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만든 손

 

이선영(미술평론가)

 

장주영이 근래에 몰두하고 있는 손은 화가로서는 가장 자의식적인 소재임과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이었던 역사적 소재이기도 하다. 작가가 손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2009년 시각장애인들과 공공미술을 진행하면서 손으로 사물을 보는 그들로부터 받은 영감 때문이다. 그들과 공유한 예술적 체험은 시각성보다는 촉각성을 강조하게 했다. 작가는 색감과 명암이 배제된 채 짧은 선의 흐름으로 손을 형상화함으로서, 사실에 가까운 정확한 형태보다는 손이 가지는 기운이나 분위기에 집중한다. 이러한 스타일은 손에 집중하기 전, 꽃을 그린 작품에서도 감지된다. 휘몰아치는 듯한 색선의 추상적인 흐름이 꽃의 실루엣과 겹치는 작품은 붉은 색 입자와 향기 입자를 공간에 확산시키는 듯하다. 여기에서 꽃은 종을 알아볼 수 있는 특정한 꽃이 아니라, 꽃의 꽃다움을 드러낸다.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조형의 언어로 재구축된 또 다른 대상은 꽃보다 더 꽃 같은 미지의 대상이다.

 


 

손 또한 마찬가지이다. 시장판이나 뉴스에서 발견한 다양한 사연을 가지는 손들이 소재가 되지만, 구체적인 맥락은 탈각된 채, 그 자체만을 기념비적 형상으로 고양시킨다. 사진 찍어 놓은 듯 한 사실성을 피하기 위해 투명 필름 지를 겹쳐서 형태를 교란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꿈틀거리는 몸의 움직임이 잠재해 있다. 그것은 또한 손 자체에 새겨져 있는 삶의 두께를 둔탁하지 않게 살려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조명을 받으면 약간 반짝거리는 화면은 작은 솜털 같은 선의 흐름과 더불어 촉각성을 강조한다. 요컨대 그것들은 만져보고 싶은 손들이다. 다양한 기원을 가진 손들에는 다양한 자세와 표정이 있다. 손에 새겨진 지문이 각자 다르듯이, 지문처럼 돋아 흐르는 선들의 방향성은 손을 얼굴 화 한다. 다른 지문이 다른 인간의 징후이듯, 다르게 배치되고 흘러가는 선들이 작품들 간이 차이를 생성한다. 손들은 직설어법을 피해가긴 하지만, 유골함을 든 손은 애도하는 듯하고, 담배를 끼워든 두툼한 손은 고된 노동 사이의 달콤한 휴식을 알려주는 듯하며, 타자를 향해 뻗은 손은 우호적이다.

 

방향을 달리하는 짧은 선들은 벨벳 같은 촉감으로, 손이 행했을 잠재적인 움직임을 전달한다. 모든 손을 무차별적으로 소재로 삼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작가가 애호하는 손이 있다. 그것은 나이 든 노동자의 손이다. 시계를 만드는 장인이나 목수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드러난다. 그들은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손처럼, 손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의 도구를 쥐고 있다. 무엇인가를 힘 있게, 그리고 정교하게 잡을 수 있는 손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 브로노프스키는 [인간등정의 발자취]에서 인간은 엄지를 정확하게 집게에 맞출 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특별한 인간행동이라고 지적한다. 사회 생물학자 데이먼드 모리스도 [바디 워칭]에서 인간의 손이 성공한 비결은 다른 손가락들과 맞설 수 있는 엄지손가락을 개발했다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보행의 부담에서 해방된 인간의 손은 마주 일할 수 있는 엄지손가락을 발전시켰다. 땅이든 나무 위에서든 이동의 노역에서 해방되자, 손은 오로지 조작적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손 한 쌍에 있는 54개의 뼈는 섬세하여, 어떤 로봇도 흉내 내기 힘든, 정교한 자연 창조물의 정점에 있다. 손가락 동작들을 다양하게 조합하여 사용하면 전적으로 새로운 광범한 몸짓과 신호가 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언어이다. 다섯 손가락을 이용하는 일상의 동작은 물론, 수화, 판토마임 같은 장르에서 손의 표현적 힘은 잘 알려져 있다. 장주영이 익명의 손에서 얼굴을 보는 것은, 쌍둥이마저 다르다는 지문이라는 과학적 사실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그보다 더 깊은 유사를 발견한다. 그것은 손과 뇌의 밀접한 관련이다. 손의 움직임이 뇌의 발달을 촉진시킨다는 점은 교육적 경험에서 잘 알려져 있다. 철학자 칸트는 손을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라고 했다. 손 전체는 본질적으로 두뇌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특유의 직립 자세를 통해 손을 대지로부터 자유롭게 했을 뿐 아니라, 뇌의 용적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인간을 동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한 것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행했던 노동이다.

 


 

장주영의 그림에는 노동이나 소통의 수단과 결합된 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인식과 이성의 바탕이 된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여기에서 도구를 쥔 손에 의해 수행된 노동은 인간성의 기원이요, 열쇄가 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동물이 인간이 된 것은 바로 노동에 의해서라고 단언한다. 인간은 주어진 자연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 그것을 부정하는 동물이며, 인간은 자연적인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며 도구와 물건을 만들어서 새로운 세계, 즉 인간적 세계를 건립한다는 것이다. 노동은 자연을 단순히 활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인공화라 할 만큼 자연을 최대한 변화시킨다. 그것이 자연의 정복, 또는 인간화로 나타났다. 노동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경계선이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정의한다. 장주영의 작품 속 노동하는 손은 또한 말을 한다. 두뇌와 손의 관계를 생각할 때 ‘말을 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고 손으로 조작하며 작업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솜털 같은 선의 흐름으로 채워진 장주영의 작품 속 작업하는 손은 대지로부터의 자유, 두뇌와 연관된 숙련성, 언어와 지적 성찰,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손을 암시하면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부각된다. 물론 노동으로부터 출발한,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념은 오늘날 문제시 되고 있다. 휴머니즘 또는 인간중심의 목적론이 다수의 타자를 억압하고 착취한 수다한 예를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날이 손가락으로 축소화되고 있는 코드화된 인간은 노동에 기초하는 인간상, 요컨대 손을 가진 인간 또한 주변화 시킨다. 색 점으로 표현된 지글거리는 듯한 주사선 위에 드리워진 손의 실루엣이 그려진 장주영의 한 작품은 정보혁명 시대에 손이 처한 그림자화를 표현하는 듯하다. 그것은 안녕을 고하는 것일까, 아니면 타자의 복귀를 알리는 것일까. 손이 주변화 된 시점에서, 손을 손작업을 통해 기념비적 형상으로 부활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는, 지엽적인 소재를 넘어 많은 의미를 파생시키는 주제로 격상시킨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3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