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위한 거리두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규칙은 시공간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가치처럼 군림한다. 한시적인 게임의 규칙에 불과한 것들은 마치 자연법칙 같은 운명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러나 지배적 현실이란 ‘실재효과’(바르트)일 뿐이다. A. 아이스테인손은 [모더니즘]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실재효과란 특별히 상징적인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말하자면 ‘이것이 세속적인 현실’이라거나 혹은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이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어떤 효과일 뿐이기 때문에 변화될 수 있다. 사회적 다수를 괴롭히고 착취하는 관례적 구조는 언젠가는 순리에 맞게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목적의식적으로 이 변화 과정을 단축하는 일, 가령 물화된 구조를 바꾸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다시 도출하는 일이 필요하다.

 


 

예술 역시 지배적 흐름에 역행하는 이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존의 지배적 구조를 상대화하는 것은 비록 삶의 대안이나 정치적 전망까지는 안가더라도 개혁, 또는 혁명적 변화를 촉구하는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송민선의 ‘다르게 보기’ 전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다양한 관례들, 그리고 그것들을 결합하고 있는 나사못을 헐겁게 함으로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다르게보기’를 통해 비판적 서사를 이끄는 캐릭터는 순진무구한 아기인데, 그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기에 무리가 따르는 각종 문명의 장치들은 인간과 구조의 틈을 극대화한다. 성별이 불분명한 하얀 아기들은 아무것도 씌여져 있지 않은 백지 같은 상태를 상징한다. 송민선의 작품에서 아기의 백지상태는 백치 같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비판의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서 그들 안팎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구조들은 곧 그들을 이러저러한 색으로 물든 어른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송민선의 작품에서 인간의 힘을 외계로 확장시킬 수 있는, 자연정복의 기구인 망원경, 텔레비전, 헤드폰 등은 역으로 그 치부를 들여다보거나 듣기 위해 안으로 향한다. 예술가들이 그러한 일에 끼어드는 이유는 그들 또한 사회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스트가 믿고 싶었듯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또는 자율화된 예술계는 바로 그 상황 때문에 사회적 소통을 촉구한다. ‘예술이 사회적인 이유는 사회와 대립되는 위치 때문’(아도르노)이라고 보는 모더니즘 논리에서 예술의 무용성은 단번에 유용성으로 격상된다. 거리감은 무력함과 전능함을 동시에 낳았다. 고고한 예술의 상아탑은 속물적 구조에 겹겹이 에워싸여 있고, 사회의 상부구조에 속한 예술계는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물신적 구조가 작동되는 곳이다. 지배적 구조의 상대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거기에 순응하면서 그 게임의 승리자, 최소한 그 수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허위의식 때문에 억압적 구조는 지속되곤 한다.

 

지배적 구조는 개인에게 큰 희생이 아니라, 조금씩의 타협을 요구할 뿐이다. 너무 큰 압박은 결국 구조를 무너뜨리는 반발력을 낳기 때문이다. 억압적 구조가 확대 재생산되는 것에는 구성원들 각자가 그 구조에서 약간의 기득권자라는 믿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더 큰 기득권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권력이란 피해 의식 같은 부정성 보다는, 자신 역시 미소하나마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긍정성에 의해 더욱 활성화되고 확고해 진다. 그러나 예술 전체가 타자화 되어 있는 마당에, 그러한 믿음이란 순진하거나 어리석다. 더 나아가 암암리에 퍼져 있는 그러한 허위의식이 질곡의 주범이다. 예술은 타자화 되어 바깥에 내쫒겨 있는 김에 안의 관례들이 절대적 법칙이 아닌 상대적 규칙임을 재차 문제 삼아야 한다. 송민선이 질곡의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은 규(법)칙들을 소격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사회에 물들지 않은 아이의 순진한 시각을 통해 거리두기를 실행한다. 사실, 거리두기란 오랫동안 예술의 기본적인 장치였다. 슈클로프스키와 브레히트 등에 의해 정교화 된 낯설게 하기, 또는 소외(소격)효과는 물신화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무기로 평가되어왔다. 특히 신화적, 종교적 총체성으로부터 유리되어 단독자로 설 수밖에 없었던 근대에 이러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예술가들을 포함한 타자들의 저항은 본격화된다. 지배적 패러다임을 갱신함으로서 변화 또는 진보를 가능하게 해왔던 근대예술가들의 궤적에는 거리두기가 있었다. 거리두기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 관철된다. 흔히 대별되곤 하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구도는 이러한 거리두기가 내용에 방점을 찍는가, 형식에 방점을 찍는가에 따라 갈라지는 미학적 카테고리이다. 송민선의 작품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규칙들은 사회에서 느끼는 작가의 소원함으로 인해 소격된다.

 

사회비판이라는 풍자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에서 용이한 소통을 위해 체택된 재현적이고 연극적인 구도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은 아니다. 어른의 행위를 아이가 반복함으로서 거기에는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와 비례가 맞지 않는 다양한 기구들은 이물감을 자아낸다. 그것은 작가의 강한 주장으로 이끌 수 있는 극적인 변모보다는 약간의 변주에 해당된다. 아이는 단지 이러저러한 기구들과 더불어 어른의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이 부적절하며 위험하고, 심지어는 타락해 보인다는 것은 거리두기의 결과이다. 한편 작품 [훔쳐보기]에서 나타나듯, 아기는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들--가령 팅커벨 같은 요정--을 본다. 이 작품에서 아기는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는 것들을 찾는데, 그것은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그만의 수단일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모습을 풍자한 작품 [애(愛)당]은 비극이라고도 희극이라고도 할 수 없는 현실 정치의 풍경이다.

 

나무로 만든 국회의사당을 세트로 하여 아이 다섯이 여러 동작으로 배치되어 있는 이 작품은 당파의 이해관계가 가장 적나라한 힘의 관계로 표출됨을 알려준다. 법칙으로 다가오는 규칙이란 결국 권력 게임이지만, 그나마의 규칙도 무시하고 큰 목소리나 완력 같은 원초적인 힘이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다. 세트가 입법기관이라는 것은 법이 수립되는 과정 자체가 법을 벗어나 있다는 원초적 진리를 알려준다. 거시 권력은 그것을 실어 나를 미시적 매개물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매스 미디어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수그리족’이 되어 단말기만 쳐다보는 현실은 모세혈관 같이 뻗어있는 권력의 그물망의 살아있는 예다. 작품 [바라보기]은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마주하고 묵상에 잠긴 아이를 보여주는데, 모니터의 푸른 조명은 마치 거울처럼 아이의 상상계를 구조화하면서 사회의 지배적 상징구조를 관철시킬 것이다. 아기가 혀를 빼꼼이 내밀고 망원경으로 무엇인가를 염탐하는 포즈를 취한 작품 [바라본다는 것 2]는 보고 보이는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역학을 암시한다.

 

흑인 아이가 앉아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매만지는 작품 [in the mirror]는 타자화 된 인종에게 곧 닥칠 사회적 시선을 아이의 눈으로 반사한다. 송민선의 작품에서 소수와 타자가 꼭 필요한 동일성의 법칙은 공적/사적 영역을 둘러싸는 갖가지 사회적 거울(미디어)이 요구하는 바를 시각성을 통해 드러낸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권력은 시각성을 통해 작동되지만, 눈을 감고 헤드폰을 낀 아이를 표현한 작품 [어떤 소리]에서는 타자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언어라는 상징적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할 아기의 정신적 여정 또한 알려준다. 그러나 밖으로 새어나오는 소리가 어른들이 싸우는 소리임으로 보아서, 아기를 어른 사회로 진입시킬 상징적 구조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작품 [Hi 힐]에서 무성(無性)의 아기는 거대한 붉은 힐을 신고서 헐리웃 여배우의 섹시한 표정을 흉내 낸다. 중성, 또는 무성의 아기는 사회의 거울 작용에 힘입어 결국은 모두의 성에게 억압을 낳는 성별 역할을 요구받을 것이다.

 

지금은 신발이 욕조만큼이나 크지만, 제2의 성(여성, 또는 그 밖의 성적 소수자)의 발은 점차 전족을 신은 것처럼 조일 것이다. 하이힐은 변화를 위해 움직이기 보다는 지배적 구조에 고착되어 있는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겉돌아서, 나중에는 너무 조여서 걷지 못할 신은 누가 억지로 신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신으며, 억압은 쾌락으로 전도된다. 그것이 바로 도착적 현실이다. [am 8]은 다른 작품과 달리 연극적 세트라 할 만 한 구조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8시 출근길 지하철처럼 좁은 곳에서 서로 밀려서 서 있는 어정쩡한 자세들은 구조에 대한 거리두기가 더 이상 간접적인 암시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메시지이다. 인간들을 압박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는 대중의 동선을 일치시킨다. 대중을 비슷한 패턴의 생산-소비 기계로 몰아붙이는 것이 구조의 목적인데, 이렇게 관철된 동일성의 원리는 그 내부의 차이들을 말살한다. 잼 상태의 인간들에게 개별성이란 완전히 뭉개져 있다. 거대한 쿠션 같은 털 강아지 위에 안식하듯이 잠든 아기를 표현한 작품 [품안에]는 억압적 구조에 대한 해방구를 자연에서 찾는다.

 


 

살아있는 털 뭉치는 다른 기구들과 달리 이물감이나 이질감이 없다. 이 포근한 풍경에는 개인을 압박하는 사회적 구조의 힘들 떨쳐내고 행복한 꿈에 젖어있는 유년기의 환상이 있다. 송민선의 작품에서 예술이 소격작용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다면, 그러한 비판을 통해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시공이 유년기라는 점은 다소간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는 타락한 어른의 사회 같은 근대문명에 순수한 자연의 힘을 대비 시켰다. 소격작용이 예술의 핵심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와 예술의 관계 또한 내적이다. 개체를 태내에 있는 듯 푹 감싸는 거대한 원형의 자연은 ‘어머니 자연’처럼 모성적 구조를 가지며, 존재의 전체성이 분리와 단절로 손상되기 이전의 잃어버린 낙원을 그린다. 여기에서 아기는 어른에게 부과된 모든 억압적 과정을 거부하거나 극복한다. 기원으로의 회귀란 퇴행일수 있다. 순수한 기원이란 것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유년으로 회귀하려는 노력은 부조리하게만 다가오는 현재의 지배적 게임을 다른 게임의 원리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픈 유토피아적 희망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