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부터, 아모르 파티 혹은 운명애. 니체는 쥐가 궁지에 몰리면 자기 내면으로 숨는다고 했다. 자기 내면 말고 따로 숨을 데도 없을 것이다. 얼핏 보면 이 말은 수동적으로 보이고 불가항력으로 보이고 불가피해 보인다. 그런데 의외로 니체는 이 말에서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메시지를 끌어낸다. 쥐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자기 내면에도 직면해 있다. 현실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내면을 선택할 것인가(물론 여기서 자기 내면은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여하튼). 선택의 귀로에 서 있고 운명의 귀로에 서 있다. 흔히 운명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태도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니체는 현실과 함께 또 다른 현실이랄 수 있는, 어쩌면 피상적 현실이 아닌 진정한 현실일지도 모를 자기 내면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한다.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아 자기 내면에 숨어들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내면에서 진정한 자기에 눈 뜨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궁지에 내몰아 자기에 눈 뜬다는 역설이다. 이 지극한 아이러니야말로 한기창이 이번 전시의 주제로 내세운, 니체에게서 인용해온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운명애는 진정한 현실인식을 전제로 할 때 그 의미가 진정해진다(현상학적 에포케와 낯설게 하기 그리고 무의식이 이런 현실인식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목으로부터, 지혜로운 죽음.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고독한 이유가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 삶과 죽음은 연속돼 있었는데(이를테면 제의와 무속의 시대에 삶과 죽음의 연속성은 자연스런 사실로 받아들여졌었다), 문명이 삶과 죽음을 불연속적으로 떼놓았다고 한다. 삶의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적인 이유와 목적으로 죽음이 삶의 영역으로부터 잉여의 영역으로 추방되고 배제된 것(잉여는 비생산적이고 반사회적인 영역으로서, 문명 자체에 의해 생산된 것). 여하튼 그렇게 문명의 수혜를 입은 현생인류는 삶을 예찬하고 죽음을 멀리하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죽음은 최고의 금기며 터부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고독을 끝장낼 수 있는 방법으로서 삶과 죽음과의 연속성을 다시 회복하고 복원하는 일이 과제로서 주어진다(예술의 실천논리는 일정하게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서 주도권을 쥐는 것은 삶보다는 죽음이다. 삶이 관성적이라면 죽음은 그 관성을 깬다는 점에서 창조적이다. 죽음을 매개로 해서만 관성적인 삶의 고리가 끊어진다. 죽음으로 인해 매순간 거듭나는 삶이 가능해진다. 거듭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죽는다는 것이며, 죽음으로써 다시 산다는 것이다. 한기창이 이번 전시를 위해 도입한 지혜로운 죽음이란 제목은 이처럼 매순간 삶을 갱신하고 재생하는 죽음을, 그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주술적이고 원초적인 죽음의 계기를 떠올리게 한다. 
지혜로운 죽음이란 이처럼 매순간 삶을 갱신하고 재생하는 계기를 의미하며, 이로써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그 계기는 계속해서 돌아가는 휠체어 바퀴로 상징된다. 공교롭게도 바퀴는 진즉에 삶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했고, 윤회설을 상징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생과 사가 순환하고 생성이 소멸로 변환되는 영상작업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를테면 화면에서 신체 내부 장기는 자연의 모티브로 혼성되고 변환되는 일종의 생태풍경을 연출한다. 신체 장기가 열어 보이는 풍경이 자연 풍경에 오버랩 되고, 소우주가 대우주에 포개진다. 이처럼 오버랩 되고 포개진 풍경은 닮은꼴에 연유하는데, 양수가 바다를 연상시키고, 세포 덩어리가 야트막한 구릉을 떠올리게 한다(인간의 몸은 자연과 같다거나, 인체를 이루는 세포조직의 형상이 자연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거나, 인체를 생명이 순환하는 소우주로 본다는 작가의 고백이 이 작업이며 주제의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종의 혼성풍경이 연출되는 것인데, 작가는 진즉에 이 주제의 풍경을 제안한 바 있다. 작가의 작업이 대개 삶과 죽음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지만, 이런 유형학 내지 경향성에 비해 그 표현의 영역과 범주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의식의 지평으로까지 확장된, 시트지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이다. 지금껏 스틸화면으로 구현된 혼성풍경의 한계를 동영상매체의 구동력으로 넘어선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이로써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풍경, 순환하고 변태되는 풍경, 비결정적인 풍경으로 확대 재생산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뢴트겐 정원과 수족관. 한기창은 엑스레이 필름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근작에서 작업이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고는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핵심 소재 내지 형식은 여전히 엑스레이 필름이 될 것이다. 이 예사롭지 않은 소재는 당연히 어떤 연고가 있을 것이고, 그 연고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연유한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작가는 자연스레 엑스레이 필름을 접하게 되고, 이로부터 소재적인 가능성을 생각해낸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 전력을 염두에 두고 엑스레이 필름을 보면 한국화와의 일정한 닮은꼴이 유추된다. 한지처럼 엑스레이 필름도 투명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더욱이 필름에 찍힌 피사체는 무슨 먹그림 같다. 작가는 이 필름을 이용해 일종의 꽃밭으로, 정원으로 재구성해낸다. 뢴트겐 정원으로 이름 붙인 이 작업의 핵심논리가 바로 아이러니며 역설이다. 멀리서 보면 이면에서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빛과 더불어 꽤나 장식적인 꽃밭이며 정원이 보이지만, 정작 그 꽃밭이며 정원을 이루고 있는 소립자는 엑스레이 필름 곧 일종의 뼈 그림이다. 삶과 죽음이 충돌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 한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회면에 중첩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혼성풍경으로 볼 수가 있고, 주지하다시피 이후 혼성풍경이란 주제는 시트지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작업을 낳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엑스레이 필름에 담긴 익명의 주검들이며 그 흔적들을 이용해 일종의 수족관을 만들었다. 뢴트겐 정원과 마찬가지로 멀리서 보면 흐늘거리는 해초 사이로 물고기가 헤엄쳐가는 수족관이지만, 정작 그 수족관을 만드는 입자는 뼈 그림이다. 수족관에는 물이 담겨져 있다(실제로는 담겨져 있지 않지만, 의미론적으로 그렇게 유추된다). 그 물은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류돼 흐르는 생명수며 양수에 해당하고, 차이 나는 모든 계기들을 자기 속에 포용해 들이는, 그럼으로써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회복하고 복원한 우주적 바다를 상징한다. 노자는 인간의 비극이 지식 곧 차이와 구분에서 온다고 했다. 차이를 지워 노자의 유토피아를 실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자체 자족적이고 완전한 세계인 상상계(자크 라캉)를, 엄마와 아기가 분리되기 전의 세계인 코라(chora,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실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러면 더 이상의 문제는 없는 것인가. 우리는 과연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배운 것인가. 차이를 지운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지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가. 지식은 지식의 대상과 일치하는가. 혹 지식은 지식의 대상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은 아닌가. 지식 없이 대상 자체만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인가. 노자는 천지가 참을성이 없어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했고, 존 그레이는 호모 라피엔스 곧 하찮은 인간을 들어 휴머니즘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라고 주문한다. 
작가의 그림에는 나비가 등장하고, 그 나비가 장자몽을 떠올리게 한다. 장자의 꿈에 나타난 나비와 나비의 꿈속에 출현한 장자는 경계를 허물기 위해 온 전사다. 지식으로 분화되기 전의 대상 자체(세계 자체?)를 제안하기 위해 온 전사다. 나비의 화려한 자태가 삶을 떠올리게 하고, 나비의 나풀거리는 날갯짓이 무슨 죽음의 전령 같다. 작가는 왜 해골(뼈 그림도 마찬가지지만)을 이야기하면서 나비를 끌어들였을까. 양가성? 양면성? 야누스? 죽음을 매개로 삶을 이야기하는 한기창의 논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재차 죽음 앞에 서게 만든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진 것인가? 아님, 다른 원점인가? 삶도 거대담론이고 죽음도 거대담론이다. 거대담론은 때로 사람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