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용, 존재의 원형으로서의 물
금강 산수, 수류화개, 흐르는 물처럼, 물 위의 산수, 그리고 물은 물만이 아니다, 에 이르기까지 송필용이 그린 그림의 주제나 제목에는 어김없이 물이 들어있다. 그림도 그렇고 주제나 제목도 그렇고 물이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고 지배하는 형식요소이며 의미내용임을 알겠다.
세상의 거개는 물로 돼 있다. 생명이며 자연이며 존재의 주요 성분이 물이다. 그래서 물을 그린다는 것은 생명을 그린다는 것이며, 자연을 그린다는 것이며, 존재를 그린다는 것이다. 생명이며 자연이며 존재의 주요 성분에, 본질에, 생리와 생태에 그림을 일치시키고 자기를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흐르는 물을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물의 존재에 나의 존재가 흡수돼 덧없이 사라지고, 지워지고, 무화된다. 그렇게 나는 물에 동화되고 물과 혼연일체가 된다. 그렇게 그림에 일치되고 자기에 일치되는 물은 물질적이고 정서적이고 관념적이다. 물의 질료와 물의 감성 그리고 물의 관념을 싸안는다는 말이다. 물은 실체가 있으면서 없고, 형태가 있으면서 없다. 그럼으로 물을 그린다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을 통해 실체가 없는 것을 그리고, 형태가 있는 것을 통해 형태가 없는 것을 그린다는 것이다. 가시적인 것을 매개로 비가시적인 것이 드러나게 하는, 질료로 하여금 관념의 표상이 되게 하는 매개체로서 물만한 것이 있을까.
작가는 바로 이처럼 질료 위로 관념을 범람시키고, 정서를 범람시키고, 신화를 범람시키고, 상징을 범람시키고, 서사를 범람시키는 물을 그리고 싶다. 자연이며 존재 위로 흘러 넘쳐 그 본성이며 본질을 배반하면서 아우르는 물의 이율배반과 아이러니(다른 말론 물의 포용력?)를 그리고 싶다. 물의 흐르는 본질이며,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는(아님 아예 실체가 없는?) 본성을 그리고 싶다. 그렇게 자연이며 존재의 원형을 그리고 싶고, 생명의 원형질이며 나아가 아예 생명 자체를 그리고 싶다.
작가는 담양의 소쇄원 근처에 20여년 넘게 둥지를 틀었었다. 그리고 미처 개방되기도 전에 금강산을 찾았었다. 그리고 그 찾음은 이후로도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금강산을 지키는 사병이 작가를 알아보고 인사와 농담을 건네올 정도로 금강산의 구석구석이 작가의 의식이 되었고 몸의 일부로서 자리 잡았다.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간절했고 그토록 그리웠을까. 삶은 찾음의 연속이고 찾음의 여정이다. 하물며 감각적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더불어 사는 작가에게 그 찾음의 여로는 그림의 이유이며 삶의 이유와도 같다. 여하튼 이런 인연과 연유로 소쇄원과 금강산은 작가에게 특별한 장소로 아로새겨졌고, 그 풍광과 풍물 중 특히 물에 필이 꽂혔다. 알다시피 소쇄원과 금강산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독 물에 경도되어진 이유는 이런 외경보다는 작가의 내경에서 찾아져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외경이 내경이 되고 내경이 외경이 되는, 외경이 내경 위로 내경이 외경 위로 범람하면서 그 경계를 허무는 어떤 차원이 열리는 경우를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외경 위로 내경을 밀어 올리는, 외경으로 하여금 내경의 표상이 되게 하는 어떤 비전이 열리는 것이고, 이때의 차원이며 비전을 열어주는 매개체가 물이다. 그렇게 작가는 물을 그리고 있었고 물(아님 존재 혹은 그리움?)의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감각적인 물이며 무의식적인 물을 그리고 있었고, 현상적인 물이며 관념적인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이처럼 작가에게 물은 진즉에 감각적 현실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님, 감각적 현실의 대상을 아우르면서, 싸안으면서, 그 대상을 넘어 자기에게 삼투돼오는, 그리고 그렇게 어떤 차원이며 경지를 열어 보이는 대상이었다. 그렇게 물은 감각적 현상을 넘어 존재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고, 무의식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고,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에다가 비유한다. 감각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현실을 빼닮은, 감각적 현실에는 없는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감각적 현실의 물을 그리면서, 사실은 존재의 원형이며 그리움의 원형질과도 같은, 감각적 현실에는 없는 물을 그린다. 세잔은 그림을 그릴 때, 특히 생 빅토와르 산을 그리는 동안 불러도 듣지 못하고 얼쩡거려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가 잊힐 정도의 몰두와 몰입을 통해서 주체와 대상이, 주체와 객체가, 주체와 타자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연속되고 연동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우주적 살로 가득 채워져 서로의 몸의 일부인 생 빅토와르 산을 그릴 수가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자기의 몸의 일부인 물을 그리고 있었고, 그 속에 자기가 풍덩 빠진 물을 그리고 있었고, 물이면서 동시에 자기이기도 한 물을 그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풍경의 일부이며 부분으로서의 물이 아니라, 물 자체를 그리고 있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근작에서의 변화된 양상에 대해서 말해준다. 이를테면 비록 소쇄원이며 금강산과 같은 실재하는 장소가 있지만, 그 장소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실재하는 장소(혹은 세계)를 매개로 익명적인(아님 있을 법한, 혹은 가능할 법한) 장소(혹은 세계)를 그린다. 전통적인 산수화가 실경을 구실로 사실은 이상향(작가의 경우엔 존재의 원형이며 그리움의 원천)과 같은 관념을 투사하고 열어 보인 경우와 같은 이치이다.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이처럼 익명적인 산수는 산수보다는 물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원경에서 근경으로 변화하면서 물 자체에 대면케 한다. 모든 근접시점은 일종의 사물 초상화에다 비유할 수가 있다. 관계의 망 속에서 사물대상의 포지션을 가늠하게 하는 대신, 사물대상 자체에, 물 자체에 직면케 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물의 본성이며 본질에 주목하게 한다. 더욱이 올 오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하튼 물이 전면적으로 육박해오는 작가의 그림에서와 같은 경우라면 나와 그림, 나와 물의 경계마저 사라진다. 화면의 가장자리가 없는(사실은 없진 않겠지만) 아이맥스 영화가 주는 현실감을 획득한다고나 할까. 그저 시각적 착시라기보다는 의식의 착시(아님 착각 아님 동화?)에 비유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물을 매개로 물 자체에 주목하게 하고, 물의 메타포를 일깨워줄 수가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그림을 보는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물의 의미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확장되고 심화되고 변주되게 할 수가 있었다. 이를테면 거울과 같은, 월인천강과 같은. 월인천강에는 물거울이 등장한다. 물이 곧 거울이다.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의미이다. 혹 작가는 그 강이며 물을 통해서 정작 물보다는 달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질료를 통해서 미혹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거울(물)에 비친 달을, 말하자면 존재의 원형이며 그리움의 원천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리고 있는 물은 물이면서 거울이고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