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 / 이질적인 것들의 언술


허물과 껍질. 김덕영의 작업은 테이프와 인연이 깊다. 아마도 그 존재감이 희박하고 실체감이 박약한 것들에 맞춰진 작가의 관심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존재감이며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을 조형하는데 테이프만큼 부실하면서 적절한 재료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 부실하고 적절한 재료를 가지고 산처럼 일어서는 숨 쉬는 파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 형상의 껍질을 만들었다. 마치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사람의 껍질을 만든 것이다. 그 껍질은 아마도 페르소나일 것이다. 현대인에게 페르소나는 마치 자유자재로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이며, 상황논리에 따라서 매번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의복과도 같다. 현대인의 삶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고, 그 이해관계가 천의 얼굴을 한 페르소나를 요구한다. 최소한 천 벌의 페르소나를 상황논리와 이해관계에 맞춰 적절하게 제안하고 제시하는 것인데, 만약 그 일에 실패할 경우에 그는 삶의 변방으로 내몰리고 도태될 수 있다.


여기에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이 있다. 상황은 달라졌는데, 미처 그 상황에 걸 맞는 페르소나로 갈아입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상대를 향한 적의와 분노, 냉소와 부끄러움과 같이 무의식 속에나 꽁꽁 숨겨져 있어야 할 것을 부지불식간에 들키고만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사람들을 위로한다. 누구 할 것 없이 가면(페르소나의 어원이 가면이다)이 다반사가 된 세상에서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그러므로 자신에게 정직하고 솔직한 별종들일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미처 다른 페르소나로 갈아입지 못한 사람들, 자신의 속내를 들킨 사람들, 허물을 벗지 못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거나 못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Parasite project, 기생 프로젝트. 작가는 테이프를 손가락으로 말아 작은 원뿔형의 입자를 만든다. 그렇게 만든 입자를 일상 속에 침투시킨다. 기왕의 사물이며 세계를 숙주 삼아 그 사물이며 세계에 입자를 기생시키는데, 가전제품과 의자, 시계와 진공청소기와 같은 사물들이며, 구석과 벽면의 내부와 같은 눈에 잘 띠지 않는 일상 공간들이다. 무슨 이물질 같고 알 수 없는 벌레 같은 이 입자들의 예기치 않은 침투로 인해 친숙한 사물들이며 일상 공간은 졸지에 낯설어진다. 더 이상 내가 사용하던 사물이 아니고 내가 알던 공간이 아니게 된 것. 그렇다면 도대체 이처럼 친숙한 사물들이며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이 알 수 없는 입자들이란 무엇인가. 캐니와 언캐니다. 친숙한 것 속에 잠재돼 있던 낯선 것의 돌발적인 출현이며, 삶 속에 억압돼 있던 죽음충동의 현시다.


Pang project, 팡 프로젝트. 팡 프로젝트와 기생 프로젝트는 서로 통한다. 기왕의 기생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확대 재생산된 것이 팡 프로젝트일 수 있다. 특히 공간설치작업, 이를테면 벽면 안쪽에 테이프로 만든 이물질들을 심어 만든 작업들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상을 갉아먹는 이질적인 계기며 알 수 없는 힘의 실체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고, 그런 만큼 벽면 속에 이물질을 숨기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물질을 숨기기 위해선 공간이 있어야 하고, 벽 위에 또 다른 벽을 덧대는 일종의 가벽을 설치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로써 벽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혹은 누구인가가 있다는 의구심 내지 불안감을 자아내면서 더 이상 예전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일상을 대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


친숙한 것에 기생하는 낯선 것, 그래서 친숙한 것을 온통 낯설게 만드는 기생 프로젝트 중 특히 벽면설치작업이 확대 재생산된 것이 팡 프로젝트라고 했다. 팡 프로젝트는 뭔가가 과포화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터질 때 나는 소리에 착안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 보이는 형식은 대개 그 표면에 크고 작은 균열을 만들면서 그 틈새로 이물질이 배어나오는 식의 벽면 작업으로 표현된다.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언어와 개념으로 재편된 세계이며, 자크 라캉은 이 세계를 상징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미처 언어와 개념으로 환원되지 못한 것들, 상징계로의 편입이 좌절된 것들이 현실의 이면으로 억압되는데 그것이 실재계다. 상징계는 당연히 완전할 수가 없고, 특히 그 자체의 억압적인 체계로 인해 스스로 균열을 만들고 파열을 만든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 실재계다. 잠재적이고 억압적인 것들,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이 터져 나오면서 일상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정하게 한다. 일상을 온통 미심쩍게 만들고 걷잡을 수 없게 만든다. 무엇이 억압되고 무엇이 터져 나오는가. 작가의 작업은 삶을 억압하고 생명을 억압하는 제도와 문명의 관성에 대한 경고처럼 읽힌다. 지금 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고, 땅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적녹색약. 작가는 적색과 녹색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색각이상자다. 당연히 트라우마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트라우마를 작업의 표면으로 불러낸다. 이를 위해 작가는 색각검사표 그대로를 확대해 그린다(엄밀하게는 색깔을 구별할 수 없으므로 여타의 방법을 빌려 여하튼 있는 그대로를 예시한다). 보통사람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보통사람들은 구별할 수 있지만, 적녹색약자는 구별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그림으로 봐서 구별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두 샘플 그림을 대비시켜 보통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적녹색약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상황논리를 거꾸로 뒤집는다. 이번에는 적녹색약자의 눈에 보이는, 숨은 기호를 구별할 수 있는 임의의 샘플 그림을 그려서 제안한 것이다. 당연히 보통사람들은 볼 수도 구별할 수도 없거니와 보통사람들을 기준으로 만든 색각검사표에도 없는 샘플그림이다. 이번에는 적녹색약자에게는 보이는 것이 보통사람들에게는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보통사람들은 볼 수도 없거니와 색각검사표에도 없는 이 임의의 샘플그림을 왜 그렸을까. 보통사람들이 볼 수가 있는 것을 적녹색약자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와는 거꾸로 적녹색약자가 볼 수가 있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이 볼 수가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적녹색약자가 볼 수가 없는 것은 문제가 된다. 바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을 정상성과 정상인으로, 그리고 적녹색약자를 비정상성과 비정상인으로 고쳐 읽으면 작가의 주제며 문제의식이 분명해진다. 주지하다시피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문제는 미셀 푸코가 평생 천착했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푸코는 성 정체성과 성과 권력 담론의 연장선에서 이 문제를 건드린다). 누가 누구에게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판정하고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낙인을 분배하는가. 그 판정과 낙인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닌 가치론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절대 다수의 가치를 반영한 절대 다수의 폭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폭력을 고쳐 잡을 수는 없는 일일까. 볼 수 있다 없다는 문제를 다른 것을 본다거나 다르게 본다는 것으로 고쳐 읽는 것에 그 해법이 있다. 본다는 것은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과 판단과 예기를 동반한 종합적 인식행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인문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탓에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본다. 더욱이 예술에서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보는 것은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층위에서 꾀해지는 핵심 사안이다. 이로써 작가는 정상성과 비정상성과 관련한 사회적 편견이 예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생산적인 계기이며 실천논리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당연시해왔던 것, 이를테면 상식과 합리의 이름으로 수행되던 것들이 때론 심각한 선입견과 편견과 관성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