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한 지도
이선영(미술평론가)
같은 높이로 공간에 둥 떠 있는 섬들, 그리고 도시 구조물들이 이루는 풍경은 정확한 반영 상을 수평면 아래에 드리운다. 고요한 수면에 비치는 풍경의 투영물로 보이지만, 상층부의 구체적 현실과 짝패를 이루는 실재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섬이나 도시를 참조하여 만든 인공 구조물들의 실제 그림자는 따로 존재한다. 그곳은 ‘그림자’가 또 다른 그림자를 낳는 거듭되는 반사의 공간이다. 풍경화 된 구조물이 떠있는 장소에 들어선 관객은 투명한 반사면으로 가정되어 있는 수평선 아래의 공간에 몸을 담그는 셈이 된다. 정신분석학 등에서 보편화된 심리적 지형도에서, 하부의 공간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그래서 풍경은 동시에 심리적 공간이 된다. ‘섬-심리적 공간'이라는 부제로 열리는 조미영의 전시는 한 공간에 여러 차원을 동시에 배열한다. 수평선 위에서 돌덩이처럼 흩어져 있는 작은 대륙들은 그 아래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그 핵심부에서 분출되는 힘을 매개할 것이다.
수평면 위에서도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대상들은 시점에 따라 일렬을 이룬다. 흩어짐과 정렬이라는 양가적 구조와 형태는 무질서와 질서, 무의미와 의미라는 개념 쌍을 파생시킨다. 작가가 심리적 공간으로서의 섬을 발견한 것은 대학생 때 MT에 가서 잘못 내린 섬에서 비롯되었다. 작은 섬의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그녀는 ‘지구는 정말 둥글구나’를 새삼 느꼈다. 계획에 없이 불시착한 그 장소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고, 어린 왕자의 행성 같은 장소가 되었다. 섬과 하나가 된 그녀는 그것을 둘러싼 거대한 우주와도 하나가 된 신비한 체험을 한다. 세상이 확 열린 듯한 이 순간은 작가에게만 일어난 심리적 사건이며, 잊혀지지 않을 현존의 체험이다. 이후 번잡한 지금 여기의 현실을 벗어나, 자신이 비롯된 원초적 시공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은 작업을 추동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흩어진 섬들은 각 개인을 상징하고, 아래의 반영상은 의식이라는 상부구조를 떠받치는 무의식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존재들은 현실계, 또는 집단 무의식 같은 비유로 확장된다.

[섬-심리적 공간](부분), 2009-2010년.
섬이 심리적 공간인 또 하나의 이유는, 이번 작업의 시초가 되었던 것이 공간에 글자를 이루는 여러 획들을 배치하여, 어느 각도에서 보면 하나의 단어를 이루게 했던 이전의 작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꿈](2006년 처음 제작)이었지만 점차 ‘삶’, ‘길’, ‘섬’ 등의 언어-사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언어적 요소가 약화되고 사물 그자체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개념을 이루는 추상적 구조는 사물의 형상을 취하면서 심리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무의미하게 흩어져 있는 사물들이 어느 시점에서 의미로 변하는 순간을 섬에 다가가는 실제의 체험--섬은 멀리서 보면 일렬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가가면 여러 지점들로 흩어진다--과 중첩시킨 것이다. 글자작업은 스티로폼에 아크릴 칼라를 입혔지만, 섬과 도시 풍경의 외피는 버려진 종이박스의 박피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추상은 사물/구체로 변모하면서 야생적인 느낌이 강화되었다.
도시의 폐기물에 남아있는 시간의 흔적은 박스에 있는 4-5계열의 단촐한 색조의 변주를 보여주면서 취약한 스티로폼 몸체를 뒤덮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이질적 재료가 접 붙은 것이지만, 마치 화장안한 맨얼굴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조미영의 작품에서 새로운 실체는 이접의 산물이다. 본질과 접 붙은 반사상조차도 이질적이다. 대칭이 아닌 반전상이기에, 같은 형태를 똑같이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거울상처럼 닮았으면서도 약간 다를 수밖에 없는 반전상은 동일자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끌어들이는 시뮬라크르이다. 건물이나 섬 같은 구조를 그 반전상과 더불어 정교하게 재현한 것들은 육중해 보이는 외관에 비해 가볍다. 마치 얼음이나 바위조각 등으로 이루어진 토성의 고리들처럼, 기기묘묘한 입자들은 얇은 띠를 이루는 부유물처럼 미지의 중심을 향해 공전하는 듯하다.
풍경은 안정된 수평면을 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느 시점에서만 달성되는 것이며, 한곳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 관객에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덩어리들은 공중에 붕 띄워진 어지러운 부유물로 다가온다. 조미영의 작품은 섬이고 도시 풍경이고 안정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그녀의 작품이 물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이기 때문이다. [시영아파트-심리적 공간]은 작가가 유년기를 보냈던 실제 공간을 모델로 했지만, 재건축으로 곧 사라질 것이다. 청년기에 강렬한 현존의 체험을 안겨주었던 섬 역시 사실적 지형은 아니다. 세 공간으로 나뉘어 설치된 작품에서, 섬은 물론 도시도 실재하지 않는 풍경이다. 도시풍경의 경우 스카이라인은 더욱 불안정한데, 도시에 가정된 수평면은 홍수 같은 재난 상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는 실제로 아파트 1층에 살던 어린 시절 스티로폼 둥둥 떠다니는 홍수를 경험했고, 지금도 물이 새는 작업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
도시는 물 근처에 세워지지만, 제어되지 않는 물은 재난이다. 물론 이렇게 계획에 없던 것들은 모든 것이 소수의 이익을 향해 체계화되고 있는 억압적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식의 토대를 이루는 무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유토피아 섬은 물론, 유토피아적 비전으로 구축된 근대도시 역시 폐허와 멀지 않다. 도시 구조물 역시 섬처럼 고립된 인간을 상징한다. 복잡한 각을 가진 크고 작은 덩어리들은 군체를 이루며, 어느 순간 조화로운 우주로 질서화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씩 만들어진 작품들은 어느 날 한데 모여서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그러나 고립은 연결의 선재 조건이다. 고립은 연결을 요구하고, 연결은 다시 고립을 요구한다. 하나의 소우주 같은 자족성을 지니는 섬이나 집은 고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근대에 강화된 공적/사적 영역의 대립은 양 영역 모두를 소외시켰다. 특히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에게 이 재생산 과정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어느 중요한 시기에 모든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도록 한다.
임노동이 아니면 살기 힘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이 그림자 영역으로 후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공적 영역에서 투명인간이 되다시피 한 그녀들은 사적 영역에 보호/유폐되곤 한다. 첫 개인전 이후 근 10년 만에 열리는 이 전시는 작업실이라는 그녀만의 작은 성소에서 제의처럼 수행해왔던 수년간의 작업들을 공적인 무대에 올리는 기회이다. 그것은 단지 제도화된 예술 활동의 재개라기보다는, 그녀로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작업이다. 물론 잃어버린 시간 되찾기는 특정 과거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펠릭스 가타리가 [기계적 무의식]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프루스트의 예를 들 듯, ‘찾기’는 과거에로가 아니라, 창조적 행위 속에서 미래를 구축하고 증식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주체는 자신의 과거와 관련하여 수동적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틈새와 균열 같은 불연속적 공간은 조화로운 연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창안을 도모하는 작가의 제 1 관심사가 되었다.
섬 자체가 육지와 떨어져 있는 불연속적 공간으로, 그것은 고립무원이자 자기 보호적인 공간이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집인데, 우리는 집에서도 섬과 같은 상반된 감정을 경험한다. 사방이 물에 에워싸인 섬은 모태 속의 태아 같은 상태는 잃어버린 낙원이자,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처럼 어디에도 없는 섬이다. 그 섬은 시간 밖에 존재한다. 그것은 ‘무의식처럼 시간으로부터 벗어나’(프로이트) 있다. 조미영은 이 모호한 공간을 현실화하고 심지어는 그 그림자마저도 실체화한다. 이중의 환영은 이중부정의 어법이 긍정이 되듯이 그렇게 관객들 앞에 현존한다. 공적/ 사적 영역을 양극화한 근대에 가정이나 작업실은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이 일어나는 사(私)영역이 되어왔다. 그것들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지만, 상시화 된 무임금 노동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억압적 공간이다. 여성의 영역인 집은 여성이자 작가들에게는 결코 평온한 안식처가 아니다.
심리적 공간의 가시화로서의 조미영의 작업은 그림자, 곧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융)을 긍정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의식 하부의 어두운 영역을 아우른다. 정신분석은 이미지에 무의식의 내용들이 표현된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정신적 상황 전체에 대한 응축된 표현’(융)이다. 조미영의 작품은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상/하의 관계 뿐 아니라, 도시/자연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양자의 관계는 매우 불안정하여, 안정감은 어느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절묘한 균형으로 이루어진다. 조미영의 작품에서 집이나 섬은 단지 어떤 경험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원형적 상징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최근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것들은 융의 저작들’이라고 말한다. ‘융에 의하면 한사람은 섬처럼 홀로 독립되어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심연 어딘가에 단단히 연결되어 공통의 무의식을 기반 위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융의 사상은 의식 속에서는 분리되어 있는 것들이 무의식 속에서는 융합되어 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으며, 삶과 예술 사이에 심연처럼 드리워진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기 위한 작가의 노력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사실 예술가의 영원한 과제란 일상인들에게는 꿈처럼 희미해진 어떤 영역들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조명하는 것 아닌가. 상하 반전상이 하나로 되어 있으며 흩어진 그것들이 어느 시점에서 조화로운 하나가 되는 작품들은 무의식의 세계를 그림자화 하거나 묻어버리지 않고 의식의 세계와 평행하게 존재하게 한다. 양자는 동일한 비중을 가지고 팽팽하게 공존한다. 융의 가설이 적용된 이 ‘심리적 공간’은 분열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조화가 두드러진다. 작품들 각각은 이렇게 하나 된 힘으로 되찾은 시간들이 응집된 산물이다. 그러나 조미영의 작품에서 조화와 화해만을 보는 것도 일면적이다. 그것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적 구조, 그리고 하부 구조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욕망이나 원형이 자연스럽게 표상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섬-심리적 공간](부분), 2011-2012년.
실제로 조미영의 작품에서, 하부의 형태는 상부와 유사한 것이지 똑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전혀 이질적인 것도 아니다. 양자는 표상이 아니라 상응 관계, 선후가 아니라 평행관계를 이룬다. 현대 예술은 그 출발부터 표상적 세계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을 지속 해왔다. 심리학도 마찬가지이다. 가타리는 들뢰즈와의 공저 [카오스모제]에서 고전적 정신분석은 처음 생겨날 때 지녔던 들끓는 풍요로움을 잃어버리고 자아분석, 사회적응 혹은 기표적 질서에의 순응에 다시 초점을 맞춘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것은 요즘 우리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힐링’ 열풍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예술이 단순한 불화가 아닌 것처럼, 화해도 아니다. 무엇보다 예술은 치유의 출발이 될 정상상태가 어떤 것인지 확실치 않다. 거기에는 복귀해야할 원형이 부재하다. 복귀란 시간적, 공간적 선후관계를 전제한다. 그것은 재현주의의 전형적 가정이다.
라깡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재현주의에 근거하는 계층적 질서 대신에, 무의식이나 의식처럼 서로 구별되는 계(order)들이 매듭처럼 한데 얽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새로운 모델에서 어떤 관계망은 유지되지만, 방점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이동된다. 상부구조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하부구조를 가지는 조미영의 작품은 융이나 프로이트의 심층적 모델 대신에, 라깡의 표층 모델로 이동시킨다. 그것은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배후의 실체를 가정함 없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표상적 행위에 의해 드러나야 할 숨겨진 부분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가 풀리면 다른 것도 자동적으로 풀리는 매듭(고리)처럼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페터 비트머는 라깡의 해설서 [욕망의 전복]에서,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조미영의 작품에서 섬이나 집은 든든한 하부구조를 가지는 실체적 존재로 다가오며, 원형이나 집단 무의식 같은 상징을 실재화 하는 고전적 정신분석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조화로운 연속성은 어느 한 시점에서만 달성될 뿐이다. 가까이 갈수록 불연속성은 두드러진다. 오히려 불연속성이 더욱 상시적이다. 개별 형태가 아니라,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관계망이 중시되는 설치작품에서 대상들 간의 간극은 더욱 각별하다. 현대의 정신분석자 라깡도 주체를 빈 곳, 실재 속에 있는 불연속으로 파악한다. 이 부재의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항상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되어감과 관련된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에서 가정된 계층화된 세 질서--상징계/상상계/현실계라는 라깡의 구조는 초자아/자아/무의식이라는 계층을 떠오르게 한다--구조는 이제 주체라는 장에서 함께 모여 작용한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이질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주체의 장에서 서로 만난다. 주체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분리될 수 없게 묶여 있다는 것, 외부는 내부의 외부이며, 다시 내부는 외부의 내부라는 사실은 이 세 질서들이 서로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욕망의 전복]에 의하면, 라깡은 세 가지 질서가 서로 얽혀있음을 매듭의 모델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 주체의 모습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새로운 위상학이다. 라깡에게 무의식은 저 깊숙한 안쪽에 은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도 외부도 없는 구조이다. 그것은 심층의 질서를 재현하는 기하학적 모델이 아니라, 점차 표면으로 변화하고 있는 세계와 조응하는 보다 유연한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내부와 외부의 이원론은 해체된다. 그러나 매듭이라는 상징적 구조화마저도 극복하려는 새로운 정신분석학의 흐름은 어떤 선험적 해석을 불러올 수학적 요소나 보편적인 상(imago)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자인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주체성이란 초월적 형식체계나 상징체계와는 관계없으며, 그것은 원형적이지도 구조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이제 무의식은 억압된 것의 저장소라거나 상징의 장소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재료가 된다.
그것은 은폐되어 있는 깊숙한 장소, 또는 머나먼 옛 시절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새로이 건설되고 창안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구조가 아니라, 지도이다. 특정 장소를 찾기 위해서는 위성항법 장치가 요구될 법한 조미영의 작품 속 섬이나 도시 역시 구조보다는 지도와 더 비교될 수 있다. 이 때 지도는 가타리가 말하듯이 모든 차원으로 개방될 수 있고, 또 찢길 수도 있으며, 모든 종류의 몽타주에 적용될 수도 있다. 수평으로, 또는 비스듬하게 이질적인 것들이 접속하며 리좀처럼 나아가는 도시풍경에서 기계적 무의식은 선명하다. 가타리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우리 주위의 어디에나, 즉 몸짓에도 일상적 대상에도 우리에게 붙어 다니는 어떤 것이다. 그에 의하면 무의식은 미래로 향한 채 가능성 자체, 언어에서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피부, 사회체, 우주 등에서의 가능성을 자신의 핵심으로 지닌다. 욕망은 결코 미분화된, 비-사회적, 비-정치적 흐름이 아니다.
반대로 가장 간략한, 가장 덜 분화된 행동이 외관상 가장 잘 가공된, 가장 의식적인 배치에서 생길 수 있다. 조미영의 작품은 융으로부터 출발(의식)은 하였지만, 작품이 도달(무의식)한 곳은 융이 아니다. 현대도시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어떤 이질적인 구성요소의 집합이며, 이질적인 것들 간의 횡단과 이행이 중시된다. 요컨대 조미영의 작품은 태고의 아득한 신화적 주체가 아니라, ‘기계적 무의식’에 의해 작동되는 현대적 주체의 모습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배치를 구성해 나간다. [기계적 무의식]에 의하면 배치는 우연이나 보편적인 공리계에 굴복하지 않는다. 욕망은 폐쇄되고 추상적인 구조에 영구적으로 의존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고유한 활동에 맞게 인간생활과 사회생활을 기초지우는 것에 있다. 어떤 공통성을 지닌 기호들, 계열 체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조미영의 작품에서 배치란 코드와 영토에 고정되지 않은 흐름들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출전; 송파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