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기 좋은 방 혹은 꿈꾸기 좋은 방. 호해란의 조각에는 곧잘 사각의 틀이 변형되고 변주된 형태가 등장한다. 집이며 방이다. 집도 그렇지만 방 역시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주체에게 집은 안온하지만, 타자에게 집은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잠재적인 타자이기도 하다. 이로써 집이며 방이 갖는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주체가 자기 정체성으로 내재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은 주체를 보호하면서 고립시킨다. 나는 현실도피를 꿈꾸면서 동시에 현실로부터 잊힐까 두렵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지만 여차하면 재차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도피하고 그 전제만큼만 감행한다. 현실로부터 완전히 도피하지도 못하고 현실에 완전히 정박하지도 못한다. 그 사이를 가름하는 경계에 집이 있다. 그래서 집은 불안하고 집으로 상징되는 주체는 불안정하다. 모든 경계 위에 있는 것들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불안과 불안정은 부조리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우연한 것들의 필연이다. 정박하지 못한 것들, 표류하는 것들, 부유하는 것들, 겉도는 것들, 시간처럼 흐르는 것들의 운명이며 숙명이다. 

이처럼 호해란이 조형해놓고 있는 집이며 방의 모티브는 작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고, 동시에 존재 일반의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조건을 표상한다. 그 방에는 흔히 사람이나 사물이 들어앉아 있는데, 이를테면 개와 사다리가, 구름과 나비가 사람과 함께 들어와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구름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이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분방한 생리가, 그리고 나비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으로 하늘거리는 날갯짓이 작가의 꿈을 닮았다. 그리고 사다리는 물론 이상을 상징할 터이다. 그런가하면 곱게 접은 저고리와 가지런한 실패가 작가에게까지 연이어진 여성성을 암시한다. 이처럼 작가는 집이며 방안에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상징을 풀어놓는다. 그래서 쉽게 공감을 얻는다. 

여기에 작가는 고유의 서정성을 덧입혀 그 공감에 깊이를 더하는데, 그 서정성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전통적인 조각의 한 지류에 가닿는 것 같다. 이를테면 무덤가를 장식하는 석물들이며 돌하르방과 동자승 같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그 표면에 이끼가 말라죽은 이 석물들은 대개 그 형태가 세세하지가 않다. 대상을 두루뭉술하게만 재현해놓고 있는 것인데도 대상을 얼추 닮았고 많이 닮았다. 얼추 닮은 것은 외면적 닮은꼴이고 많이 닮은 것은 내면적 닮은꼴이다. 전통적인 조각가들은 말하자면 존재의 외관이 아닌 내면에서 닮은꼴을 추구한 것이며, 미학적으론 존재의 자기다움을 추구한 것인데, 호해란의 조각 중 특히 인물이 지향하고 있는 경향도 바로 그런 맥락에 속한다. 존재의 폐부로부터 충분히 풍화되고 숙성된 형태 혹은 내면이 밀어올린 외면 혹은 내면이 된 외면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얼추 닮은 두루뭉술한 형태의 표면에 그림을 그리듯 선을 새겨 넣어 표시한 눈이며 입술이며 기와며 창문이 어눌하면서도 정겹다. 다른 돌들도 그렇지만 특히 마천석의 표면에 오돌토돌한 미세 요철을 부여해 마무리한 것은 돌 특유의 색감과 질감과 물성이 어우러져 일정한 정서적 환기와 함께 감각적 쾌감을 자아낸다. 그렇게 작가는 존재의 상징인 집을,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꿈꾸는 사람들을 형상화해놓고 있었다. 


선인장이 자라는 집. 그리고 작가는 그 집이며 방안에 다른 사물들과 함께 선인장을 들여다 놓았다. 작가가 다루는 소재치고 의미 없는 사물들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선인장은 좀 더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작가가 보기에 선인장은 사람들을 닮았고 그네들의 삶의 모습이며 생리를 닮았다. 예외가 없지 않겠지만 대개 사람들은 선인장에 난 가시처럼 타인들에 대해 방어적인 삶을 산다. 그리고 때론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공교롭게도 선인장이 자신의 온몸 위로 가시를 키워낸 것은 물이 귀한 사막에서 천적으로부터 자신이 축적한 수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람들 역시 척박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몫을 지키기에 열심이다. 그렇게 열심을 내다보면 때론 타자를 상처 입히고 더러는 자기도 상처를 입는다. 그렇게 선인장의 몸에 난 가시는 삶의 위대한 투쟁을 증언해주는 무슨 상처 같고 훈장 같다. 그래서 선인장은 애틋하다. 여기에 선인장의 형태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조각의 본질이며 본성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 양감 곧 덩어리이다. 알다시피 선인장은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몸통을 가지고 있다. 큰 몸통이 새끼를 쳐 작은 몸통을 거느리고 있는 구조이다. 모르긴 해도 선인장의 이런 구조며 형태가 작가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흥미를 유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소재들도 그렇지만 특히 선인장을 소재로 한 일련의 조각들은 더 조각적으로 와 닿는다. 

그런데 그 선인장은 집보다 웃자라 무슨 키 큰 나무 같고, 그 키 큰 선인장 나무에 조그마한 집이 기대고 서 있는 형국이다. 선인장이 집보다 큰 것은 선인장이 집이 꾸는 꿈을 상징하고, 집이 키우는 이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때로 집보다도 크고 선인장보다도 큰, 아마도 작가의 자소상이지 싶은 여인이 그 선인장이 자라는 집에 함께 기대어 서거나, 마치 집이 꾸는 꿈이며 이상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하늘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 집을 감싼다. 작가는 이 모든 정황을 단순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는 조각 속에 담아냈다. 관념에 따라 그 크기가 자유자재하게 변형되는 것이나, 마음먹은 대로 무중력 상태 속을 날아오르는 것, 그래서 현실이라기보다는 흡사 꿈을 형상화한 듯한 조형이 샤갈의 그림을 연상시키고, 서정적 초현실주의로 부를만한 어떤 경지를 열어놓는다. 

그리고 풍경조각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상황조각에서 풍경조각으로 그 대략적인 흐름이나 경향이 옮아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쪽창이 나있는 밀폐된 방안에 여인이 등을 보이고 서 있거나 웅크리고 앉아있는 조형이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 자기 내면(밀폐된 방으로 표상되는)과 마주하는 실존적 상황을 표상한 것이며, 그 표상형식을 상황조각으로 정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근작에 나타난 형식적 특징들, 이를테면 집과 선인장과 여인이 어우러지거나, 말을 타고 있는 가족을 형상화한 조형들에선 전작에 나타난 자의식이 한차례 걸러지면서 상대적으로 더 편안하고 담담한 정조를 자아낸다. 상황조각을 통해 작가의 꿈과 이상이 좌절되는 심리적 사건이며 순간을 표상하고 있다면, 풍경조각을 통해서는 그 꿈과 이상이 승화된 형식을 얻어 하나의 풍경이며 전망으로 열리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 수순이 작가의 경우에 한정된다기보다는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확인되는 사실이란 점이며, 그 만큼 작가의 조각은 개인사에 근거를 둔 것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경험에도 맞물려있어서 쉽게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선인장은 작가의 꿈과 이상을 상징하고, 꿈이 좌절된 순간을 상징하고, 이상이 승화된 형식을 얻는 사건을 상징한다(비록 전작에 실제로 선인장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스틸라이프, 정물. 작가는 근작에서 알루미늄 캐스팅을 통해 화분이며 구체관절인형을 조형한다. 은회색의 은근한 색조며 질감이 금속이면서도 금속 같지 않은 손맛과 정감을 자아낸다. 사실 그동안 작가는 꽤 다양한 재료를 섭렵했었다. 나무와 철판, 테라코타, 폴리코트와 브론즈, 그리고 마천석과 대리석 같은 각종 석재에 이르기까지. 재료들 각각은 당연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겠지만, 어떤 재료든 작가의 손에 닿으면 두루뭉술하면서 내면을 파고드는, 어눌하면서 정겨운, 부드럽고 우호적인, 특유의 서정적 정서를 머금은 조형으로 되살아났다. 이는 재료의 물성에 반하거나 물성을 인위적으로 왜곡시키는 경우로서보다는 조각에 대한 작가 고유의 감성이며 태도가 숨결처럼 재료에 불어넣어져 재료의 잠재적인 본성이며 자기다움이 오롯하게 드러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대리석은 돌이면서 돌 같지가 않고, 알루미늄은 금속이면서 금속 같지가 않다. 단순히 재료의 성질에 속한 문제로서보다는, 마치 마이더스의 손처럼 작가의 개성이며 성향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터이다. 

이처럼 손맛과 정감을 자아내는 조형을 작가는 스틸라이프라고 부른다. 살아있는 것들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는 뜻이다. 고정적이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은, 고정적인 형태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의 생리며 생태가 여실하게 암시되는 어떤 차원이며 경지를 겨냥한 것이다. 사실 스틸라이프라는 말을 정물이라는 말로 한정하는 것은 그 의미를 축소하는 감이 없지 않다. 나아가 아예 스틸라이프라는 말은 정물이라는 말로 환원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처럼 스틸라이프라는 말로서 지시되는 경향은 그저 이 일련의 조형들에 적용된다기보다는, 어쩌면 작가의 조각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며, 작가의 조각이 환기시키는 고유의 정서적 성질일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작가는 조각을 평면부조 형식으로 만들어 회화적인 조각을 실현하고, 이로써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랍인 남자와 독일 여자가 동거하니 세인들의 눈총이 따갑다. 외로운 사람은 계속 외로워야 한다. 외로움은 사회적 관습이 그들에게 부과한 형벌이며 천형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깨기 위해 금기를 깼으니 눈총이 따갑다. 외로워야 마땅한데 외롭지 않으니 그 안 외로움을 질투하는 눈들이 불안하다. 그 불안은 상식과 통념(doxa)에 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관습적 불안이며, 외로움에 연유한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 불안이다. 그 관습적 불안과 존재론적 불안이 영혼을 갉아먹고 피폐하게 만든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외롭고 불안하다. 작가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를 차용해 자기식의 조형으로 옮겨 놓는다. 수조 속에 벽들이 가로막혀 있고, 그 벽들 뒤에는 사람들이 숨어 있거나 다른 사람을 엿본다. 여기서 수조는 무의식을 상징하며, 벽은 관습의 벽을 의미한다. 저마다의 외로움은 관습의 벽에 가로막혀, 그리고 더러는 스스로 걸어 잠근 빗장 탓에 표출될 수 있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무의식 속으로 잠수한다. 외로움은 말하자면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탓에 표현되지도 폭로되지도 않는다. 전달되지도 해소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작가는 새장을 열어 새를 날려 보냈지만 다시 돌아와 계속 새장에 갇혀 살게 된 새 이야기를 테마로 한 노랫말을 조형으로 옮겼다. 관습이 불안과 외로움을 강화한다면 관성이 삶에 안주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일탈하고 싶지만 사실은 탈출하지 못하고, 자유를 갈망하지만 내심으론 구속을 원한다.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일탈하고 그 전제만큼만 탈출한다. 작가는 그렇게 관습과 관성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실존적인 초상을 그리고, 외로움과 불안을 내재화한 심리적이고 병리학적인 초상을 그린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서사적이고 연극적이다. 서사와 연극을 풀어내는 방법으로는 독립된 조형보다는 설치작업이 효과적이다. 이로써 작가는 기왕의 상황조각(저마다의 내면에 갇힌 사람들)과 풍경조각(꿈꾸는 사람들)의 경계를 넘어 설치작업(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으로까지 조각의 표현영역이며 범주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건 서정적 채색을 덧입혀 따뜻하고 우호적인, 그리고 더러는 애틋하고 애달픈 정감을 자아낸다.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실제 심성이며 정조에 연유한 것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