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희, 스쳐지나가는 환영을 붙잡다

작가 변재희는 근작에서 Color Phantasmagoria를 주제화한다. 주마등 같이 변하는 광경, 요술환등, 만화경 같이 변화무쌍한 정경을 의미하는 말이다. 특히 지금의 성인 세대들은 유년시절 만화경에 대한 환상적인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각진 거울조각을 퍼즐처럼 조합해 만든 만화경의 관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모든 이미지가 환상적으로 보이고 실재가 환상적으로 변질된다. 만화경에는 실재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 말 속에 판타지가 들어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이 열어놓는 비전이며 이미지는 하나같이 환상적이다. 마찬가지로 팬텀(유령)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실제 하지 않는 이미지다(이미지란 말은 원래 유령과 귀신, 헛것 혹은 허구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엄밀하게 실제 하지 않는 이미지는 없다. 그렇다면 실제 하지 않는 이미지 혹은 환상적인 이미지란 사실은 관념적인 실재를 그린 것이거나, 심리적인 표상을 그린 것, 이도저도 아니면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실재를 환상적으로 그린 것(나아가 아예 환상적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실재를 플라톤은 환영이라고 보는데, 동굴 속에 비친 그림자 비유가 그렇다. 시종 동굴 속에서 산 사람, 그래서 동굴이 세계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동굴 속에 비친 그림자가 사실은 동굴 밖에 있는 빛이 만들어준 환영임을 알지 못한다. 동굴 안과 밖의 유기적인 관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환영을 실재로 착각한다.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실재를 환상 내지 환영이라고 보는 것으로 치자면 정작 플라톤보다 동양인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친근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장자몽에서 장자는 자신의 꿈속에 나비가 등장하는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의 꿈속에 자신이 출현한 꿈을 꾼 것인지 알지 못한다.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또 어떤가.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은 모두가 다만 마음이 불러일으킨 마음현상(착각 혹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주제를 보면 주마등 혹은 만화경(Phantasmagoria) 앞에 색채(Color)가 붙어있다. 실재를 변화무쌍한 이미지로 만드는 것은 색채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모두가 이 색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데, 색은 색이 아니고 형은 형이 아니고 공은 공이 아니다. 보고 듣고 만져지는 세계는 다만 실재를 가리는 유혹이고 현혹일 뿐이다. 유혹답게 더 컬러풀하고 감각적인 세계의 표면이며 이미지일 뿐이다. 한눈에도 컬러풀하고 감각적으로 와 닿는 작가의 그림은 혹 그 색채의 유혹에 혹하지 말라고 주문을 걸어오는 것은 아닐까. 색채 너머에 있는 실재를 보라고 주문하는 역설적인 그림은 아닐까.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들 중 일부는 지금도 무덤 속에 살고 있고, 티베트 승들은 현세를 내세로 건너가기 위한 수행과정으로 본다. 이 모두가 플라톤의 눈엔 다만 무지의 소산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데아의 창시자답게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실재는 떨쳐버려야 할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기독교는 비록 지금은 애매하지만 그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일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실재는 진정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이 세계는 환상이며 일장춘몽이 맞는 것일까. 노자는 천지가 개념이 없어서 인간을 다만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했다. 인간이 천지를 호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 천지는 인간의 호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념은 다만 인간의 일일 뿐. 그래서 세상과 세상의 개념은 다르고,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러 환상이 이데올로기(이를테면 제도의 논리며 지배의 논리)일 수도 있겠지만, 때론 환상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분명한 것은 실재만큼이나 환상도 실체를 가지고 있고, 실재가 삶의 한 부분인 만큼이나 환상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환상에 변재희의 필이 꽂힌다. 그는 주마등처럼 변하는, 만화경처럼 변화무쌍한 이미지를 그린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그린다.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신념들이 스쳐지나가고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인연들이 스쳐지나간다.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분명한 실체가 없고, 처음에 또렷했을 실체가 점차 그리고 종래에는 최소한의 흔적으로만 남아 흐릿해진다. 그렇게 흐릿해진 흔적들이 모여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룬다. 분명한 개체를 견지하면서도 다른 개체에게 길을 내어준다. 그렇게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향해 열리고, 하나의 인연이 다른 인연을 불러온다. 그렇게 열리고 부르는 개체들의 운동성 혹은 과정이 시작도 끝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인연의 그물을 닮았다. 작가는 그렇게 들어오고 나가는, 어쩌면 자신의 의식을 반쯤 방기한 채로 저절로 들락거리는 것들을 투명하게 쳐다보는, 그렇게 쳐다봐지는 것들을 캡처해 캔버스 속으로 불러들이고 매끄러운 표면 위에 모아들인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매끄러운 표면과 그 위에 얹히는 유기적인 덩어리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구분이 환영과 실재와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현상 내지 현장성을 전해준다. 매끄러운 표면은 환영이다. 모든 텅 빈 캔버스는 이처럼 순수한 환영에로의 초대를 암시한다. 순수한 환영이란 텅 빈 환영이며 환영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미처 시작되지도 않은 환영이다. 그리고 그 환영의 제로지점 위에 카오스를 방불케 하는, 파토스를 떠올리게 하는 스쳐지나간 것들이며 흘러가는 것들 곧 하릴없이 흐르는 생각의 편린들이며 인연의 계기들이 무분별하게 쏘아 올려 진다(마치 지모처럼 세계를 게워내는 프라다 칼로의 자화상 같다).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실재며 보고 듣고 만져지는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처럼 카오스고 파토스며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다. 

나는 혼돈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 밖에 있는 것들을 인식의 안쪽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이며, 그렇게 인식과 무관했던 것들을 기꺼이 혼돈 속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세계는 인식과 만나지는 순간 혼돈으로 변질된다. 생각과 만나지면서 사실은 변형되고, 기억 속에 등재되는 순간부터 현실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변형이며 왜곡은 보기에 따라서 또 다른 생성과정으로(질 들뢰즈의 논법으로는 00되기의 한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런 무분별한 실재에 비해보면 배경화면의 순수한 환영이 속해 있는 세계는 얼마나 고요하고 정적이며 반듯한가. 그런데, 그 반듯한 것이 알고 보면 함정일 수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순수한 환영이며 텅 빈 환영임을, 매끄러운 표면이며 뚫고 들어갈 깊이가 없는 텅 빈 표면임을 되새길 일이다. 매끄러운 표면 위에선 아무런 의미도 정박할 수가 없고 어떠한 운동성의 계기도 작동될 여지가 없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순수한 환영에 해당하는 매끄러운 표면과 감각적이고 현상적 실재에 해당하는 무분별하고 우연한 카오스며 파토스의 소산이 서로 침윤되지 못한 채, 서로 싸안지 못한 채 겉돈다. 

전작에선 그렇지가 않았다. 이를테면 지중해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도시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그리고 특히 춤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배경화면과 모티브와의 구분은 없었다. 모티브는 배경화면과의 긴밀한 상호작용 아래 놓여 있었고, 그 상호작용이 작동되면서 모티브가 해체되고, 종래에는 배경화면과의 유기적인 덩어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지중해는 빛의 알갱이 속에 반짝거리고, 밤을 잊은 도시는 인공조명의 세례 속에 해체되고, 춤사위는 최소한의 흔적으로 남아 여운을 남기며 희미해져갔다(배경화면의 일부로서 동화되어져갔다). 그러므로 어쩌면 배경화면과 모티브와의 분리는 작가의 근작이 전작과 결별하는 가장 뚜렷한 분기점이며 근거일 수도 있겠다. 

해체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상호작용은 해체를 부른다. 그 자체가 유기체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근작은 상대적으로 탈유기체적이다. 근작에선 심지어 화면 위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모티브들마저 마치 기름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모티브들끼리 서로 모이려는 운동성의 계기를 암시한다. 작가의 근작은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카오스와 파토스, 그리고 즉흥성과 우연성의 계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이면에서 이처럼 탈유기체적이고 탈해체적이다. 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곧 몸의 생리를 따라 그린다기보다는 그림 자체의 논리에 따른 인식론적 과정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여하튼 작가의 그림이 이로써 전작과는 사뭇 다른 지점을 짚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작가의 근작은 추상적이다. 모티브를 그리는 품세가 추상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티브와 상호작용하는 배경화면이 없어서 추상적이다. 모티브와 상호작용하는 배경화면은 실제의 전제며 조건이다. 그 전제며 조건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추상적이다. 여하튼 다시, 모티브와 배경화면과의 관계로부터 모티브 자체로 되돌아가 보자. 작가는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의 편린들이며 인연의 계기들을 그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매끄러운 표면 위로 불려나온 생각의 편린들이며 인연의 계기들이 일종의 작은 해체를 이룬다. 배경화면과 유리된 채 자족적인 해체를 형성하고 생성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이며 인연들을 붙잡아 형태를 부여하고 색채를 덧입혀 덩어리를 만드는데, 열린 덩어리를 만들고 흐르는 덩어리를 만들고 걷잡을 수 없는 덩어리를 만든다. 그 덩어리는 전체와 다르다. 부분(엄밀하게는 개체)은 전체를 위해 복무하지도,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여있지도 않다. 그 조합과 집합은 계획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이고 체계적이기보다는 산발적이고 안정적이기보다는 돌발적이고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이고 선형적이기보다는 비선형적이다. 

그리고 이렇듯 우연적이고 산발적이고 돌발적인,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불연속적이고 비선형적인 운동성의 계기들이 리좀을 닮았다. 작가는 구름으로부터 이 그림들의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구름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끊임없이 수축하고 확장하지만 그 운동성의 계기가 패턴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로써 작가는 계통적이고 수목적인 사유방식 대신 연쇄적이고 리좀적인, 횡단적 연계성을 따라 전개되는 사유를, 그 사유의 계기며 과정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