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으로 발산되는 차이들

차이의 공간; 환영과 실재, 그리고 반응 전 (2.13-3.7, 갤러리 조선)

 

이선영(미술평론가)

 

동일성이라는 든든한 관념적 지반을 거부한 차이의 공간’(전시부제)에서 모든 것은 불확실성 속에 흔들린다. 기둥들은 공중에 붕 떠 있어 스치는 바람에도 출렁거리고, 빛이 새어나오는 가림 막 뒤에는 바깥으로 뚫린 창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전시장 벽은 저편으로부터 무너지고 있으며, 벽에 걸린 작품에서는 거울의 방같은 무한한 시각적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환영과 실재라는 주제는 아마도 전시회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미술 자체가 실재의 환영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실재와 환영 모두와 관련되는 미술의 장치는 인식론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난제에 속시원히 대답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게임원칙을 최대한 활용하여 질문하는 방식을 변주함으로서, 문제에 새롭게 다가가게 할 뿐이다. 실재는 환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기에, 양자를 명확히 구별하거나 어느 하나가 더 본질이라 할 수 없다. 가상의 위상이 어느 시대보다 높아졌지만, 그림의 떡으로는 결코 배를 채울 수 없고, 굶으면 죽는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동시에 실재는 은폐되어 있다. 환영을 물신화할 때 명목적이고 기능적 사고에, 실재를 물신화할 때 형이상학적 사고에 빠지고 만다. 결국 실재와 환영이란 하나의 두 측면이 아닐까.  

 

 

장유정, [수평선], 2011년.




전시장 초입에 설치된 송준호의 작품은 홀로그램처럼 실재를 공중에 붕 띄워 가상으로 만든다. 둥근 호를 이루며 발처럼 드리워진 장식용 구슬이나 금속체인들은 왕관이나 기둥 모양의 환영을 형성한다. 아래에서 비치는 조명은 환영과 시각성의 관계를 알려준다. 장유정의 작품에서 빛이 새어드는 공간은 두 장의 가림 막인데, 이 이미지의 출력물은 다시금 전시장 벽면에 드리워진다. 작품 뒷면에서 쪼여지는 강한 조명은 실제의 조명과 사진 속 가상의 조명을 구별 불가능 한 하나의 과정으로 만든다. 벽에 걸린 작품을 다시 촬영하여 전시장 벽에 붙인 원서용의 작품은 참조대상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확고한 사진의 성질을 역이용한 환영이다. 여기에서 작품, 또는 현실은 무한히 재반사될 뿐인 복사물로 다가온다. 작품 속 이미지는 의미심장하게도 바퀴인데, 그것은 환영과 실재를 이원론으로 나누기 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하나의 과정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파열되는 벽과 거기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연출한 김덕영의 작품은 관객이 서있는 공간의 벽 저편에서 뚫고 나오는 듯한 장면으로, 교란된 환영/실재의 관계를 통해 위기의식을 자아낸다.  

 

원서용, [wheel], 2011년.




환영과 실재라는 전시 개념어와 연관되어, 지하 동굴처럼 깊숙이 내려가야 하는 어둑한 전시장은 플라톤의 동굴 신화를 떠오르게 한다. 그림자만을 통해 현실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인 동굴의 비유는 신화시대 뿐 아니라, 복사물의 복사물인 현대의 인공물들, 그리고 모든 것을 코드화하여 간접적으로 매개하는 장치들이 편재하는 미디어 시대에도 힘을 발휘한다. 플라톤의 동굴신화에서 햇빛을 향해 몸을 돌릴 수 있는 자만이 가상을 가상으로 인지할 수 있는데, 가상적 외관의 이면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차원, 또는 극적 사건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가상에 복무해왔던 예술은 그 역할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복제매체의 편재화라는 역사상 새로운 단계에서, 자신의 또다른 역할을 발견하길 바란다. 플라톤에 의하면 자연을 모방 하는 미술은 그가 진정한 실체라고 간주하는 이데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흐릿한 반영에 불과하다. 이데아를 모방하는 대상(현상계의 그림자)을 다시 모방하는 미술은 이중의 미메시스를 통해 진리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본질과 현상을 구별하는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진리에 대한 미술의 부차성을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의 진리의 왕국에서 미술은 추방되어야 마땅한 존재이다.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들을 활용하는 이 전시의 작품들은 본질/외관의 세계라는 이분법을 불확실하게 만듦으로서,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위계적 재현주의를 거부한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시뮬라크르를 복권시킨다. 플라톤적 표상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본질/외관 또는 원본/복사본의 구분은 없다. 복사물의 복사물인 시뮬라크르는 모든 정초들을 삼켜버림으로서 보편적인 와해를 가져오지만, 이는 긍정적이고 즐거운 사건으로서 이다. 그것은 발산과 탈중심화를 긍정하는 잠재력이다. 환영과 실재의 다양한 유희가 있는 이 전시에서도 차이의 공간을 여는 것은 오랫동안 타자로서 억압되어 왔지만 현대에 와서 복권된 시뮬라크르이다.  

 

출전; 퍼블릭 아트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