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미 / 너를 떠나보내다
Sending off. 너를 떠나보낸다. 그런데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훨훨 떠나보낸다. 세속에도 이별은 있다. 그러나 보통 그냥 떠나보낸다고만 하지 훨훨 떠나보낸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훨훨 떠나보낸다는 것은 세속에서의 이별은 아니다.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떠나보낼 때 훨훨 떠나보낸다고 한다. 훨훨은 하늘로 떠나보내는 모양새를 닮았다. 새의 날갯짓을 닮았다. 저승에 가면 부디 매인 데 없이 가고 싶은 데 마음껏 날아다니라는 염원을 닮았다.
그렇게 작가는 주검들을 하늘로 훨훨 떠나보낸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산 사람들을 떠나보낸다. 다만 천형을 온몸으로 증명해보일 뿐인 문화생산자들을 떠나보내고, 경제주의의 변방으로 내몰린 잉여인간들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태어나 실험실에서 죽은 생쥐들을 떠나보낸다. 개념 없이 태어나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생쥐들은 마루타답게 그네들의 무의식마저 파고든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내재화한다. 그래서 어쩌다 인간이 잘해줄려 치면 호의를 호의로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은 관성적이어서 그 관성이 깨진 상황에 대한 논리도 이해도 코드도 없다. 다만 이승과 저승의 관계만큼이나 다른 세상의 일일 뿐이다.
작가는 처음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라는 주제의 그림을 그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철저하게 무력한 주체를 그 주제는 담고 있다. 그리고 발가벗은 여인이 그처럼 무력한 주체를 대리한다. 여인의 발가벗은 몸은 순수를 상징하고 몰이해를 상징한다. 때로 정조준하기도 하고 더러 무차별 폭격을 가해오는 폭력을 여인은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그 의미를 읽게 해주는 코드도 없다. 다만 땅이 하늘을 그리고 하늘이 땅을 보듯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따름이다. 그렇게 발가벗은 여인과 폭력적인 현실과의 관계는 사막 한 가운데서 독수리에게 새끼를 탈취 당한 개의 상황논리로 변주되고, 그리고 마침내 근작에선 실험실의 생쥐의 상황논리로 확대 재생산된다. 여인도 개도 생쥐도 정작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실체며 원인을 모른다는 점에서 일방적인 희생양이며 무지몽매한 희생양을 상징한다. 모든 잘 돌아가는 제도는 하나같이 이런 희생양을 생산한다. 폭력적인 현실에 내어줄, 그래서 폭력적인 현실을 잠재울 희생양이 없으면 건전한 제도도 없다.
작가는 그 희생양들을 애도하고 그 주검들을 위해 대신 울어준다. 그리고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운다. 스스로 희생양 의식이 없으면 희생양에 대한 공감도 없을 것이므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공감 내지 연대에 대한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작가도 공유하고 있는 걸까. 여하튼 작가는 그 주검들이며 희생양들을 위해 만장을 들고 애도의 행렬을 뒤따른다. 만장에는 주검들을 애도하는 산 사람들의 기원과 주술이 글귀로 적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글귀가 조금 이상하다. 글귀이되 읽을 수가 없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이 하고 싶은 말들, 했어야 했던 말들, 하지 못한 말들, 그래서 미처 실체를 얻지 못한 말들을 상징한다. 산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진, 실체를 얻지 못한 그 헛말들이 안쓰럽고 눈물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