 동서 문화의 교역로였던 실크로드 상의 지역들에 펼쳐진 삶을 예술로 보고, 이러한 삶-예술의 복합체를 탐사하는데 몰두한다. 그는 동서의 문명권과 국경을 수시로 넘나든다. 여행을 통해 각지에서 체험하고 본 현상들은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동일자의 시점이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데 반해, 여행과 그 산물인 작품은 차이들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의 작품은 공간적 이동과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삶에서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서 문명은 교환과 혼성, 변이의 과정임이 드러난다. 최근에 김종영 미술관에서 열린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7년 간 18개국을 거쳐 온 대장정이 오롯이 담겨있다. 프로젝트의 주된 과정은 한국에서 수거한 폐현수막을 각국의 현지인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의 삶에 새롭게 적용된 면을 확인하는 것이다. 대량생산과 소비의 주기 속에서 교환의 매개체인 현수막은 현대화의 속도가 다른 지역들에서 기발한 용도로 전용되곤 한다. 소비를 추동하는 기호가 새겨진 평면은 자연과 문화가 하나인 사회에서 물건으로 사용된다.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추상적 교환가치는 구체적 사용가치를 회복한다.
더 나아가 그것들은 새로이 맥락화 된 축제적 소비 속에서 상징적 가치를 획득한다.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그 편린들 역시 진기하고 흥미로운 면이 있다. 거기에는 단지 한번 스쳐지나간 여행자의 시점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세목들이 있다. 동시에 작가는 어디에나 반복되는 일상에서 영원을 발견한다. 이러한 발견은 상품이라는 코드가 지배하는 현대의 보편성을 상대화시킨다. 그는 현대사회의 중심적 가치와 체계로부터 이탈하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해법을 도모한다. 길을 찾아가는 기준이 되는 지도를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정재철이 새로 만든 지도는 미지의 대륙과 연결되어 있으며, 접속의 지점을 무한대로 늘려 나간다. 그것은 기호와 사물에 대한 용법의 다양성과 같은 차원이다. 이로서 작품은 열린 형식을 갖춘다. 여기에서 작가의 역할은 수용자가 여러 방식으로 사물, 또는 작품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는 제안자, 관찰자, 기록자의 역할을 맡는다. 작품은 새로운 상황 속에서의 변이를 발견하는 과정이지, 새로움에의 강박 관념 속에서 인위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유목민으로서의 작가는 매개자의 역할을 자임한다. 그가 만난 수많은 유목민들은 정초가 되는 기념비를 세우지 않는다. 최소한의 것만을 소유한다. 그리고 여로에서 만난 타자들을 환대한다. 유목은 삶의 태도이기도 한 것이다.
정재호
최근 플라토(Plateau)에서의 전시를 비롯하여, 토탈미술관에서의 ‘신진기예’전과 갤러리비원에 설치된 정재호의 대형 벽면 작품은 회화, 시트지, 디지털 프린트 등이 총동원되어 도시의 기호들을 쇄도하게 함으로서 관객에게 강렬한 경험을 준다. 플라토의 전시처럼 공간 자체를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갤러리 비원의 전시처럼 개인적인 사건을 다루기도 한다. 그 무엇이든 공간공포증으로 비롯된 듯한 빽빽한 도상들과 그것들의 잠재적 이동성이 두드러진다. 작품의 공간이 도시에서 비롯된 다양한 도상들로 채워진다면, 시간은 기억과 무의식이라는 비선형적 경로를 따른다. 가령 작품 <First Accident>는 아주 어릴 때 겪었던 계단에서의 추락 사고를 디지털 프린트의 꼴라주와 데꼴라주로 어지럽게 표현한다. 그것은 구체적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야기한 충격 그자체를 표현한다. 벽화 뿐 아니라, 유화로 그려진 작은 작품들 역시 추상과 구상의 경계가 소멸된다. 추상/구상은 미학적으로 꼭 대립 항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차이에서 작가는 유희한다. 그의 대형 벽화나 캔버스 그림은 모두 주변 환경이나 경험으로 부터 비롯된 파편화된 기호들이 속도감 있게 다가오게 한다. 파편화된 기호들은 안정적인 서사를 붕괴시킨다. 그것은 모든 것들이 명료한 의미를 잃은 채 스펙터클하게 다가오는 도시적 경험이자 모호한 기억의 상태를 말한다.
정재호의 작품은 서사 보다는, 보고 느끼는 경험에 의존하는 조형언어의 원초적 특징에 충실하다. 특히 대형벽화는 환경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작은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역동적인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장소특정적인 작업이 결과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더 큰 만족감을 준다고 말한다. 동시에 부담도 된다. 이러한 작업들은 작품의 상품성을 드높이는 도상의 캐릭터 화나 방법의 매뉴얼 화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보다는 도시에 집중되어 있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간이 부재하며, 파편적 도상들이라는 공통점은 발견된다. 도시의 풍경이 아닌, 도시적 체험을 야기하는 그의 작품에서 각이 살아있는 파편적 도상들은 자극과 긴장감을 높인다. 완전한 추상도 아닌 화면에는 알아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도시 중에서도 골목길 같은 주변화 된 장소들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작품의 직간접적인 재료가 되는 사진 역시 멋진 광경보다는 빠르게 다가오고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완전한 것이 깨져 있다기보다는 기원이 다른 것들이 합쳐지는 복잡한 도상들은 화면 안에서 수직, 수평적으로 공간화 되면서 시각적인 강도를 높여간다. 점차 디지털화 되어가는 환경은 시공간을 더욱 분절시키기 때문에, 공간적 지각과 시간적 기억은 유사한 과정을 따른다. 작품의 생산과 수용 과정은 어느 하나로 고정되기 보다는, 쏟아지는 기표들 속에서 무언가를 고르는 문제가 된다.
최두수
1997년 휴전선 근처에서 군복무를 할 때 만든 작품 <no mans land>는 조각난 현실과 그것을 기워 잇는 사랑, 이데올로기, 자본, 기술 등을 암시하며, 이후 최두수의 작품을 특징짓는 해체와 종합의 방식을 보여준다. 망치에 의해 산산이 조각난 자연석들이 얼음으로 겨우 붙어있는 이 작품은 예술 및 예술가의 존재조건을 포함하여 실재의 취약성을 표현한다. 영국에 유학 가서 만든 작품 <trace airplane>은 창문으로 보이는 비행기의 궤적을 유리창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 역시 잘려진 풍경이다. 그에게 해체 또는 분열된 현실은 작업의 출발이자 귀결이다. 분열 또는 해체는 소외도 해방도 아닌, 작가가 주시할만한 있는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2001년 한국에 돌아와서 연 ‘motel PRAdA’전은 넝마주이처럼 길에서 수집한 고물들을 잔뜩 모아서 공간 전체를 짜깁기한 것으로, 모텔과 명품 백으로 상징되는 천박한 소비 도시 서울의 풍경을 재구성한다. 하트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식등은 원본의 흔적이 지워지고 거기에서 한 술 더 뜨기 전략이 관철된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풍경을 상징한다. 그것은 광고판 구조로 만들어 지거나 장소 특정적으로 설치되며, 이후 평면 모니터를 비롯해 급속히 확산된 미디어 사회의 인터페이스에도 이식된다. 하트등은 일련의 조형적 단위 구조가 되어 조합되면서, 남성 중심적 여흥문화나 상업주의에 물든 교회, 무너진 현실을 대신하여 새로운 실재로 군림하는 광고판 등으로 변주된다.
2002년 ‘크고 밝은 노란 태양’전은 납작한 인터페이스가 온 세상을 태양처럼 비춘다. 여기에서 작가는 현대적 삶을 그 태양 아래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로 간주한다. 미디어라는 인공 태양 아래 전개되는 드라마의 무대는 이런저런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총체적 환경이 된다. 그는 기획자로도 활동했는데, 2002년 <the show>를 비롯한 기획전은 자신의 작품처럼 장르 파괴적이며, 공존과 충돌의 장이다. 여기에서 다양한 기원을 가진 기호들은 합의나 조정, 화해를 거치지 않은 채 병렬되고, 그자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경험된다. 2007년 작품 <no mans land love forever>는 원색 화보로 채워진 잡지를 칼, 또는 톱으로 잘라 만든 풍경으로, 스펙터클의 사회를 표현한다. 두터운 잡지 페이지를 채우는 인공적 내용물은 자연(풍경)이나 물질(잘린 단면이 드러난 종이 덩어리)로 돌아간다. 2010년에 열린 ‘로맨스 랜드’는 스펙터클 사회를 특징짓는 과장된 부피와 번쩍이는 표면, 그리고 부글거리는 거품을 빼고, 현실의 단촐 한 모습을 직시한다. 맨바닥에서 식사를 하는 노점상들을 위한 탁자 등이 선보였다. 전시를 만드는데 꼭 필요하지만 보여 지지 않고 사라지는 물품들도 꺼내 놓았다. 그는 아직도 실험중이지만, 이제 실험 대상은 작가가 처한 절박한 현실을 포함한 날 것들이다.
하태범
하얀 먼지나 눈이 내려앉은 듯한 백색 풍경들은 언뜻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유적지, 가령 낭만적 폐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파키스탄, 노르웨이, 뉴욕 등지에서 일어난 테러, 용산 참사,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대부분 피바람이 몰아친 재난의 현장이다. 거기에는 서울의 쪽방 촌, 창신동 재개발 지역 같이 곧 사라질 장소, 요컨대 일상화된 재난 또는 폭력 현장도 포함된다. 반파, 또는 완파되어 아수라장이 된 현장은 신문이나 인터넷 등 미디어에 실린, 사건 사고를 참조했다. 작품 소재는 대부분 실제 일어난 사건사고 이미지이지만, 작가가 직접 촬영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건사고를 보는 관점이지, 그 자체는 아니다. 일어난 사건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없는 <imagination> 시리즈는 사건 현장의 재현에 주력한 <actuality> 시리즈와 달리, 작가가 임의로 사건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부엌이나 사무실 등 사건이 일어남직한, 고요하지만 긴장감 도는 생활의 무대이다. 자세히 봐야 장면 한구석이 흐트러진 것을 알아 챌 수 있는 이 시리즈는 폭력의 편재화(일상화)를 말한다. 사건은 그것이 공적으로 인지되건 아니건 그자체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집단의 이해관계와 권력관계가 충돌하는 보도 사진처럼, 관점과 해석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바뀌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보도사진이라는 실제 사건의 2차원적 해석을 3차원 축소 모형으로 재현하고, 이것을 다시 사진으로 찍는 과정을 거침으로서 차원의 변주가 일어난다.
그것은 포토샵처럼 단지 평면에서 평면으로 평행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최종 산물은 전체가 같은 톤으로 조율 된 하얀 풍경이 담긴 디지털 프린트지만, 작업은 오랜 인내와 기술을 요구하는 수공적 과정을 거친다. 이 변주에서 원본 사진의 주인공들이 제거됨으로서 사건의 무대가 전면에 드러난다. 석고상같이 하얀 표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을 질감과 음영을 강조한다. 그 과정이 너무 치밀하여, 작가는 사건의 핵심 의미를 괄호치고 세부적 표면에 탐닉하는 심미적 태도를 노출하기도 한다. 시체 또는 치명적 부상자들이 대부분일 주인공의 제거는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사건 현장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전면화 되지 않은 사건의 무의식적 차원이 드러난다. 크기와 색의 변화, 주인공의 제거라는 축소모델화 과정에서 작가는 대중의 무감각을 강조한다. A4 용지로 무기를 재현하거나 무용수의 춤동작에 짓이겨지는 종이 모형 도시가 나오는 영상설치 작품은 A4 용지처럼 가볍게 소비되는 사건을 언급한다. 여기에서 무차별적 파괴는 게임이나 댄스와 다를 바 없다. 세계가 세계화 과정으로 축소됨으로서 모순과 갈등이 빈번히 폭발하는 현대에, 대중들은 분명 사회적 원인을 가지고 있는 사건들을 수많은 스펙터클의 하나로 무심하게 소비한다. 미디어에 의한 사건의 왜곡과 스펙터클 소비자의 방관자적 시각은 폭력을 재생산하게 된다.
출전; 100.art.kr(문화관광부,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