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 전(3.7--4,28, OCI미술관)-‘맥거핀 디자이어(Macguffin Desire)’
권여현 전에는 ‘코나투스’, ‘창세기’, ‘디오니소스’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된 숲이 등장한다. 질서 잡힌 문명 보다는 무질서한 자연에 가까운 숲은 혼란 속에서 공포와 희열을 동시에 안겨주는 이상적인 장이다. 작가의 의중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을 작품제목은 물론,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빽빽한 밀림 속에 드문드문 박아놓은 기표들, 가령 작품 [라깡의 욕망], [들뢰즈의 리좀], [라이프니츠의 단자] 등은 수수께끼풀이 같은 작품 해석 과정의 키워드가 되리라는 기대를 준다. 작품이란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재현한 것이며, 해석 또한 작품으로 재현된 것을 관객이 다시 재현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가정아래서만, 이러한 기대가 충족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잘 배반된다.

[코니투스의 숲], 유화, 2121년.
동서고금의 명화나 명저를 비롯한 수많은 기표들이 쇄도하는 그의 어지러운 작품들이 아니더라도, 미술사 자체가 이전의 작품에 대한 ‘오독’(해롤드 블룸), 즉 해석의 차이에 의해 추동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명화에 끼워 넣기와 덧칠을 통해 만들어진 1층과 3층의 작품들의 원작들조차도 최초의 순수하고도 투명한 출발을 보장받은 것이 아니라, 거듭 쓴 양피지 같은 알레고리 구조를 가지면서 분열을 거듭해왔다. 호방하게 붓을 놀린 2층의 회화 작품만큼이나, 출력물 위에 가필한 1층과 3층의 작품들에는 짜깁기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에서 해석이 시작되고 귀결되어야할 단단한 지반은 불안정한 구조로 대체된다. 이미 확립된 것을 뒤따라가기 바쁜 이들에게, 이렇듯 아연실색하게 변조된 작품들은 예술이나 역사에 대한 부당한 침해로 보일 것이다. 정도만 다를 뿐,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는 역사에 또 하나의 작품을 추가해왔다. 작가는 해석자와 마찬가지로 권력에의 의지로 진리를 정립해 왔던 것이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사실 자체가 이미 해석이며, 니체와 푸코가 말했듯이 진리와 권력은 불가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이데아 같은 세계를 복제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가정만이 투명한 재현을 가능하게 한다. 권여현이 활용하는 패로디나 패스티쉬 같은 어법은 ‘예술에 있어서 재현을 높이 평가하는 사실주의 심미학에 대한 반동’(린다 허천)으로 평가된다. 예술은 재현이나 해석의 불투명성이 발원하고 수렴되는 매력적이면서도 몽매한 분야 중의 하나이다. 여기저기에서 발췌한 도상들과 기법들로 빽빽한 권여현의 작품은 오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담론의 구조를 가속시킨다. 예전 작품에도 곧잘 등장하곤 하는 [깔대기]는 수집된 코드들이 수렴되고 발산하는 통로 같다. 불투명한 기표들이 산재해 있는 작품들은 오해와 오독이라는, 창조적일 수도 있는 과정에 몰입시킨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기표의 놀이는 리좀처럼 드리워진 가는 선들을 따라 이어진다.
이 선들은 상보적으로 등장하는 거대한 나무나 물줄기와 달리, 관객의 시선을 그림의 표면에 떠돌게 하면서 재현적 깊이를 교란한다. 복잡한 그물망으로 화면 여기저기를 횡단하는 선들에는 필연적 인과 고리가 없다. 그것들은 응집력 느슨한 파편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뻗어나가는 방향이 예측 불가능한 임의적 구조들은 해석자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은폐한다. 온갖 해석이 분분하도록 덫을 치고 그렇게 만들어진 방어막 뒤에서 음흉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것도 작가의 특권 중의 하나이리라. 그것은 수잔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주장했듯이, 해석학적 폭력을 휘두르곤 하는 근대적 지식인에 대한 예술가의 복수이다. 역사의 진행 방향을 확신했던 근대의 역사주의(historicism)는 예술사 또한 어떤 패턴이나 법칙을 따라 흘러간다고 예단했다.

리좀-북, 유화, 2012년.
역사적 발전 과정을 예언하고 선취하는 자가 이 선조적 변화 과정 또한 통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한 전위와 같은 배를 타게 된 근대적 지식인들이 구축해 놓은 미술사의 금자탑은 어떤 선구자에 그 다음 선구자가 뒤를 잇는 다는 식의 선조적 질서를 잃고, 누구나 내키는 대로 꺼내 쓰고 버릴 수 있는 뒤죽박죽의 창고 같은 것이 돼버렸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작가는 질서 잡힌 체계를 전수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구도자의 길과도 교차될 수 있는 카오스의 향연에 학생들과 함께 몸을 던진다. 사진, 퍼포먼스, 영화를 보면, ‘외견상 아폴론적 자아 찾기의 소유자’지만, ‘감성적으로는 디오니소스, 바쿠스적 기질의 소유자’인 유별난 선생 때문에 학생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재미와 진지함이 공존하는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학생들과 나는 미술을 숙명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고, 현대미술의 흐름에 대해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권여현)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사제가 함께 하는 교육-작업-놀이는 고된 노력 끝에 카타르시스를 맞는 도미노 게임 같다. 권여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는 각종 ‘post’ 담론들--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휴머니즘 등--의 주역들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자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까웠던 그들은 플라톤이래 수 천 년 간 이어진 재현의 철학을 붕괴시켰다. 미술사 또한 ‘먼저 그려진 이미지 위해 겹쳐 그려진 동굴벽화 이래 원본이 아닌 시뮬라크룸의 역사’(미셀 카미유)가 되었다. 시뮬라크르가 출몰하는 장인 권여현의 작품은 철학자가 예술가가 되고 예술가가 철학자가 는 혼성적 국면을 증거 한다. 여기에서 근대의 투명한 구조는 불투명한 미로로 해체되고, 화면을 뒤덮는 리좀 같은 구조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아니라, 방황 또는 탈주 어딘가에 걸쳐있다.
출전; 월간미술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