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또는 죽음에 이르는 속도

 

이선영(미술평론가)

 

도시에서 이동 중인 대중들을 포착한 사진을 단위 삼아 수 천 장을 꼴라주한 이지연의 작품들은 추상화된 시공간 속에 매달려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면을 담는 수단인 카메라를 비롯하여 정보를 가공하는 장치에 이르기까지, 육체를 초월하는 속도는 공간적 차이를 말소한다. 이동을 위해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에 서 있는 대중의 모습은 모여 있거나 흩어진 점들로 축소되어 있으며, 수직 수평으로 이루어진 현대도시의 격자형 구조를 반영한다. 엘리베이터와 달리 에스컬레이터는 사선 구도를 가지지만, 이지연은 이조차도 절묘한 위치에서의 포착을 통해 수직이동의 성격을 살린다. 수직 수평의 좌표계 속에서 대중들은 이동하기보다는 붙박혀 있는 듯하다. 리듬감 있는 배치는 암울하고도 장중한 분위기부터 우아한 선율에 이르는 다양한 음을 자아낸다. 차이와 반복 속에서, 픽셀이나 셀처럼 화면을 가득 메운 일련의 단위들은 그 구체적 맥락이 삭제된 채 추상으로 재맥락화 된다. 점으로 나타난 그들은 하나의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며, 그들이 속해있을 추상적 좌표계를 예시한다.

 

익명화된 대중들을 배치하고 이동시키는 어떤 힘 또한 예시한다. 구조는 그들을 사전에 지정된 어떤 시공간 속에서 멈춰 서게 한다. 여기에서 멈춤은 또한 이동이다. 그들은 특히 좁은 통로에 배치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동만 가능하다. 통로에서의 멈춤은 달갑지 않은 사고일 뿐이다. 대중을 빠르게 대량 수송할 수 있는 기계들 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는 그다지 많지 않다. 멀리라서 잘 안보이지만, 그들은 가장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공간에서 타인과의 어색한 만남과 밀착을 잠시 견디고 있는 중이다. 대량생산과 소비의 시대, 대중은 이동에 있어서도 유통되는 물건들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 어떤 거리를 주파하는 과정의 체험을 최대한 단축한 채, 점에서 점으로 이송되는 인간들은 구체적 시공간에서 이탈 된다. 이러한 추상적 이탈은 현대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 된 속도의 전제조건이다. 역설적인 것은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때의 전형적 체험처럼, 속도는 또한 정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지연의 작품에서 대중들의 이동은 어떤 구체적 시공간을 통과하는 것이기 보다는, 순간 멈춤의 반복들로 나타난다. 작가는 무의식적 순간들을 영원으로 확장시켜 주었다. 장거리 여행은 초고속 운송수단에 승객을 묶어 놓는다. 이전의 오랜 이동 수단같이 과정을 향유하기 힘들다. 과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이동을 위해 억류된 이들의 시공간에 쇄도하는 상품화된 코드들일 것이다. 이지연의 작품에서 수평 축의 이동은 수직보다는 여유 있어 보인다. 자연을 배경으로 다리를 통과하는 대중은 엘리베이터 같은 수직이동 장치에서의 밀폐 감이 없다. 대중들의 행동 또한 보다 다양하다. 투명 엘리베이터 속 승객들이 빽빽한 매트릭스 안의 수인처럼 보임에 비해, 다리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물 흐르듯 이동한다. 계급적 질서와 욕망을 반영하는 상하로의 수직 이동은 더 추상적이고 긴장감이 있으며, 압박감이 느껴진다. 정지된 순간들이 이어지면서 공간으로 확장되는 이지연의 작품들은 사진이라기보다는, 알아볼 수 있는 단위로 잘라낸 장면들로 그려진 일종의 드로잉이다. 가까이 찍은 사진을 멀리서 보게 됨으로서, 장면은 패턴화 되지만 기계적 반복은 아니다.

 

하나하나 찍어 재배열한 그것들은 자연 같은 개별성을 보존하지만, 전체와 부분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해체되어 있다. 이지연의 작품은 기계적 이동 장치와 접속되어 있는 몸을 통해, 이 세미나의 주제인 ‘기술적 상상력과 미래’를 보여준다. 미시적 힘을 거시적 차원에서 포착하는 이지연의 작품은 매일의 일상에서 이 SF 적인 주제를 발견했다. 현대사회의 경쟁력인 속도를 위해 몸은 기계와 만난다. 그러나 시간을 타는 몸에 끼어든 기술에는 조작가능성이 있다. 자연의 시간은 기계의 속도가 되었고, 가속도가 붙었으며, 몸은 이 속도의 볼모가 되었다. 미래파들이 열광했듯이, 죽음에 가까울 정도의 가속은 쾌락을 낳는다. 끝없는 과도기로 간주되는 현대는 속도 자체에 열광하는 도착적 쾌락이 지배한다. 이 맹목적 속도를 늦춰주는 것만으로도 질주하는 현대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종말을 늦추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원통형 엘리베이터를 탄 인간 3000 여장을 꼴라주한 대작 [above the timberline]에는 무한 속도가 죽음에 가까운 정지를 낳을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상이 보인다. 그들은 무한 속도를 위해 삶을 이루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궁극적으로는 공기와 체액마저 다 빼내버린 것 같다. 어디론가 흘러가는 통과관속에 유폐된 생체들에는 이미 도래해 있으며, 미래에 더욱 힘을 발휘할 속도의 정치경제학이 있다. 몸이 통과하는 도시의 이동로에 배치된 기계는 현대의 시공간의 리듬을 생산하는 장치로서, 정치경제학의 주제가 된다. 건축비평가이기도 한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의 주제는 속도의 정치경제학으로, 이지연의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해준다. 그에 의하면 도시는 무엇보다도 급격한 소통의 통로들이다. 도시는 강, 도로, 해안선, 철도 등이 관통하는 거주 지역으로, 일련의 이동,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에 의하면 도시는 운송장치의 이동 속도와 시선이 도구적으로 결합되는 중간 정착지이며, 어떤 궤적이 그려낸 개략적인 경로 위의 한 지점이다.

 


도시적인 장소와 도시 자체가 일종의 교통로이거나 철도 환승지, 즉 사회적 문화적 교류와 순환의 장소일 뿐이다. 이 교차점과 합류점에 중심지가 존재한다. 그곳은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기에 경쟁과 분쟁, 전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통로에서 일상까지 연장된 총력전이 벌어지며, 승리의 관건은 속도가 된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속화의 지점들에는 명시적이고 잠재적인 전쟁이 있다. 구분되고 분리되어 있던 시공간들이 촘촘하게 연결망을 이루면서 경쟁 또한 일상화된다. 이지연의 작품에서 도시 공간 역시 통행로 그자체로 제시된다. 남들보다 더 빠르게 어딘가에 도착해야할 경쟁적 과제는 자율화된 주체로 믿어지던 인간을 물리적 힘에 의해 반응하는 입자들로 만들었다. 작품 속 대중들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단지 계속 이동해야하는 의무가 주어졌을 뿐이다. 순간 속에 고착된 그들은 오고갈 수 있는 자유가 이동의 의무로 변해버린 현실을 보여준다. 악무한의 회로도에 유령처럼 사로잡힌 그들은, 21세기의 키워드로 부상한 유목이라는 목가적 단어와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 적절하고 빠른 경로를 택하는 것은 권력이기도 하다. 이동이 의무이든 권력이든, 그것을 수행하는 몸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몸은 이동과 속도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몸의 길들여짐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비릴리오에 의하면 몸은 집 인 것 이상으로 생체적 운송 장치이다. 시간과 공간에서 초읽기라는 운동경기의 원리에서, 몸은 발사체나 발사장치가 될 수 있다. 주제를 나타내기에 적절 한 장소를 찾아 그곳을 통과하는 대중들을 포착하여 이미지의 구성단위로 활용하는 이지연의 작품은 신체, 속도, 기계, 권력 등의 개념어를 집중 시킨다. 물론 속도, 기계, 권력 등은 그자체로 인간에 적대적이랄 수는 없다.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속도가 있을 수 있고, 인간은 기계와 접속하여 자신을 확장할 수 있으며, 권력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선택한 장면과 관점에서 두드러지는 시공간의 동질성은 억압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자연과 더욱 차단된 인공적 환경 속 수직 이동의 장면이 그러하다.

 

빠른 속도의 상승은 더 치명적인 추락을 낳을 지도 모른다. 같아짐은 상호간 이해의 관건이 되기도 하지만, 끝없는 경쟁의 원인이다. 코드화로 대변되는 추상적 동질화가 비워짐을 낳는 것 또한 강조해야 한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시공간 압축이 낳은 결과 중의 하나는 주체와 객체의 가속화이고, 그것은 주체와 객체 모두의 비워짐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이지연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동장치들은 압축적 시공간에 대한 절묘한 상징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압축은 압박이 될 만큼 과도해진다. 그 결과 순간성과 분절화로 대변되는 공허한 관계가 현대사회에 만연하게 된다. 이지연의 작품에서, 수직수평으로 기호화된 공간이라는 정해진 궤도를 주파하는 현대적 몸-기계의 복합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또 다른 의미의 속도, 즉 탈주의 상상력을 요구하게 한다. 그것은 여전히 보편적인 가치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자연에 역행하지 않는 시공간의 생성을 향하며, 궁극적으로 여러 시간대와 공간대의 공존을 향한다.

 

출전; 대구 아트팩토리(포럼; ‘기술적 상상력의 미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