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나라, 또는 여러개의 중국

 

회전무대; 중국 현대 비디오 아트 전(2012.12.20-2013.2.24,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what; 신중국미술 전(2.5-3.31, 아르코 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아라리오 갤러리와 아르코미술관에 전시된 중국현대미술 작품들은 대부분 2010년 전후의 최근작들이며, 1990년경부터 부각된 중국현대미술에 대한 전형성, 가령 과장된 표정과 몸짓 튀는 색채, 팝 아트 같은 대중성, 냉소적이고 생경하게 다가오는 사실주의 등으로 각인 된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전의 흐름들은 단순하고 강렬한 인상은 주었지만, 오랜 역사와 광대한 지역성을 가진 그 나라의 문화역량이 충분히 담겨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단면들이었다. 두 전시는 중국현대미술에 대한 고착된 인상을 해체한다. 여기에서 중국은 여전히 미지의 나라로 남아있다. 한편 이 전시들은 중국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어떤 수요에 대해서도 탄력적으로 생산물을 공급할 수 있는 잠재력을 증명한다. 전시된 작품들은 극도로 섬세하고 심미적인 차원부터 폭력적으로 강요된 변화에 대한 역사적 자의식에 이르며, 그 다양한 감수성이 영상과 설치 같은 현대적 매체를 통해서 전달된다. 작품들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미국과 양강 구도의 거대 국가가 된 중국의 현재 진행형의 변화를 미시적이고도 거시적인 차원에서 반영한다. 중국의 현대미술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는 두 전시는 예술가야 말로 가장 강력한 시대의 증인임을 알려준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가장 개인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 작가는 특히 전체주의적 문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20세기 중반 신중국이 성립된 이래, 서구 자본주의와 대립되는 한 축으로 눈부시게 성장해온 이면에는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된 근대사가 있었다. 가상 또는 실제의 적과 대립하는 체제는 강력한 내부단속이 필요하며, 대립의 구도 속에서 헤게모니를 쟁취한다. 그것이 혁명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있는, 어떤 계몽적 의도와 밝은 전망을 가지는 것이든, 대립에 의거한 논리는 결국 그들이 반대하는 적과 닮음 꼴을 이룬다.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와중에, 사회가 아닌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 갔다. 이때 국가는 자본은 물론 폭력까지도 독점하곤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뿐 아니라, 세계시장화에서 중국이 맡은 세계의 공장 역할은 안팎에서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왔으며,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만큼이나 자본의 모순을 노출시킨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진보에 대한 다른 비전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근대화 과정이라는 공통된 흐름에 속해 있다. 20세기의 모더니티는 ‘제국주의, 혁명과 전쟁의 시대’(르페브르)로 요약되는데, 이러한 과정은 중국 현대사에도 적용된다.

 

시대정신이 반영된 두 전시회의 작품들은 중국사회의 모더니티와 역학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미술이다. 전시에 다채롭게 활용된 형식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현대성으로 수렴된다. 현대성은 파괴를 통한 성장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다. 자본주의랄 수도 사회주의랄 수도 없는 어정쩡한 형태는 양 체제가 가질 수 있는 장점뿐 아니라 단점 또한 두드러지게 했다. 빈부격차나 계급사회라는 자본주의 모순에 비효율과 권위주의, 관료주의와 부패 등이 더해지고, 감춘다고 감추어질 수 없는 사회 갈등은 폭력적 결말을 낳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문화혁명이나 천안문 사태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현대미술에서 역사가 반영될 때 마다 등장하는 변화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은, 실제로 자행된 폭력 그리고 수많은 인민들을 희생시킨 강압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은폐하려는 공산당 일당 체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극심한 사회모순과 갈등은 사회의 타자로서의 예술가를 더욱 자극하며, 역설적으로 예술의 비옥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지배적 체제와 길항작용을 하는 다양한 예술의 가능성 자체에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역량과 진면목을 확인하게 된다.

 


Sun Xun_Some Actions Which Haven_t Been Defined Yet in the Revolution, 2011, 12 minutes 22 seconds

 

아라리오 갤러리의 회전무대 전에서 선보인, 중국 현대 비디오 아트에 사용된 매체는 현대에 가속되기 시작한 시간의 흐름을 담기에 적절한 매체이다. 그러나 회전무대라는 전시제목과 반복 재생되는 비디오 아트의 성질은 계단처럼 밟아 올라가는 단선적인 흐름을 영겁회귀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그것은 해방의 의도로 시작되었겠지만 결국 억압적인 선전선동 예술이 밟아왔던 계몽의 역설은 물론, 90년대에 집중적으로 선보였던 하나의 상업적 흐름에 대한 역행의 장이다. 전시장 1층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순쉰의 작품은 중국의 오랜 전통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도 그에 맞는 쓸모로 변모했던 목판화로 만든 영상이다. 목판화 특유의 강한 선과 색채의 대조로 인해, 애니매이션 이라하기에는 너무 거칠게 넘어가는 컷과 컷 사이의 도약에서 급격한 역사 변화에서 야기되는 멀미가 느껴진다. 흑백의 강한 대조와 급작스런 반전이 연속되는 변화의 강도는 물 흘러가는 듯한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과 거리가 있다. 2층 초입에서 상영되는 왕지엔웨이의 작품 역시 역사적 무대에서 느끼는 혼돈이 있다. 장터 같은 떠들썩한 무대를 순차적으로 차지하는 주인공은 각기 전통, 근대, 현대의 의상을 입었다. 그들은 마지막에 한 무대에서 섞인다. 근대의 패러다임인 진보나 발전이라는 이념은 이전의 것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스펙터클한 무대 위에서 연출하고 영상으로 강약의 변화를 준 장면들은 혼재된 현실 속의 혼란과 활기가 공존한다.

 

전시장에 9개의 둥근 달을 띄운 우쥔용의 작품은 수묵화로 만들어진 영상으로, 송나라 시대의 불교경전에 나오는 이상향에 대한 싯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긴 역사에 비한다면 어느 시대보다도 강도가 높은 변화를 강요받았던 근대의 맹목적인 유토피아주의를 여러 개의 중심으로 분산시킴으로서 상대화한다. 왕공신의 작품은 다섯가지 안료를 몸의 일부에 뿌리고 그 변화과정을 기록한다. 몸이라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정제된 무기물과 반응하며 변모하는 과정은 심미적이다. 파편화된 신체와 무기물과의 접속은 죽음을 떠올린다. 그것은 삶만큼이나 죽음과 밀접했던 어떤 시간의 흐름을 미시적인 차원에서 반복한다. 예술 영화처럼 느릿하고 고요한 화면에 서사 또한 불확실한 장펑이의 작품은 자연의 순리에 거스르지 않으려는 또 다른 삶의 패턴을 제시한다. 그것은 전통에 면면이 존재했던 것이지만, 폭력적 근대화를 통해 잊어버렸던 가치로의 복귀이며, 이 복귀는 그자체가 그림 같은 풍경이나 자연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현대적 매체로 이루어진다. 변화는 어느 시대나 있어왔지만, 근대에 와서 ‘경험보다는 기대, 즉 과거보다는 미래의 몫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라인하르트 코젤렉) 불확실성이 높아졌다. 근대의 불확실성은 무질서보다는 체계화로부터 비롯된다. 체계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또한 양자가 대립하면 대립할수록 더욱 하나 된 힘으로 작동된다. 중국의 뉴미디어 작가들은 이 적대적인 힘에 반응하고 있다.

 


아르코 미술관 설치전경, 2013년.

 

신중국미술 전의 작품들은 중국사회에 몰아치는 변화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된 단계를 보여준다. 이 변화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삶의 항시적 조건이 되었으며, 인민들은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현재를 과도기로 여기는 것 또한 현대의 특징으로 지적된다. 현대의 작가들은 체제가 파생시킨 불확실성을 예술의 내적인 과정과 융합시킨다. 충격은 내면화되고 보다 다양한 형식적 장치를 통해 반향 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리후이의 레이저 설치 작품은 공간으로 쇄도하는 붉은 빛이 변화하는 중국의 역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의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냈던 수많은 희생들을 생각할 때 이 붉은 빛의 흐름은 활력과 죽음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먀오샤오춘이 애니매이션으로 연출한 장대한 인류의 대서사시는 서양 미술사의 도상들을 활용하여 여러 시간대가 공존하는 현대의 중국을 표현한다. 미지의 세계로 이끌, 돌고 도는 시간의 원환은 인류 역사를 압축 재현하면서 그 안에 맥락화 된 중국의 역사 역시 끝없이 생성 소멸함을 보여준다. 전시장 가로축을 길게 차지하는 번쩍거리는 왕웨이의 선전 파빌리온은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접붙인다. 물리적인 구조든 정신적인 구조든 구조는 현재를 완강하게 차지하고 있지만, 결국 시간의 시험을 이겨낼 수 없다.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정치 선전용 게시판이 융합된 기념비는 결국은 기념되어야 할 것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기념비의 역설적 운명이다.

 

고풍스러운 서예처럼 보이는 쉬빙의 작품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되어 있다. 전통적 양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지시대상과 의미에 괄호치고, 언어의 형식적 요소를 실험했던 현대 미학이 있다. 이 미학에서는 형식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위앤위앤은 패션 잡지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발랄한 젊은이들을 물거품 형태의 구조물에 배치했다. 구조 자체가 상품을 배열하는 장치와 비슷하다.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다채로운 소비사회와 음침한 권위주의 사회와는 큰 거리가 있는 듯하지만, 소비사회는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윈링의 만화와 같은 가벼운 필법으로 하루의 일상을 스케치한다. 그는 여느 미술가와 달리, 만화책 발간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SNS 등에도 몰두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매체는 자본주의적 소비의 창구가 되기도 하지만, 폐쇄적인 권위주의 사회를 변모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가 몰두하는 매체들은 당과 국가가 아닌, 시민과 사회로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 송이거의 그림에서, 유폐나 공포의 공간을 떠올리는 평면적인 배경 속 벌거벗은 생명의 취약함은 근대적 자아로 다가온다. 천웨이가 어둑한 공간에 연출한 새 또는 천사는 지상에 발을 딛지도 못하고 하늘로 날아오르지도 못한 채 떠 있다. 투명하게 빛나는 정신적 세계와 중력이 작용하는 물질적 세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던 듯하다. 여러 세계를 오갈 수 있었던 전능한 존재는 물질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매몰되어 가는 1차원적 세계를 우울하게 내려다본다.

 

출전; 아트 인 컬처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