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꿈(2009)과 꿈꾸는 식물(2013).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함축한다. 적어도 꿈이 작가의 그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며 비중을 알겠다. 그렇다고 꿈을 그리지는 않는다. 혹은 최소한 꿈을 그린 것 같지는 않다. 작가는 꿈꾸듯 그림을 그리고 꿈꾸듯 산다. 산다는 것, 그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삶과 생각과 꿈이 작가의 그림 속에서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의 불투명하고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룬다. 그렇게 지워진 경계 위에 작가의 자화상인 늙은 어린왕자가 서 있다. 지금도 여전히 늙은 어린왕자는 그렇게 서성이듯 삶을 살고 삶을 생각하고 삶을 꿈꾼다.

최인호의 그림은 어눌하고 어설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정겹고 살갑다. 그림에 묘사된 인물은 묘사가 무색할 정도로 대충 그린 것 같고 그리다 만 것 같다. 흙을 되는대로 주물주물 빗어 만든 점토 덩어리를 보는 것도 같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정겹고 살갑게 와 닿는다. 정겹다는 것은 마음으로 와 닿는다는 것이고, 살갑다는 것은 몸으로 와 닿는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고 몸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애써 읽을 필요도 읽을거리도 없다. 저절로 와 닿아서 불현듯 공감을 일으키고 부지불식간에 정감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혹 그새 전설처럼 아득해졌을지도 모를 속사람을 추억처럼 되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속사람? 언어로 호명된 적이 없는 사람이며, 사회와 제도에 내어준 적이 없는 사람이며, 남들이 모르는 사람이다.

그 속사람이 조금은 슬퍼 보이고 외로워 보이고 쓸쓸해 보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만의 방, 저만의 바다, 저만의 일엽편주, 저만의 창, 저만의 거울, 저만의 땡볕, 저만의 풍경 안쪽에서 세상 밖을 조심스레 내다본다.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가 않다. 마치 예각으로 기우뚱한 벽에 불안스레 기대고 선 사람처럼. 일엽편주에 정처 없이 몸을 실은 사람처럼. 온몸으로 땡볕을 마주한 채 웅크린 사람처럼. 그 사람은 표정이 없다. 붓 자국이 표정이고 실루엣이 표정이다. 몸 자체가 표정이고 그림 전체가 표정이다. 몇 안 돼는 색깔과 어눌한 묘사만으로 희한하게 온몸으로 표정을 밀어 올리는 그림을 그린다. 마티스라면 표현이라고 했을 그림을 그린다. 아주 오랜만에 저마다 꼭꼭 숨겨두었을 꿈꾸듯 살고 싶었던 나를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