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그린 이야기
이선영(미술평론가)
각 매체의 자기동일성은 무엇인가라는 원칙적 물음을 통해, 타 장르로부터 빌어 왔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하나씩 털어버리고 텅 빈 캔버스로 귀착된 모더니즘의 역사를 거슬러, 원성원의 작품에는 온갖 캐릭터와 에피소드가 들끓는다. ‘캐릭터 에피소드 1’라는 부제로 열린 전시는 그림은 물론 사진, 영화, 소설, 심리분석 등이 깔려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것들을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인 양 붙여놓은 이미지의 연금술이 놀랍다. 관객에게 전해주고픈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서(또는 할 말이 뭔지 몰라서) 그냥 죽 늘어놓고 알아서 챙겨가라는 아카이브나 수집의 스타일과도 달리, 작가는 수집된 도상들을 치밀한 구성을 통해 펼쳐 놓는다. 보기도 좋아야 할 뿐 아니라, 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구성의 난이도를 높인다. 동물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으니만큼 에피소드들은 우화의 속성을 띄고 있으며, 현실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환타지의 속성이 강하다.

[성격의 섬]
그러나 그 에피소드들은 철저히 지인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내용상으로는 현실성이 강하다. 출발이 현실이었기에 환상적으로 표현되었다. 자신 또는 타인의 상상을 방으로 연출했던 이전의 작품에서는 상상의 속성이 강했기에, 사실임직 함을 필요로 했고, 그래서 작품의 형식은 이음매 없는 꼼꼼한 연결망을 좀 더 필요 했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추려낸 이번 전시의 에피소드들은 도약과 비약이 두드러진 환상의 외양을 띈다. 그것은 빈틈없는 선적 서술이나 이해가 아니라, 간격을 이어가는 상상력과 추리를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우화 속 사실주의가 있다. 이는 애초부터 상상으로 시작되고 일관되는 공상 과학물이나 만화가 정밀한 사실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과 다르다. 그런 류의 사실주의에는 핍진성이 있다. A. 아이스테인손의 [모더니즘]에 인용된 핍진성에 대한 정의는, ‘독자와의 계약을 통해 작품은 그것이 자기 나름의 법칙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실재에 충실하고 있음을 독자한테 확신시키려고 하는 것’(츠베탕 토도로프)이다.
그래서 황당한 이야기일수록 리얼리즘적인 언어로 씌여지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를 담기에 너무 힘든 현실은 환상이라는 우회로를 필요로 한다. 사실을 사실로 상상을 상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상상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사실은 상상으로 상상은 사실로 전화되며, 이는 작가와 어떤 인물과의 관계처럼 작품과 관객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철된다. 원성원의 작품은 많은 현대 예술작품의 속성인 독백이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로부터 시작되고 대화를 촉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립된 현대의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유아론적 환상과 달리, 원성원의 작품은 타자를 통해 자기가 형성됨을 잊지 않는다. 물론 타자와의 대화, 즉 나 이전에 존재했던 상징적 우주와 상호작용하는 것에는 자폐적 세계 못지않은 질곡이 있다. 나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만,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외쳤듯이, 타자는 또한 내게 고통을 준다.
기왕에 인생 전부를 걸고 하는 작품, 작업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그와 연동되어 나 자신 또한 이해하며 상호간에 원활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까. 원성원의 작품은 이러한 삶의 필요에 부응한다. 이해가 되면 착종된 관계는 맹목적 운명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타인과의 꼬인 관계를 해결까지는 못해도, 당면한 상황은 견딜만해진다. 비판적 거리감을 가지는 우화라는 형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동물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우면 불편한 이야기도 즐길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와 갈등이 영원히 유예되지는 않는다. 작품은 섬이라는 한정된 상황을 무대로 삼는다. 도망칠 수 없는 섬에서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타협을 봐야하는 것이다. 섬은 또한 한 인물의 내면일 수 있다. 각자는 자신의 마음의 섬에 많은 동물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다른 동물을 내세운다. 타자와의 접면에 좀 더 유화적인 동물을 배치한 인물의 보다 깊숙한 내부에는 맹수가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공작인 척 하지만 본질은 촌닭일 수 있다.
동물은 인간과 구별되는 타자였는데, 동물로 비유된 인간의 성격이란 동일성 내의 타자를 강조하는 것이다. 에피소드들을 묶는 섬이라는 틀 거리는 정원이나 방주처럼 닫힌 소우주로 변주되기도 한다. 어떤 전형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성격은 보다 많은 층위의 이미지를 엮을 필요를 야기했다. 한 전시를 위해 수년간 발품을 팔아가며 여기저기서 수집했던 도상들은 포토샵으로 잘 싸서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사진작품의 경우, 시간을 타는 이야기를 하나의 공간 속에 어떻게 접어 넣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좀 더 자유롭게 그려진 드로잉의 경우 여러 크기의 액자 안에 관련된 상황들을 담아서 공시적으로 배열한다. 작품 제목을 포함하여, 작가가 던져준 시각적 단어들을 단서삼아 최종적 문장은 관객이 만든다. 윈도우 갤러리에는 작업하는 과정이 그대로 담긴 거친 포토 꼴라주가 걸려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이야기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에 대해 장기판의 말과도 같은 계산과 놀이의 규칙이 보인다. 그곳에 배치된 모든 것은 잠정적이다.
‘포스트 잇’처럼 붙여진 ‘샘플’을 통해 본 원성원의 작품은 사진으로 그린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 다양한 구성요소들 만큼이나 열려있다. 지하 전시장에는 이번전시를 통해 유형화한 다섯 가지 캐릭터가 하나하나 구현되어 있다. 그에 앞서 도입부에 해당되는 작품 [성격의 섬]에는 차후에 각각의 섬으로 전개될 여러 성격들을 공시적으로 배치한다. 프레임에는 빠져 있는 핵심적 이야기는 나머지 다섯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프레임 바깥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원성원의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바깥에 있음을 알려준다. 폐쇄된 소우주처럼 보이는 각각의 영토는 탈영토화 된다. 작품 [완벽한 정원]은 원칙 하나만 맞추면 나머지는 대략 넘어가는 얼치기 완벽주의자의 초상이다. 프랑스식 정원을 연상시키는 자로 잰듯한 정원 외곽은 쓰레기 더미로 가득하다.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은 자신의 완벽함을 과시하지만, 어지르고 파헤치는 너구리의 속성을 감출 수 없다.

[완벽주의 자의 망토]
1층의 드로잉 작품 [완벽주의자의 망토]처럼, 자신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망토를 걸친 ‘완벽주의자’의 면모이다. 작품 [졸부의 텃밭]은 유럽식 정원 가운데 바벨탑처럼 텃밭을 일군 졸부의 모습이다. 비온 다음 무너진 절개지 등을 조합해서 만든 허술한 텃밭에서 나온 산물은 보잘 것 없다. 드로잉 작품에서 이 졸부는 공작처럼 꾸민 닭처럼 나오며, 그 앞에는 금으로 떡칠한 농산물을 자랑삼아 늘어놓는다. 작품 [집착의 방주]은 집에 대한 집착이 강한, 그러나 살기위한 집이 아니라 재산으로서의 집에 관심이 많은 투기꾼의 세계이다. 여기에는 한국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로부터 수집된 집을 서로 칭칭 묶은 배들로 표현했다. 이런 맹목적 집착에는 방주를 에워싼 파도처럼 방향성이 없다. 뜨는지 지는지 알 수 없는 해(달)처럼 시도 때도 없다. 집착의 방주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그것들은 불안하게 정박된 채 표류한다. 집착을 표현하는 드로잉 작품에서는 사방팔방으로 뻗는 문어발을 통해 이러한 무차별적 욕심을 표현했다.
작품 [장남의 별 아파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이 큰 어떤 남자의 모습인데, 그의 책임감을 이용하는 주변 인물들의 욕심이 은유적인 도상들로 표현된다. 별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남자는 별 대신에 별처럼 둥근 과일을 얻기 위해 착취당한다. 작품 [자존심의 다리]는 성격이 상극인 어떤 부부의 자존심 대결이다. 불같은 곰과 냉랭한 앵무새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다리를 두고 날선 대결을 벌인다. 이편의 불과 저편의 얼음의 관계는 이 대결적 상황이 녹록치 않음을 예시한다. 드로잉 작품에서 이러한 대결적 관계는 서로 악수를 하지만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손위는 불 아래는 얼음이 서린 상반된 모습이다. 사진작품과 달리, 사람의 도상도 섞어 놓은 드로잉은 좀 더 느슨한 형식이면서도 메시지는 보다 직접적이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기 위해 일점 원근법은 해체되어야 했다. 이 가상풍경에 굳이 원근법이 있다면, H.보슈나 P.브뤼겔의 작품 같은 북유럽의 원근법, 즉 다수의 중심을 가지는 우주이다. 한 인물의 다면적 성격, 또는 여러 인물들의 성격들이 상호작용하는 마음의 풍경, 이 가상적 풍경에는 고전적인 재현을 특징짓는 유기적 총체성과 거리가 있다.
정교한 몽타주도 시공간적 간격들을 숨길 수 없다. 작가는 타인에 대한 어떤 인상을 심증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동물이라는 캐릭터에 명확한 성격을 고정시킬 수는 없다. 진실은 복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 한다. 원성원의 작품에서 창조될 진실은 복잡한 계열을 가지는 분기점들 속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산출된다. 작품의 시공간적 추이를 보면 거기에는 끝없는 갈래 길이 나온다. 관객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주사위 놀이를 해야 한다. 사건이나 사건의 의미는 예측불가능하다. 여기저기에서 수집된 파편들은 명확한 시점과 종점을 가지는 연대기적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생성을 향한다. 단편들의 간격이 남아있는 풍경은 행동과 사건의 동기와 원인을 미리 가정된 하나의 총체성으로 집약하지 않는다. 작가는 미리 결론지은 것을 서술하기 보다는 에피소드적 구조를 통해 진행 중인 사건의 단초를 던진다. 외부의 사건이나 내부의 심상이나 방식은 같다.
부유하는 우화적 단편들은 실재에 직접 접속되어 있다는 환상 대신에, 연상적인 도약을 통해 쪼개지면서 다시 이어질 새로운 인과관계를 도입한다. 사건 또는 의식의 정교한 설계도는 불변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논리적 표상이 아니라, 작가가 현실에서 건져 올린 기호들의 물질적 구체성을 통해서 드러난다. 거기에는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촘촘한 기하학적 구도가 있지만, 구도는 선험적으로 정해진 방향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한 우연적 사건의 파편들에 의해 규정된다.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자르고 붙이는 과정 또한 고정된 동일성의 확인이 아니라, 끝없이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며 뻗어나가게 한다. 원성원의 작품에서 몸의 움직임을 비롯한 아나로그 방식은 코드화 될 수 없는 다양한 변수들이 개입될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시간성은 중요하다. 작품을 시작하게 하고 이끌었던 것이 타자와의 지속적인 상호관계였던 만큼, 생각 또한 운동과 변화의 산물이다. 하나의 장면 안에 존재하는 의미보다도 장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원성원의 작품은 맥락이 어떤가에 따라 같은 동물도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장소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종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는 천국 같은 섬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지옥이 되기도 한다. 잘 정비된 정원은 동시에 편집증의 산물이다. 작품 속 이미지는 하나의 상징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변형 상태에 놓인 논리적 관계들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영화적이다.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들뢰즈의 시간기계]가 말하듯이, 이러한 의미에서의 영화는 ‘이미지 구성 성분이 움직이는 기호적 질료로’(들뢰즈) 이루어져 있다.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한 시간대의 공간에서 다른 시간대의 공간으로 지나가는 무제한적인 서사이다. 시공간적 분절의 논리가 관철된 몽타주를 통해 이미지의 지도가 그려진다. 이러한 지도는 사유의 과정을 시각화한다. 원성원의 작품에서 서사를 이끄는 것은 시간이고, 그 산물이 구성이다. 거기에는 시간의 효과에 관계되는 실험들이 있다. A.A 멘딜로우가 [시간과 소설]에서 인용하듯이, ‘시간은 곧 세상’(세익스피어)이며, 결국 시간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원성원의 작품에서도 시간의 공간적 (재)배치라는 실험은 보다 완전한 표현뿐 아니라, 진정한 현실의 개념까지도 표현하게 해준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시간적(통시적) 방식을 가지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보다 공간적(공시적)이다.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공간은 상징적 내포의 장소이자 행동이나 갈등의 극적인 거점, 곧 장면화(mise-en-scène)가 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늘 순조롭게 결합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미술/소설/영화라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 아닌가. A.A 멘딜로우에 의하면 단어는 복잡하지만 엄정한 순서나 순차의 법칙에 따라 일렬로 연결된다. 언어란 시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선적으로 전진하는 표현형식을 구성하는 연속적 단위로 이루어지는 매체이다. 언어는 연속적이고 선적이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난 두 가지 이상의 경험을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작용하는 정신은 원래 그런 것이 없던 사물에게 논리적 범주와 형식을 부여한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언어는 명증한 분별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공간적이다.
그것을 보는 순서는 소설이나 음악이나 영화처럼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레싱이 ‘물리적 대상의 공존성은 말의 연속성과 충돌한다’고 말한 이래, 시간예술과 조형예술을 분리하는 특징이었다. 이미지와 서사의 차이가 극대화될 때,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 말한 것은 그저 말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A는 A이다’ 라는 식의 동일성의 논리는 명료함 속의 허무주의를 말한다. 모더니즘은 매체와 그 논리적 한계를 지나치게 동일시했다. 그러나 예술적 실험이란 각 매체의 특징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원성원의 작품에서 공간은 시간화를 통해 단지 보여 지는 것을 넘어 말을 한다. 시간은 공간화를 통해 단지 읽히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 공간적 동시성과 시간적 연속성의 절묘한 조화가 보면서 읽도록 한다. 시간성을 가지는 이미지, 즉 이미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동시적 울림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절묘한 교직 덕분에 그녀의 작품은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쓰기가 가능하다. 쓰기를 통해 관객은 새로운 가지 뻗기를 진행할 수 있다.
작가가 작품에 뿌려놓은 씨앗은 독자에 의해 말 그대로 이야기꽃이 피워지길 바란다. 작가가 현실에서 수집한 지표(index)들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데, 이 간격은 관객(독자)에 의해 채워지길 요구한다. 원성원의 작품에서 환상적 장면의 구성성분은 철저히 현실에서 수집된 것들이다. 구성요소는 현실적이지만, 리얼리즘적 서사 형식은 아니다. A. 아이스테인손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 담론은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고 부른 가장 이상적(관념적)인 형태라고 말한다. 리얼리즘은 19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문학 전통의 핵심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 투명한 언어는 ‘언제나 설득력 있는 연속체로 환원 가능한 것’(바르트)으로, 이렇게 체계화, 합리화된 모방주의는 단지 읽기, 즉 소비하기를 넘어설 수 없다. 원성원의 작품에서 작품을 이루는 현실적 지표들은 투명하지만, 그 조직화의 방식은 불투명하다. 그것은 실재에 충실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법칙에 충실하다. 그것들은 완전한 연속체로 통합되면서도 비유기적인 텍스트로 구현된다.

[완벽한 정원]
원성원의 작품에서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들은 폐허가 된 유적지 같은 곳에 재배치되면서 알레고리의 역할을 수행한다. 대상이나 단어에 얽혀 있는 은유적 차이는 중심적 상징이 아니라, 지연된 중심을 가지는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오랜 시간의 흐름에 의해 그 기원이 잊혀 진 폐허는 알레고리의 무대이다. 원성원의 작품에서 반듯한 정원 옆의 쓰레기장, 공사장, 곧 허물어지거나 흐트러질 것 같은 취약한 구조물, 질서를 에워싼 혼돈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A. 아이스테인손은 ‘알레고리스트의 수중에서 대상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는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면서, 작가는 제자리를 이탈한 파편들을 재정비하고, 따라서 이런 파편들이 다른 무엇인가를 지칭하도록 만들어줌으로서, 차이와 타자성을 구축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통해 차이와 타자성을 구축하는 것은 투명한 대화에 의한 통합의 가상이 아니라, 진정한 화해를 가져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