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도는 삶에 대한 예술적 반격

 

 

이선영(미술평론가)

 

 

물레나 팽이를 돌리는 듯한 놀이적 요소에 화사한 색감과 경쾌한 율동감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실은 우울한 소외감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여러 종류의 종이 띠를 돌돌 말아 이런 저런 높이로 돌출시켜 배열한 뒤 바닥에 놓거나 벽에 거는 권봄이의 입체 작품들은 회의나 강연의 지루함 때문에 참석자가 공책 모퉁이에 하는 낙서처럼 무의미한 행위로부터 왔다. 그것은 의식에 대항(또는 대응)하는 무의식의 대답일 수 있다. 그것은 굉장한 명분과 논리를 갖춘 듯 하지만, 결국은 아전인수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지시할 뿐인 공회전하는 담론에 대한 상응물이며, 토론이나 대화를 가장한 독백에 대한 관객의 소심한 반항이다. 장황한 수사로 치장되어 있지만 결국은 자기 이익만을 대변하거나 이미 어딘가에 잘 정리되어 있을 내용을 재현할 뿐인 일방적 과정에 지리멸렬해진 청자는 느릿하게 지나가는 권태로운 시간을 자신만의 행위를 통해 가속시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삶이 강요하는 의미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순환-물의 순환]

 

그 시작을 알리는 무의미는 예술을 통하여 또 다른 의미로 고양된다. 독특함의 영역으로 기대되는 예술 또한 사회의 지배적 논리를 따라 ‘진도’를 나가야 하는 입장이 되다보니, 이런저런 발표로 이어지는 교육적 과정들 또한 견뎌내야 하는 시간들이 되곤 한다. 이러한 고난의 시간은 시스템화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무한히 연장되곤 한다. 소외된 상태를 소외로 인식하지 못하고 욕망하기까지 하는 가치 전도가 오직 타자와의 진지한 대화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인 진정한 배움을 대신하고 있다. 특히나 예술은 동일자의 독백이 아니라, 타자간의 대화인 것이다.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일방성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시도하는 대화이며, 강밀한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예술 작품은 이러한 소외의 과정에 대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말과 온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대화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인가. 작업마저도 독백이나 소외된 노동처럼 행해진다면 그처럼 불행할 일도 없을 것이다. 

 

소외의 과정이 바닥을 칠 무렵, 그로부터 되 튕겨 나오는 어떤 힘이 작동할 수 있는데, 그것이 작업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작업이란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반발력을 다시금 의식화하는 것이다. 권봄이의 작품은 진정한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겉도는 삶에 대한 예술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냅킨, 영수증, 찢어진 노트 등 손에 닿는 주변의 종이 끄나풀들을 돌돌 말면서 시작했던 작업은 마치 불교나 천주교 신도가 묵주를 돌리거나 수피교도들의 회전 춤처럼 잡념을 몰아내는 수행적 행위로 고양된다. 잡음과 잡념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반복적 수행을 통해 비워내는 것이다. 시간 가는지 모르고 하는 작업들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전시부제이자 작품 제목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순환(circulation)’은 의미와 무의미, 의식과 무의식, 삶과 예술 등등 상호간에 편차가 있을 수 있는 과정에 어떤 흐름을 만들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때 순환(반복)은 차이로부터 발생, 추동된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된다. 권봄이의 작품에서는 감기 뿐 아니라, 빼기도 중요한 과정인데, 빼기를 통해 반복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 

 

내밀한 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빼기는 무한한 사물의 겹에 드라마틱한 리듬을 부여한다. 그것은 내부의 무엇이 밖으로 밀고나온 것이지만, 권봄이의 작품에서 안과 밖의 관계는 하나의 과정에 대한 두 측면이다. 그녀의 작품은 굴곡을 통해 안과 겉이 수시로 서로의 자리를 바꾸기 때문이다. 흐름의 막힘은 모든 차원의 병폐를 만들어내기에, 순환은 치유, 더 나아가 자유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부조작품에서 손가락 한마디 크기로 말려진 동글동글한 단위는 군집의 형태를 이루면서 증식한다. 선으로 만들어진 원의 덩어리들 사이를 흐르는 또 다른 선들은 색과 밝기의 차이를 통해 끝없는 흐름을 가시화한다. 순환은 형태와 색채, 그리고 행위 자체를 통해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정신적 차원까지 확장된다. 전시된 작품은 좌대나 바닥에 놓는 것과 벽에 거는 작품으로 대별된다. 부조는 단위로 만들어진 군집된 형태의 구성이다. 작은 원형의 변형들이 리드미컬하게 구성된 부조작품은 다채로운 색상의 경연장이다. 

 

밝고 채도가 높은 파스텔 톤의 색상으로 이루어진 부조는 조각에서 억압되곤 하는 색을 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극복한다. 포도상 구균이나 세포분열을 떠오르게 하는 단위구조의 이합집산은 입체적인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 제목 또한 [순환-반복적인 드로잉]이다. 이 ‘드로잉’들은 마치 자동기술처럼 명확한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행해진다. 삼원색은 물론, 주홍, 연두, 민트 같은 화사한 바탕에 작은 동그라미들의 배열은 자연의 여러 차원에서 벌어지는 순환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마치 전능한 존재가 미리 감아놓은 시계태엽처럼 착착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미세함이 살아있는 결은 빙빙 돌아가는 움직임의 환영을 제공한다. 가령 작품 [순환-물의 순환]은 물방울이나 물거품 같은 둥근 형태들이 푸른색 계열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둥근 포말을 밖으로 튕겨낸다. 인간의 감성에 영향력이 큰 색은 상징적인 차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노랑계열의 그라데이션으로 이루어진 [순환-긍정, 희망], 푸른색 계열의 작품 [순환-신비, 차분함], 녹색 계열의 작품 [순환-조화, 자연], 붉은 색 계열의 작품 [순환-활동, 정열]이 그것이다. 

 

각각의 색은 꽃, 물, 산 같은 구체적 형상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상징적 개념이나 추상적 장식을 넘어서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마치 종이로 까는 색연필처럼 원추형으로 뽑혀 나온 원통들은 자라나는 형상이다. 그것들은 식물의 새순, 또는 동물의 돌기들을 떠오르게 하며 촉각을 자극한다. 권봄이의 작품에서 반복과 차이는 재현이 아닌 과정과 생성에 방점이 찍혀있다. 반복에 의한 차이는 종이 색 그자체로만 날 것으로 제시되어 있는 입체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조작품과 달리, 끝맺음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가변적 크기의 [순환-생각의 순환] 시리즈는 둥근 중심부분이 외곽으로 갈수록 각이 생긴다. 손노동으로 집적된 선-면들은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가 아니라, 예측될 수 없는 각을 형성한다. 중심부분 또한 위 아래로 돌출되면서 아래가 움푹 패인 울뚝불뚝한 도자기부터 종교적이거나 초현실주의 풍의 건축, 망망대해 위의 섬을 떠올리는 다양한 형상이 만들어진다. 놀이 또는 노동에서의 리듬을 물질화하는 재료인 종이는 인공적일 수 밖에 없는 예술작품에 자연스러움을 부여한다. 

 

[순환-생각의 순환]에서 얇은 면들로 만들어진 묵직한 덩어리는 물로만 접착되어 있다. 다양한 전자적 인터페이스에 의해 사라져 가는 매체인 종이는 무한한 겹을 통해 오래된 책자 같은 사물이나 고목의 나이테 등을 연상시킨다. 나무의 섬유소로 만들어지는 종이자체가 롤의 형태로 생산되므로, 작품은 원래의 형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전시주제인 순환은 종이의 원초적인 재료가 가지는 나무의 재생적 특징으로 소급된다. 새봄이 되어 고목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다시금 시작되는 삶, 주기적으로 재생하는 우주를 상징한다. 나무는 지하와 지상 등 서로 분리된 차원들을 연결하며 끝없는 변화를 통해 지구의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원소들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권봄이의 작품에서 생명을 순환시키는 기제는 지식의 순환 또한 동반한다. 작품 [순환-생각의 순환]의 종이 띠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글자들은 관객이 그 내용을 읽을 수 없는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비록 대단한 의미를 가진 내용은 아니지만, 사소한 시간들을 수렴시키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동심원구조에 실린 말들은 메아리 같은 울림을 준다. 권봄이의 작품은 색-소리-형태-질감 등이 어우러져 공감각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종이 띠는 그 원초적 재료인 나무처럼 자신 속에 글씨를 간직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나무는 그것을 자연적으로 저장하고 기억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저장하고 기억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나무는 전달의 매개자로 저장의 울타리로, 기록의 표면으로 경이로운 변신을 거쳐 왔다. 나무는 전달, 이송, 기억의 수단이다. 나무는 종이로 생산되어 인간지식의 획기적인 전환인 인쇄의 시대를 열었고 인간의 말들을 축적해왔다. 마찬가지로 섬유소 덩어리에 인간의 기억을 뒤섞는 권봄이의 작품은 책보다는 스크롤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관객은 책의 단면에 새겨진 그 무한한 겹을 보도록 배치된다. 이때 생명의 나무는 지식의 나무가 되고, 신화의 역사로의 전이가 시작된다. 실낙원의 신화가 말해주듯이 역사의 시대는 비극을 낳았고, 생산과 진보를 통해 비극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예술은 오래된 종교처럼 다시금 최초의 시작으로 회귀를 통해 치유를 도모한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근원을 향한 향수는 곧 종교적인 향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종교적 인간은 세계가 생성의 상태에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거룩하고 강력한 시간은 곧 근원의 시간이며, 실재가 창조되고 처음으로 완전히 표현된 평정한 순간이므로 인간은 주기적으로 그 근원적인 시간에로 돌아가고자 추구한다. 종교적 인간은 거룩하고 파괴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주기적으로 침잠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둥글둥글 말려져 형성되는 권봄이의 작품은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직선적 시간이 아닌 순환의 시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원과 같은 사이클--‘kyklos’는 원을 나타내는 그리스어라고 한다--을 가진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순환적인 무한한 시간에 대한 개념은 우주적 주기에 대한 범 인도적 개념에서 발견되며, 이 순환의 시간 속에서 세계는 매우 빠른 리듬으로 태어나서 쇠퇴하고 소멸했다가 다시 태어난다. 

 

혼돈, 그리고 새로운 창조에 의하여 이 혼돈에 종말을 고하는 우주창조가 주기적으로 재연된다. 삶은 동일하면서도 변화된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비롯된 때와 곳으로의 회귀는 선적 사유로부터 비롯된 현대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다. 권봄이의 작품이 지향하는 순환은 역사의 어느 순간 단절된 원환을 다시 잇는 것이며, 진보와 생산에 의해 단절된 자연의 흐름을 연결하는 생태적 사고를 표현한다. 현대성의 모순이 폭발하고 있는 오늘날 단선적 역사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영겁회귀의 사고가 부활하고 있다.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자신의 시대에 성행하고 있는 직선적 진보를 믿는 소박한 개념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 역사를 순환운동이나 영원회귀의 운동으로 서술한 니이체의 예를 든다. 니이체가 영원회귀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끝없이 굴러가는 바퀴의 이미지를 들었다면, 21세기의 젊은 작가는 종이 스크롤을 통해 더욱 자연의 이미지에 근접시킨다. 

 

그러나 양자가 영겁회귀, 즉 ‘이미 무한히 그 자신을 반복하고 유희하고 순환적 운동으로서의 세계’(니이체)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니이체의 영겁회귀 사상이 삶에도 주는 교훈은 ‘우리는 삶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삶의 가장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삶을 그대로 반복하고 싶을 정도의 성취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긍정적 사고이다. 질 들뢰즈는 [니이체, 철학의 주사위]에서 영원회귀는 능동적 생성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조그맣고 사소한 반동적 인간은 회귀하지 못할 것이다. 생성하는 것만이 회귀할 수 있다. 영원회귀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변형과 연결된다. 영원회귀는 동일성에 대한 사고가 아니라, 절대적 차이에 대한 사고인 것이다. 이 원칙은 다양성 자체의 재생산을 말한다. 권봄이의 작품이 추구하는 순환, 그것에 내재된 영원회귀는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