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유력한 것이 존재의 원형을 향한 그리움일 것이다. 주기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는 연어의 생리 같다고나 할까. 여기서 태어난 곳은 죽는 곳과 같다.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의 유래가 같고, 삶이 기원한 원천과 죽음이 거둬들이는 귀결이 같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윤회의 바퀴처럼 삶과 죽음이 무한 연속되면서 교차된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존재의 원형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 띠며 바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이며, 존재가 유래한 원천으로 거슬러 오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원형으로서 뫼비우스의 띠와 윤회의 바퀴가 제시된 것이지만, 여기에 또 다른 원형으로서 최초의 어둠이며 카오스(창세신화)를, 유년(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상상계(자크 라캉)를, 옴파로스(움베르토 에코)를, 자궁을, 물을, 달을, 세계수를, 그리고 침묵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원형들은 제각각 다르지만, 어쩌면 궁극적으론 같은 곳(혹은 것)을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기엽이 제안하고 있는 혹은 천착하고 있는 원형으로서 특히 자궁과 침묵이 주목된다. 자궁이 말 그대로 존재의 원형적인 형태 곧 꼴이라고 한다면, 침묵은 자궁의 생리며 언어용법 혹은 소리가 되겠다. 자궁이 우주와 생명이 배양되고 잉태되던 순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면, 침묵은 언어가 배양되고 잉태되던 순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침묵은 시를 배양하고 잉태한다. 그러므로 시는 자궁의 언어이며 소리다. 그 소리는 미처 언어를 덧입기 전의 언어이며 의미화 되기 전의 의미 혹은 선의미들로, 이것과 동시에 저것을 의미하는 그리고 극과 다른 극을 동시에 아우르는 의미의 씨앗들로 수런거린다. 그 생리며 용법은 이분법과 양비론과 결정론을 넘어서고 모순율과 이율배반이 자연스럽다. 어쩌면 더듬거리는 언어로 사물과 현상의 표면을 겨우 핥을 수 있을 뿐인, 그러면서도 오히려 그래서 더 성공적으로 사물과 현상의 본질에 정박하는 예술의 비정상언어가 꼭 그럴 것이다(하이데거의 예술적 진리).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이미지 시이며 물화된 시의 또 다른 한 버전이며 사례로 보인다.
성녀의 자궁. 성녀의 자궁은 각각 소리작업과 유리조형작업,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아기 울음소리와 단순 반복되는 루프의 저음을 질료로 하여 양수로 가득 찬 자궁을 형상화한 작업이며, 인간사의 시작과 끝을 조형화한 작업이라고 했다. 여러 개의 드론 루프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화음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 몽환적이고 비일상적인 느낌을 주며, 아마도 수중에서 이와 유사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양수가 수중인 만큼, 그것도 원형적 수중인 만큼 그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중으로 잠수하는 사람들은 양수를 헤엄쳐 자궁으로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했다, 는 과거형의 기술은 작가의 텍스트를 그대로 끌어오거나 참조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독자인 필자는 지금 저자의 텍스트를 읽고 있다. 독자의 지평과 저자의 지평이, 독자의 텍스트와 저자의 텍스트가 융합(가다머)되면서 저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오롯이 귀속되지는 않는 제 삼의 텍스트가 짜이고 있는 것. 미셀 투르니에는 저자의 텍스트를 흡혈박쥐에 비유했다. 책을 펼치면 흡혈박쥐로 화한 활자들이 날아올라 독자의 피를 빤다. 흡혈박쥐들이 독자의 어디를 어떻게 물어뜯을지 알 수는 없다. 여하튼 그렇게 저자의 피와 독자의 피가 하나로 섞인다. 책을 펼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며, 책을 펼치는 순간 비로소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책은 이미지와 통하고 텍스트와 통한다. 책이 이미지고 이미지가 텍스트다. 그렇게 나는 작가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읽으면서 독자로부터 또 다른 저자로 이행한다(롤랑 바르트의 작가적 텍스트).
이 작업은 유리를 소리로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 동명의 유리조형작업과도 통한다. 피에르 만조니가 풍선을 불어 예술가의 숨이라고 이름 붙였다면, 작가는 유리를 불어 성녀의 자궁이라고 부른다. 성녀의 자궁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유리 배 속에 숨, 숨결, 호흡, 아니마, 기, 말씀(로고스), 그리고 영감과 같은 생명의 원천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부응하고 부합하기라도 하듯 작가는 성녀의 자궁이 생기로 풍만한 쾌락(주이상스? 고통스런 쾌락?)이자 원초적 불기에 대한 추억이라고 했다. 원초적 불기에 대한 추억? 여기엔 어떤 원형적 경험에 대한 추억이 감지된다. 이를테면 원초적 불기는 원초적 빨기가, 그러므로 구강적 욕망의 기억이 전이(혹은 전치)된 경우로 볼 수는 없을까.
이처럼 성녀의 자궁에는 에로티시즘의 추억이 내장돼 있다. 그러면서도 성의 관념을 넘어선다. 말하자면 성녀의 자궁에서 성녀는 남성과 여성의 성을 초월한 존재로 이해되어져야 하고, 양성간의 관계에 의하지 않은 무염수태란 점에서 성녀의 자궁은 우주가 탄생하고 존재가 유래한 어떤 근원적인 차원이 열리는 계기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존재의 원형 같은. 아님 세계의 중심이며 배꼽(옴파로스) 같은.
혀뇌. 꿈에 그녀가 와서 두개골을 열고 그녀의 혀로 나의 뇌를 핥았다. 다시 에로티시즘이다. 핥는 동작과 연관해볼 때 혀는 최소한 감각기관을 핥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논리기관인 뇌를 핥는 혀의 맛은 어떨까. 도대체 혀가 뇌를 핥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김영하는 손끝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도 연필로 꼭꼭 눌러 글을 쓰는 김훈이라면 연필 끝으로 생각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혀뇌는 아마도 혀로 생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혀로 생각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행태며 꼴이 적어도 논리 이전의 것임을, 그리고 논리를 아우르면서 넘어선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임을 선언하거나 예시한 경우로 볼 수는 없을까. 그렇게 작가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맛을 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쾌락과 통한다(여기서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꿈의 조건과, 꿈꾸는 꿈을 꾸는 꿈을 꿈꾸는. 꿈이 등장하고 침대가 등장한다. 다시 에로티시즘이다. 꿈은 욕망의 우회로라고 했다. 현실에서 욕망은 현실원칙에 부닥쳐 좌절된다. 그렇게 좌절된 욕망이 꿈속으로 숨어들어 자기를 실현한다. 침대 속으로, 잠 속으로 잠수해 자기를 실현한다. 욕망과 꿈과 침대와 잠(그리고 여기에 침묵과 실어증과 판단불능이)은 하나같이 현실원칙에 반하는 계기들이란 점에서, 현실로부터 현실원칙을 몰아내는 공모의 계기들이란 점에서, 현실원칙의 빗장이 풀리는 계기들이란 점에서 하나의 계열로 묶인다. 이처럼 욕망은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나 겨우 자기를 실현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은 이미 욕망이 아니다. 욕망은 현실이 아닌 꿈의 몫이다. 욕망은 현실 속에서 자기에 부응하고 부합하는 형식을 찾지 못한다. 그럼에도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욕망을 쫓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삶은 현실 속에서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착각일지도 모르고, 착각된 욕망일지도 모르고, 착종된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런 꿈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고, 그런 욕망들이 첩첩이 중층화 돼 있다. 물안개 같기도 하고 몽정(아님 사정) 같기도 한 꿈꾸는 침대 속에서, 서로 반영하는 겹겹이 포개진 거울(아님 거울들)로 구조화된 인드라망 속에서, 현실과 꿈의 갈림길에서 나는 불현듯 길을 잃는다.
물과 안개와 유리와 소리. 작가는 비를 신의 사정이라고 했고, 구름을 잠재적인 사정이라고 했고, 안개를 실패한 사정이라고 했다. 현실원칙에 부닥쳐 좌절된 사정? 몽정? 욕망? 다시, 에로티시즘이다. 조르주 바타이유에게 에로스는 현실원칙에 반하는 위반의 계기이며, 자크 라캉에게 에로스는 실재계의 출현이다. 상징계로 재편된 코스모스에 균열을 내는 카오스의 돌발적인 출현이다. 물과 안개는 화학성분이 같다. 하지만 유리와 물은 같지가 않다. 그럼에도 작가에게 유리는 그 성분이 물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연금술이다. 연금술은 자연과학으로부터 심리학으로 심화되고 시학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연동장치를 매개로 물을 안개로 변질시킨다(성분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므로 변형?). 그렇게 물은 안개가 돼 피어오르고 흘러넘친다. 이처럼 물이 안개가 돼 피어오르고 흘러넘치는 것은 연동장치에 의한 파동 때문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파동은 힘의 일종으로서 역학에 속한다. 그리고 소리도 파동을 만들어내는 힘의 일종으로서 역학에 속한다. 결국 작가의 작업은 물을 안개로서 뿐만 아니라 소리로도 변질시킨다. 안개로 화한 소리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독자적 텍스트와 작가적 텍스트로 구분한다. 저자에 의해 주어진 의미가 결정적인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고, 저자에 의해 주어진 의미가 가역적인 텍스트가 작가적 텍스트다. 작가의 작업은 그 중 가역적인 텍스트를 예시해준다. 그렇게 필자는 작가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또 다른 저자가 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이 역시 또 다른 가역적인 텍스트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은 작가의 작업은 체질적으로 논리학보다는 시학에 가깝다.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불현듯 비를 맞고 싶다. 사정이 그립다. 몽정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다. 불현듯 안개를 내뿜는 탑이 남근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속에서 자궁과 남근이 하나로 만나지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