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창호지 발린 방문 사이 바람에 문풍지 우는 소리, 그 얇은 종이의 떨림과 부딪침, 나는 지금 무수한 한지의 잎으로 만들어진 나의 작업 속에서 그 때 그 소리와 흔들림과 부딪침을 본다. 


작가 송광익의 이 고백은 작가의 작업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정서적 원형 같은 것이며, 원형적 그리움 같은 것이 될 터인데(작가는 어릴 때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창호문의 추억으로 부를 만한 것이었다. 원형적 그리움이라고 했다. 요새 식으론 프루스트 효과가 될 터인데, 프루스트에게 마들렌 과자의 향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창호문이다. 아니, 창호문이라기보다는 창호문에 비친 그림자며 창호문에 투과된 빛이며 창호문에 걸러진 소리다. 작가는 그 그림자며 빛이며 소리를 재현하고 싶다. 그 그림자며 빛이며 소리의 질료(아님 표상?)를 재현하고 싶다. 


그 그림자며 빛이며 소리는 날 것이 아니다. 아예 날 것일 수가 없다. 창호문을 통해 걸러진 것이며, 작가의 감성의 결(다르게는 주름)로 침전된 것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침전물이며 의식의 침전물이라고나 할까(창호문을 매개로 만나진 외계는 날 것일 수가 없다. 더욱이 그것이 감성의 침전물로 내려 앉아 고인 것이라면 더 그렇다. 그렇다면 창호문은, 그리고 감성도 날 것을 숙성시키는 계기이며 장치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의 성분 내지 성질(아님 현상?)이 떨림이며 부딪침이며 흔들림이다. 다시, 작가는 창호문을 통해 한차례(아님 겹겹이) 걸러진, 작가의 감성으로 녹아든 그림자며 빛이며 소리의 떨리고 부딪치고 흔들리는 현상을 재현하고 싶다. 내가 외계와 부대끼는 치열하면서 애매모호한 관계며 상호성을 재현하고 싶다. 


창호문은 거름 장치고 여과 장치다. 실물을 여과하고 빛을 여과하고 소리를 여과한다. 실물과 빛과 소리는 작가에게 다가온 외계란 점에서 타자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결국 작가 자신과 외계와의 관계를 다룬 것이며, 주체와 타자와의 상호성을 다룬 것이며, 소통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창호문이며 창호문의 투명하고 반투명한 막이다. 그 막이 열어 보이는 소통의 계기가 의미심장하다. 이를테면 보통의 문은 닫으면 벽이 되지만, 창호문은 닫을 때조차 온전히 닫을 수는 없다. 문의 현상학은 차단과 단절과 막힘이며 벽이다. 이에 반해 창호문의 그것은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는 막이다. 이처럼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는,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는, 닫힘과 열림의 경계가 불투명한 막 이편과 저편으로 그림자가 들락거리고 빛이 들락거리고 소리가 들락거리고 바람이 들락거리고 숨이 들락거리고 의식이 들락거리고 기억이 들락거리고 타자가 들락거리고 세계가 들락거리고 우주가 들락거린다. 


그렇게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는 통 구조를 통해 들락거리는 것들은 현상이든 의미든, 아님 감성이든 결정적이지가 않다. 아니, 결정적일 수가 없다. 막을 중심으로 이편과 저편에 속해져있지가 않고, 막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아님 저편에서 이편으로 이행중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이 꼭 그렇듯 이쪽 막에서 저쪽 막으로, 이쪽 칸에서 저쪽 칸으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그림(아님 주름)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바깥에서 안쪽으로 이행중이기 때문이다(작가의 그림은 무슨 주름 같고 자바라 같다. 접고 펼 수 있는. 확장하고 수축할 수 있는. 그렇게 접고 펴지면서, 확장하고 수축하면서 꼴이 달라지고 태가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지고 감성이 달라지는. 그리고 그렇게 매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리고 그 이행은 항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항상적으로 들락거리는 것,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것, 그래서 비결정적인 것이 생기다. 다시, 작가는 감성으로 녹아든, 기억(아님 무의식?)의 한 자락으로부터 끄집어 올린 생기를 재현하고 싶다. 비록 조형작업의 특성상 붙박이로 밖에 재현할 수 없지만, 이처럼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숨결과 생기를, 몸의 관성(아님 의식의 관성?)을 암시하고 싶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이 빛과 바람과 소리와 더불어서 온, 아님 빛과 바람과 소리 자체인, 아님 빛과 바람과 소리의 질료(아님 원인?)인 숨결과 호흡을 재현한 것이며, 몸의 기억 내지 몸의 관성(아님 유년시절의 놀이?)을 재현한 것이며, 결국 자기를 표현한 존재론적 작업임을 알겠다.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는 무슨 농사꾼 같다. 화면이 무슨 밭이나 되는 양 가로로 길고 세로로 긴 골과 이랑을 만든다. 그리고 모를 심듯 그 골과 이랑 사이사이로 한지의 잎을 낱낱이 세워 심는다. 그렇게 심은 한지의 잎들은 꼭 논에 심은 모들 만큼 바람에 흔들리고 빛에 감응한다. 꼭 모들 만큼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내고, 꼭 그 만큼 감촉돼 온다.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이다. 만져질 듯 보이는, 보면서 만져지는 일종의 촉각시라고나 할까(데리다는 보는 것이 이미 만지는 것이며 만져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부드럽고 우호적이다. 특유의 반복구조가 관념적일만도 한 데(반복구조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모더니즘은 관념이며 개념에 견인되는 미술이다), 작가가 감각으로 갈무리한 탓에 마치 미풍이 여린 모를 애무하듯, 빛이 어린 싹을 투명하게 어루만지듯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감각적이고 촉각적이고 은근하고 에로틱하다. 흑과 백의 모노톤으로 이뤄진 작업들에서 은근하게 에로틱하다가도, 다채로운 색깔을 도입한 근작들에 이르면 좀 더 두드러지게 에로틱해진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굳이 색깔이 아니더라도, 심지어 반복구조 속에서조차, 그리고 무채색에서 마저 이미 몸적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속에서 시각과 촉각은, 그리고 무채색에 연유한 금욕과 유채색을 도입한 색욕은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통합된다. 어디 시각과 촉각이며 금욕과 색욕뿐이랴. 바람과 빛과 소리로 나타난 자연을 하나로 통합해 들이는 감각은 어떤가. 공감각? 아님 공통감각? 여하튼 작가의 작업에서는 그런 자연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그런 공감각인지 공통감각인지 모를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공감각 내지 공통감각을 매개 내지 계기로 자연현상과 나와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교감은 작가의 작업과 그 작업을 대면하는 사람과의 관계로 확장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지난날 그 때 나는 구멍 뚫린 방문 안쪽에 있었는가 바깥쪽에 있었는가, 라는 작가의 고백에서처럼 작가의 작업은 시종 존재의 안쪽과 바깥쪽과의 관계와 상호성 문제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작가의 화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한지의 잎들로 가로 지르고 세로 질러진 무수한 방들이며 칸들이며 격자들이며 막들은 바로 그 안쪽과 바깥쪽을 가름하면서 통하게 하는 경계들이며, 투명하고 반투명한 막으로 열려 있으면서 닫혀있는, 닫혀 있으면서 열려있는 경계들이다. 당신은 그 경계 안쪽에 있는가, 아님 바깥쪽에 있는가. 작가의 작업은 그런, 존재론적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