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혜림은 소설을 쓴다. 이를테면 <교환X로서의 세계>, <중간 스토리>, <운석 사냥꾼, 검은 비행, 모든 땅> 같은. 이 소설들은 장소 특정적이다. <교환X로서의 세계>는 전시를 위한 주택가의 한 가정집에 붙어있던 영화 포스터들에게서 착상된 것이고, <운석 사냥꾼, 검은 비행, 모든 땅>은 전시공간에 느닷없이 박혀 있듯, 원래 있던 큰 바위로부터 최초의 착상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중간 스토리>는 인터넷과 인터넷의 매체적인 특수성 그리고 인터페이스를 암시하는 다른 텍스트에서 착상된 것이다.
최초의 착상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작가에게 특정 장소와 착상과의 의미연관은 결정적이기보다는 느슨하다. 장소 특정적이라고 해서 특정장소를 재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 착상의 계기들, 이를테면 영화 포스터나 뜬금없이 박혀있는 바위에 천착하지도 부연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여하튼 영화 포스터와 영화 포스터를 포함하고 있는 집 내부의 분위기로부터, 그리고 바위와 바위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적 조건이며 환경으로부터 처음의 착상을 얻은 것이므로 장소 특정성이 없이 작가의 소설은 시작되지도 진행되지도 않는다(작가에게 장소특정성은 단순히 실제 하는 장소를 의미하기보다는 가상현실 내지 가상실제를 포함해서 의미가 정박된 혹은 의미를 정박시켜주는 현실적 근거이며 토대를 아우른다). 장소 특정성은 말하자면 소설이 시작되고 진행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의 소설이며 작업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획득하게 해주는, 혹은 여하한 경우에도 현실로부터 시작하게 해주는, 혹은 현실과의 희미한 의미연관이며 연결고리를 획득하게 해주는 현실적인 토대이고 근거이며 구실이 된다. 현실로부터 발견되고 발굴되고 캐내진 착상의 씨앗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현실과의 의미연관을 느슨하고 희미하게나마 지속시켜주는, 현실을 숙주 삼아 현실에 기생하게 해주는 착상의 계기라고나 할까.

이처럼 작가에게 현실은, 이를테면 감각적 현실과 상상적 현실, 가시적 현실과 비가시적 현실, 실제현실과 가상현실,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현실(현실을 논리와 개념으로 환원한 것이므로 현실이라기보다는 현실인식) 모두를 포함하는 현실의 지평 전체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진행하기 위한 착상의 계기이며 씨앗 역할을 한다. 이처럼 착상을 제공했다고 해서 작가의 이야기가 그 현실을 재현하고 부연하고 천착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실은 말 그대로 최초의 착상을 위한 씨앗에 지나지 않으며, 일단 착상을 얻은 연후에는 다른 현실의 계기들, 이를테면 감각적이고 상상적이고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이고 실제적이고 가상적이고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현실의 계기들이 아무런 인과성도 논리적 개연성도 없이(혹은 임의로 부여된 인과성과 자의적으로 설정된 논리에 의해) 그 현실에 덧붙여지고 부풀려지고 확장되고 수축되고 도약하고 되돌아온다. 그렇게 시작도 끝도 없는, 아무런 곳에서나 시작된(그럼에도 여하튼 현실에서 시작된) 것인 만큼 모든 끝을 임의로 만들어버리는 끝에서조차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렇게 다만 마치 하이퍼텍스트와도 같은 혹은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하게 열려 있어서 그 자체로는 결코 닫을 수 없는 인터텍스트와도 같은, 그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끝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잠정적이고 유보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다른 이야기를 불러들이면서 마구 생성하는(작가의 표현으로는 창발) 열린 이야기 구조를 만든다.
그러므로 작가의 소설도 그 소설을 형상으로 옮긴 조형도 결정적이기보다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잠정적이고 유보적으로 보인다(심지어 소설과 조형의 의미연관이 재현이나 번역인지도 의심스럽다). 도무지 완성된 것 같지가 않고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그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잠정적이고 유보적인 어떤 지점에서 멈춰선 것처럼 보일 뿐. 결정적인 것이 아닌 만큼 느슨한 이야기 구조를 저마다의 해석으로 채워 넣어 간섭하고 개입하고 왜곡하고 확장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작가의 이야기를 저마다의 이야기로 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는 소설과 조형과 제목마저 최소한의 의미연관으로만 겨우 연결돼 있어서 그 느슨한 의미와 의미, 지점과 지점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게 해준다. 작가의 기획은 어쩌면 이처럼 정박하는 의식에 유영하는 의식을 대질시키고, 결정적인 의미에 중의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대면시키고, 정체성의 논리에 차이의 논리를 들이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제도의 관성이며 언어의 용법을 내파 하는 일이며 동일성의 사유를 비동일성의 실천논리로 흔들어놓는 일이며 재현과 서사의 새판을 짜는 일일지도 모른다.
재현과 서사의 새판을 짠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도된 의식의 흐름기법과 매직리얼리즘,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와 자동기술법, 사물현상에 맞춰진 건조한 문체가 현실에 균열을 내는 혹은 현실에 이미 나 있던 균열에 직면하게 해주는 누보로망에서 어느 정도 예시된 바 있다. 그 예시에 의하면 사물현상치고 무의미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사물현상은 계시적이다. 모든 사물현상은 하나의 결정적인 의미로 정박되기보다는 다른 의미로 이행하기 위한 잠정적이고 유보적인 의미를 의미한다. 마들렌 과자 향은 아무런 매개 없이 혹은 임의적일지도 모를 최소한의 매개만으로 과거 속으로 도약하게 해주고(과거 속으로 도약하게 해준 기억이란 믿을 만하고 결정적인 것인가), 우산대와 재봉틀이 수술대 위에서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내가 과거를 사는 나와 만난다.
현실이라면 모를까 의식 속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현실 엄밀하게는 현실인식이란 결국 의식이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현실인식이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만 논리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며 상식이란 다만 대중의 가치관을 반영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현실 자체와 현실에 대한 개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고 그 사이로 무수한 현실인식이 가능할 수 있다. 다만 그 현실인식들 중 제도의 인준을 받고 대중의 인정을 받은 것들만이 상식과 합리와 이성과 논리의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여하튼 현실로부터 시작해 재차 현실로 되돌려지는 일, 작가의 유별난 현실인식(어쩌면 항상적으로 생성중인 현실인식) 속에서 상식과 합리로 통하는 현실인식이 수정되고 개조되는 일,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론 현실인식을 확장하고 팽창하는 일이 지금 작가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조형으로 번안된 형식으로 제안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을 낱낱이 해부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다(적어도 필자에겐 그렇게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과 작업이 갖는 혹은 가질 수 있는 의미연관을 그것도 느슨한 채로라면 모를까 결정적인 경우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다. 최소한의 논리적 개연성만으로 하나의 사물현상에서 다른 사물현상으로 자유자재로 이행하고 최소한의 연관만으로 하나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배열과 재배열, 배치와 재배치의 문제이다.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고, 연관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작가의 의미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유자재로 이행한다. 적어도 그런 움직임과 이행을 잠재하고 있다. 이처럼 움직이고 이행하는 의미들을 도구로 작가가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어쩌면 하고 있는 말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 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할 것 같다(어쩌면 이 글 속에서 미진하나마 이야기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