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져 있으면서 채워진 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박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그릇들은 기억을 담기 위한 매개체이다. 그런데 전시부제와 작품제목은 ‘기억 닮기’이다. ‘담기’와 ‘닮기’라는 동음이의어는 그녀의 작품에 그릇이 두개 이상 나타나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크기나 밀도에 있어서 동일한 비중을 가지는 둘은 분신이나 짝패(double)처럼 닮아있다. 겹쳐지는 그 둘은 다른 개체가 서로 다가가는 것인지, 아니면 한 개체가 분열 중인지 애매하다. 마주한 상대는 동일자의 그림자가 아니라 평행의 존재, 즉 타자이다. 타자를 향해 열려있으려는 의지는, 무언가를 담는 캔버스 위에 또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라는 도상이 안치된 박미의 작품 속에서 이중으로 강조된다.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은 플라톤이 말한 원초적 수용기인 코라(chora)처럼 유동적이다. 물론 실제로 움직인다는 것은 아니고, 작품의 형태가 빛나는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런 인상을 준다.

작품 속 도상들이 두개 보다 많아지면 옹기종기모여 수다를 떠는 분위기가, 두개라면 오붓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두 개가 마주한 찻잔의 겹치는 부분이 하트 모양을 이루는 것도 있다. 그릇들이 만남으로서 공통의 경험과 기억을 담고, 서로 닮아진다는 메시지이다. 일상적 경험에서 소통하기 위해 모였을 때 찻잔, 술잔, 음식그릇 등을 앞에 놓게 된다. 빈 탁자 앞에서의 만남이란 얼마나 썰렁한 것인가. 그릇은 마주한 서로를 이어준다. 박미의 중첩된 그릇은 사회적 자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현시된다. 식구(食口)라는 표현이 있듯이, 같이 음식을 먹는 관계는 지척의 인간관계를 알려준다. 같이 먹는다는 것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섭식 행위는 너무나 중요해서, 오히려 의식의 수면 아래 숨겨져 있고 고매한 형이상학적 어조로 포장되어 있지만, 삶 자체가 섭식에 의해 추동되고 있음은 진리 중의 진리일 것이다. 먹는 문제, 즉 먹을 수 있는가,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 누구와 먹는가의 문제는 여러 문화적 장치에 의해 매개된다.
또한 그릇은 그 앞의 인간 뿐 아니라, 그자체로 인간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됨됨이, 역량, 배포 등을 그릇과 비교한다. 박미의 작품에서 그릇은 단지 마주할 뿐 아니라, 중첩된다. 큐빅을 이용한 점묘는 중첩의 공간을 만든다. 두형태의 교집합 부분의 점의 밀도는 더욱 높으며, 단순한 접촉을 넘어서 뭔가 진하게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반짝이는 입자들은 그러한 경험의 결정체들 같다. 물론 그것은 응어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기억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기억의 공유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그릇들은 각도에 따른 변주가 있지만 대개 비워진 상태를 알 수 있는 빈 그릇 다운 모습이 주를 이룬다. 그릇은 빈 공간에 놓여있는 듯, 또는 떠 있는 정적인 형태지만, 그릇의 결을 따라서 회오리 모양으로 겹치는 부분에서는 찻잔 속의 폭풍 같은 정중동의 사건이 벌어지는 듯하다. 서로 완벽히 닫힌 형태라면 이러한 공유의 공간을 만들기 힘들 것이다.
음과 양의 관계처럼, 각각은 불완전하기에 온전한 접속이 가능했다. 어둑한 조명 속에서도 반짝이는 알루미늄과 플라스틱 재질의 자잘한 큐빅들은 잘 닦인 그릇처럼 빛난다. 모노톤 바탕의 점들은 마치 은하수같이 흩뿌려져 있다. 박미의 작품에서 회색, 하늘색, 노랑색, 연분홍, 연보라 같은 파스텔 톤의 화사한 바탕 면에 같은 색 계열로 붙인 큐빅들은 예쁘기는 하지만, 시각적 쾌를 위한 장식적 관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박미는 미술가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한쪽 눈 실명의 상황에서, 촉각성에 관심을 두면서 이 같은 같은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야보다는 물질적 밀도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동일한 형태가 겹쳐 보이는 형태는 시야가 흐려졌을 때 사물의 외곽이 흩어져 보이는 현상이 연상된다. 작가는 먼지나 모래처럼 흩어지려는 것들을 손으로 하나하나 모아 형태를 짓는다. 시야의 불완전함은 작가로 하여금 촉각성에 의존하게 했으며, 손으로 더듬어보고 작업하는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이전의 수화나 손동작 형태의 작품들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관객이 작품을 만지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지각이 어떤 기억을 야기하고, 기억 또한 어떤 지각을 야기한다고 할 때, 박미가 그릇에 담고자 하는 기억은 촉각적이다. 촉각은 시각보다 더욱 근본적인 감각으로, 공감각(synesthesia)을 추동한다. 시력이 약한 이에게 촉각은 또 다른 눈이다. 그들은 손으로 본다. 독특한 질감을 가지는 박미의 작품은 눈으로도 손으로도 만져진다. 촉각성은 그릇에 담길 내용물만큼이나 구체적인 것이다. 촉각적인 미세 입자는 기형과 명암을 만들면서 그릇을 형성한다. 질료는 형식이 된다. 마치 3D 프린터처럼, 그릇에 담겨 있어야할 내용물들이 일어나서 형태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2010-11년에 발표한, 수화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여러 손이 합쳐져서 한꺼번에 동작이 연결되는 움직임의 환영을 보여주었던 작업이, 형태이자 과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담아 전달하는 중성적인 용기이면서도, 그 자체의 물질성을 지닌다.

박미의 작품에서 점묘의 단위는 단지 기하학적으로 찍힌 점이 아니라, 반짝거리는 물질이다. 여러 기형으로 헤쳐 모이는 큐빅들은 전달의 매체임과 동시에 이미지이다. 형태와 색을 이루는 조형적 언어는 수단이며 내용이다. 물론 점들은 추상으로 흩어지지도 않는다. 명확한 선이나 칠해진 색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알아볼 수 있는 참조대상은 존재한다. 그것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친숙한 그릇들이다. 박미의 작품은 현실적 대상을 반영한 것임과 동시에 언어적으로 구성된 현실이다. 내용과 형태의 이러한 일체성은 굳이 뭔가 따로 담지 않아도 이미 담겨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닮기, 또는 담기 위한 그릇은 비워져 있으며 동시에 채워져 있는 것이다. 두 그릇이 겹쳐지는 공간에는 또 하나의 그릇이 형성된다. 작가는 개체와 개체가 중첩되는 곳, 그 사이의 공간에 집중한다. 경계를 섞으며 붙어있는 그릇들에는 농밀한 밀도 속에 공유된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시간적 차원에 놓인 기억은 지나간 것일 뿐 아니라, 도래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로서는 누군가와 함께 쌓은 기억 뿐 아니라, 함께 쌓을 미래의 기억도 중요하다. 여러 개의 빈 그릇은 함께 기억을 만들어 담아낼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 그것은 소통 지상주의 시대의 미덕이다. 그러나 면 대 면, 몸 대 몸이 아닌 인터페이스들 간의 소통이 주를 이루는, 현대의 대세를 이루는 소통 방식은 궁극적으로 자기독백적이고 자기지시적이다. 대화하는 듯 하지만 자기만을 주장하며, 타인에 관심을 가지는 듯 하지만 결국은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 직접적 소통을 대신하는 미디어가 궁극적으로는 자기 지시적이기 때문이다. 매체적 한계에 충실했던 모더니즘이 언어의 감옥에 갇혀 버렸듯이, 정보혁명의 시대 미디어 사용자들은 무한자유를 구가하는 듯 하지만 미디어의 자기지시적 테두리 안에서 놀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오늘날 경계를 벗어나려는 실험은 어느 시대보다도 예술의 중요한 역할일 수 있다. 날로 심화되고 있는 현대인의 질병인 나르시시즘은 얼굴을 비추는 연못이나 거울이 아닌 인터페이스를 통해 촉발되고 심화된다. 그래서 가상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현대의 소통은 풍요속의 빈곤을 피할 길이 없다. 이러한 독백적인 소통은 인간을 더욱 고독하게 한다. 코드의 동일성이 지배하는 미디어는 타자를 쫒아낸다. 또는 자기 식으로 길들인다. 현기증 나는 난반사만이 일어나는 가상적 소통 대신에, 작가가 제안하는 예술적 소통은 한 땀 한 땀 수행하듯이 진행된다. 거기에 쏟은 열정과 노력이 타자와의 소통을 촉발시킨다. 작가는 마주한 캔버스와 소통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박미의 작품이 타자에 열려 있을 수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이 타자 중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실존적 압박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경계선을 파열시킬 수 있는 열림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자에로의 열림은 예술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넘어서 윤리적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