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몸체
이선영(미술평론가)
수화에서 출발한 형태가 있는 이용태의 작품은 소통, 특히 대상과 유사한 기호를 매개로한 소통을 주제로 한다. 수화를 수행하는 여러 가지 손동작은 소통을 위해 흙을 주물러대어 형태를 빚는 조각가, 특히 생각보다는 손이 먼저 움직이는 작가의 자의식 또한 깔려 있다. 인간의 대표적인 소통양식인 말과 글에서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에게 수화 같은 형식은 언어이면서 동시에 형상적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이용태의 작품에 나타나는 갖가지 손동작은 임의적인 고안이나 장식이 아니라, 그 특수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에게는 실제로 읽혀지며, 그럴 수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그 안팎에 추가된 보조물을 통해 작가가 발신하는 메시지의 수신이 가능하다. 그의 작품은 하나가 하나만을 지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을 매개하는 풍부한 기호작용을 지향한다. 언어와 형태는 서로를 보충하는 것이다.

손동작 언어로 지시된 것은 이미지화 되고, 단어와 함께 결합된다. 여기에서 단어는 손으로 공중에 ‘씌여’지는데, 그것은 손의 마디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구부려서 기호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단어와 이미지의 관계가 1;1의 대응관계 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 연결은 느슨하고, 어떤 것은 말로부터 자율화되어 전체가 사물의 역할을 담당한다. 몸과 행동을 이용한 언어는 조각이라는 또 다른 언어로 전이되었다. 그가 활용하는 대안의 언어는 수화 중에서 지화이다. 세계 공통어인 수화와 달리,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지화는 한글이나 알파벳 같은 과학적인 표음문자와 잘 어울릴 것이다. 그의 작품 언어는 보편적 추상 언어와 거리가 있지만, 몸이라는 더욱 근본적인 언어에 근접한다. 그러나 몸의 언어라고해서 실제의 해부학적 외관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지화는 특수 계층이 엄연히 사용하는, 손을 활용하는 실제 언어이므로 관절을 이용한 기호화는 임의적이지 않은 형태지만, 이용태가 만든 손은 사이보그나 아기, 부처님의 손이 연상되는 독특한 형식이다.
손가락이 짧고 손바닥이 통통한 독특한 형태는 5-6배에서 100배까지도 확대한 크기 때문에 더욱 실제로부터 멀어진다. 실제와 거리를 두는 또 하나의 형식은 추상적인 색깔이다. 전시에는 본래의 참조대상인 손과 거리가 먼 색깔로 뒤덮인 세라믹과 FRP로 만들어진 형태들이 다채롭게 포진해 있다. 그는 공중이라는 빈 서판에 씌여진 언어에 색을 입힌다. 어릴 때부터 친숙하게 접해왔던 도자기 흙을 활용한 세라믹 작품과 형태의 확대가 용이한 FRP 작품은 자연스러운 놀이와 기능성을 만족시킨다. 이처럼 지시대상과 그 변형이 동시에 있는 이용태의 작품은 무엇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그자체를 지시한다. 하나는 참조대상으로부터 의미를 실어 나르는 투명한 매개물이지만, 다른 하나는 자기 지시적 불투명성이 있다. 특히 부조처럼 벽에 거는 작품들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그림자 같은 형식이기에 기호로서의 불투명성은 더욱 강해진다. 형태는 그자체로 재미를 주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어떤 의미를 담은 형태이기에 단순한 장식적 유희와는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겨냥하는 소통 전략이 있다.
전시 작품은 좌대 위에 올려 있는 것과 액자 형식으로 벽에 붙이는 것이 있다. 벽에 붙이는 작품들은 손이 꺽이며 지화를 수행하는 실루엣들이다. 이 그림자의 언어는 얼룩 같은 미지의 형상으로 다양한 연상을 끌어낸다. 정사각형, 원 안에 있는 형상들은 언어에 내재된 무의식을 정제된 형식 안에 투사한다. 대상의 특정부위와 결합된 손가락 동작의 단어들은 닭, 물고기, 사슴, 소, 얼룩말, 여우, 염소 등을 은유한다. 각 작품을 빚어낸 솜씨나 아이디어와 별도로, 이러한 소박한 단어들은 마치 아이의 그림책처럼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의 초심이 있다. 그것은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흐를 뿐인 자동화된 소통을 낯설게 한다. 선인장을 지시하는 6개의 손이 뚫린 구멍으로 빛이 새어나와 마치 선인장 가시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는 작품은 이미지와 언어의 결합도가 어떤 작품보다 높다. 말과 사물은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고, 서로를 향해 스며든다. 54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는 정교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손 한 쌍은 노동과 언어를 가능하게 함으로서 동물로부터 인간으로 도약하게 한다. 이용태가 활용하는 수화나 지화는 인간만이 가능한 다양한 손가락 동작들이 만들어내는 기호의 세계이다. 기호의 작용은 손과 두뇌 간의 긴밀한 연결망에 의해 가능하다.

J. 브로노프스키는 [인간등정의 발자취]에서 손 전체는 본질적으로 두뇌의 한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단지 손이 두뇌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화는 손의 꾸준한 발전에서 시작되며, 특히 손을 숙달되게 조종하는 두뇌를 통해 빨라졌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역시 말을 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고 손으로 조작하며 작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직립보행을 통해 대지로부터 해방된 손은 사고-언어-노동-예술 등을 가능하게 하면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두드러진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문명사회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었던, 손으로부터 비롯된 가치들이 희미해져 간다. 이용태의 작품 속에 나타난 활달한 손의 작용은 원시적 언어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문명에 의한 퇴화에 역행하는 몸짓이다. 그가 활용하는 손가락 언어는 추상적이지만, 몸과 사물 같은 구체성과 결합됨으로서, 언어가 언어로서 가능한 조건, 즉 실재의 부재를 보충한다. 문명의 억압은 실재로부터 자율화된 코드들의 조작을 통해 이루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용태의 작품은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해석의 한계]에서 말하듯이, 언어행위, 카드놀이, 교통표지체계, 도상해석학적 코드 등과 같은 의미체계들의 추상적 구조가 있다. 기호학에서 모든 의미표현은 다른 의미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이 과정은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 에코는 단어나 기호는 인간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삶은 사고의 연속이라는 사실이 곧 인간이 기호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처럼, 모든 사고가 외적 기호라는 사실은 인간이 외적 기호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용태의 작품은 가장 인간적인 기관인 손과 기호의 밀접한 관계를 예시한다. 규칙에 의해 구사되는 관절의 움직임은 언어의 공통된 자질인 차이와 체계를 가진다. 조형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이미지 기호학’(바르트)이다. 안느 에노는 [기호학사]에서 이미지 기호학은 이미지를 그것이 표현한 것과 흡사한 유사물(analogon)이라고 정의한다. 이 경우 이미지는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와 필연적 관계를 가진다. 반면 추상적인 언어(랑그)는 대상과의 관계가 임의적이다.
이용태의 작품에서 대부분 가운데 토막을 이루는 지화는 지시 대상과의 임의적 관계를 보여주지만, 보충되는 이미지는 이러한 언어의 임의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정짓는다. 그의 작품에서 지화는 대부분 일렬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랑그의 선적인 성격을 알려준다. 그것은 코드화된 기호 체계처럼 서로 연결된 단위의 일관성 있는 연속체를 이룬다. 그러나 이미지(그림, 사진, 도로표지판, 지도, 도면 같은 시각적 기호)는 보다 평면적이다. 양자는 상호 보충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복합체들은 마치 상형 문자 같이 작동된다. 몸의 언어와 구체적 대상이 결합됨으로서, 사고와 사물의 질서 간의 관계는 보다 가시적인 것이 된다. 그의 작품에서 ‘차별들로 이루어진 체계’(소쉬르)인 추상적 언어(랑그) 역시 순수한 형식--언어학자 소쉬르에 의하면 랑그에는 의미의 토대를 이루는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관계들이 있다--으로만 제시되지 않는다. ‘닭’이라는 지화는 붉은 벼슬을 포함하며, ‘얼룩말’이라는 지화는 알록달록 얼룩져 있다. ‘도시’라는 지화는 도심 분수대에서 샘솟는 물처럼 보이게 했으며, ‘선인장’에서 언어의 몸체는 선인장처럼 가시가 돋아있다. 언어와 이미지의 합체는 복층의 코드를 구성한다. 그것은 선적인 투명성을 방해하지만 복합적인 울림을 낳는다. 이용태의 작품은 언어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동시에 활용한다. 양자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추적할 수 있다.
‘지식의 고고학’을 정립한 철학자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현실의 언어는 독립된 기호들의 총체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현실의 언어는 하나의 불투명하고 신비스러우며 스스로 속에 자폐된 어떤 것이자, 하나의 파편화되고 매순간 수수께끼로 가득 찬 덩어리로서 도처에서 세계의 제형상과 결합되고 한데 엮어지게 된다. 언어는 세계 내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세계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신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의 본래적인 형태에서 언어는 사물들에 대해 전적으로 확실하며 투명한 기호였다. 이때의 언어는 사물들과 유사했다. 한 사물의 이름은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투명성은 인간에 대한 징벌인 바벨탑과 함께 무너졌다. 언어의 첫 번째 존재이유였던 사물과의 근원적 유사성을 상실하자마자 제 언어는 분화되었고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근대적 사고란 언어와 세계의 깊고 가까운 관계가 붕괴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물과 단어는 서로 분리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눈은 보는 것으로, 오직 보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귀는 듣는 것으로, 오직 듣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비록 언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관해 말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말한 그 무엇으로밖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말과 사물이 멀어짐으로서 생겨난 무한한 공간에서 근대예술이 번성하기도 했다. 푸코가 피력한 말과 사물의 역사적(고고학적) 관계 속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 또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은 환원을 통해 언어의 감옥을 만들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산을 통해 어떤 중심도 없는 자의성만을 낳았다. 인간과 더불어 동시에 탄생한 기나 긴 소통의 역사에서 근대적 환원과 탈근대적 확산은 각각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양자는 언어의 몸체, 또는 몸의 언어에 다시금 주목하는 방식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단어와 사물을 모두 말하게 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이용태의 작품은 이 두 가지 함정을 피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