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그 오래된 코드
젊은 모색 2013 전 (3.12-6.23, 국립현대미술관)
The French Haunted House : 프랑스 젊은 작가전 (3.15–6.8, 송은 아트스페이스)
이선영(미술평론가)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현대 사회에서 늘어난 청년기는 젊음의 환희와 그 이면인 절망 또한 깊게 했다. 애매하게 유예된 시간을 젊은 예술가들 또한 진하게 향유하곤 한다. 경계지대로서의 청년기의 특성은 예술의 고유한 속성과도 겹쳐진다. 예술은 젊고 또는 젊어야 하고, 모든 젊은이는 다소간 예술적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예술이나 젊음은 모두 탄핵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젊음이라는 코드와 연관된 예술 행사는 그 명분과 당위가 너무나 분명하다. 30년을 이어온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 전이나 프랑스의 젊은 작가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전시는 젊음이라는 코드와 연관된 다양한 현상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오래된 것에 대한 공통된 관심이다. 그들의 작품들에서 앞이 아니라, 뒤로의 방향성이 발견된다.
젊은 모색 전에 참가한 상당수 작가들이 수집 같은 골동 취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프랑스 젊은 작가전에서는 아예 오래된 유령을 끌어들인다. 새롭고 반짝거리는 것 보다는 오랜 시간의 켜를 둘러쓰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사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들에게 오래된 것은 새로움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것은 유사 이래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물들에 둘러싸여 사는 현대적 삶의 반영임과 동시에, 신기부터 엽기에 이르는 감수성의 장이다. 새로움의 일환으로서의 오래됨에 대한 관심은 젊은이 특유의 불안에 대한 반대급부이다. 두서없이 귀환한 낡은 사물들의 아늑한 소우주는 강요된 의미로부터의 도피처 또한 제공해준다. 그러나 양국의 차이는 크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낡음이 주는 안정감에 매달린다면, 프랑스의 경우 낡음이 주는 낯설음에 더욱 주목한다. 같이 젊음을 앞세운 전시지만, 퇴행과 의미 있는 역행 사이의 거리는 꽤 벌어져 있다.
젊은 모색 전의 참여 작가 9명 중에서 수집 및 수집에 기반 한 작품을 보여주는 이는 절반가량 된다. 이 작가들을 선정한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들의 취향인지 아니면, 지금 여기의 젊은 작가들의 특징이 반영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구민자의 작품 [대서양 태평양 상사]는 아기자기한 이국적인 상품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수집이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이국취미의 하나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 다른 작품 [스퀘어 테이블: 예술가 공무원 임용 규정 마련을 위한 공청회]는 예술가와 공무원의 접점에 대한 미술계의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된다. 그것은 아카이브로 완성될 퍼포먼스로, 이 모두를 기록하면 두툼한 자료집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재영은 마인드 컨트롤러라는 다분히 사기성이 농후한 기계장치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낡은 책자와 영상, 박물관 진열장의 사물들, 괴상한 기계장치들로 연출한다. 백정기는 유리수조 안에 황동두꺼비를 넣고 그 주변에는 문고리, 말발굽, 망치머리, 고정쇠, 끌정 등 금속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물건들을 배치했다.

백정기, [fortune plating; 삼족섬],2013년.
그것들은 지금은 기능을 잃어버려 예술의 지위를 차지한, 오래된 사물들이 주는 기이한 아우라로 가득하다. 박물관이 아니라, 과학실험실 같은 작품도 있는데, [Is of: 서울]은 한강의 오염수치를 반영하는 수제 리트머스 종이에 한강 주변의 풍경을 프린트하여 죽 널어놓았다. 그것은 사진의 인덱스로서의 측면과 더불어 한강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 자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박재영과 백정기의 ‘수집물’은 유사(類似) 과학적인 체계성이 두드러진다. 김태동의 작품은 세계를 효과적으로 수집하는 사진기라는 도구를 활용한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수집상자 안의 사물처럼 하나씩 안치된다. 아직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간대에 만난 도시인만을 골라 찍은 작품은 그들이 속해있는 환경, 그리고 동족과의 괴리감이 발견된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집요하게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진 항목들을 끝없이 늘려나가는 전형적인 수집의 방식이며, 수집가 또한 수집대상들만큼이나 소외된 존재이다.
필자가 이들 작품에서 수집을 강조하는 것은, 미술작품 자체가 이런저런 상징적 의미가 내재된 세계에 대한 축소모델이며 미술사나 미술관은 수집을 통해 가능하다는 기본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급격한 변화에 적응할 수도 없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기능만으로 개인을 환원하려는 압박이 드세질 때, 이로부터 자유롭고 자신만의 원칙이 관철되는 자그마한 소우주가 요구되며, 젊은 작가들은 그들을 소외시키는 현실에 도전하는 대신에 이런 해결책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유토피아 또한 유형화 된다. 그래서 각자의 폐쇄된 작은 진열장에는 맺지 못할 이야기들로 여전히 불안감이 떠돈다. 수집된 물건은 원래의 시공간으로부터 탈맥락화 됨으로서 물신적 매력을 발산한다. 기능의 탈각을 통해 고정된 의미의 갱신을 꾀하는 것은 예술의 주요기법이다. 김민애는 전시장에 뜬금없이 계단이나 난간을 설치함으로서 관객의 동선을 교란하며, 관람이라는 다소간 자동화된 행위를 의식하게 한다.
박제성은 시간이나 돈처럼 현대사회에서 돌고 도는 교환가치를 비판한다. 돈은 표면이 갈려서 가루로 쌓이고, 표준시는 사적 시간에 의해 상대화된다. 그림과 영상 작품에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불안감이 강조된다. 이 불안감은 몸의 증상으로 역력하다. 심래정의 드로잉과 애니메이션은 층간 소음 같은 이웃 간의 갈등이나 남녀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사건들이 인체의 경계를 변화시킨다. 유현경의 유화는 계약을 맺은 모델과의 지속적 관계의 궤적을 담는다. 타자에 대한 자신의 느낌의 묘사에서 동일자와 타자의 구별은 사라진다. 이러한 경계소멸은 열락과 불안을 동시에 자아낸다. 하대준은 지하방에서 우연히 마주친 닭에서 영감을 받았다. 치킨으로만 기억되는 이 평범한 가축은 세필과 담묵으로, 특별한 왜곡 없이도 낯선 괴물로 드러난다.

줄리앙 살로, 2013년.
그 위층에 작은 방처럼 연출된 네일 벨루파의 작품에서도 소음은 계속되는데, 주기적으로 바닥이 솟아나 딱딱 마주치는 소리에는 불길한 생기가 돈다. 그 위층의 엠마누엘 라갸리그가 연출한 작은 방에서도 소리는 들려오지만, 여기에서는 어두운 방속에 들어간 관객을 향해 쏟아지는 조명등이 더욱 공격적이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 사방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와 자동적으로 조절되는 기계에는 물활론적 활기가 감돈다. 이곳에서는 실내를 장식할 법한 작은 그림들마저도 불길한 은유로 가득한 사물이 된다. 플로랑스 뤼카와 다미엥 카디오의 작품은 한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이지만, 동시에 숨은 그림처럼 무엇이 있는지 찾아내야 하는 중층적인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꼼꼼하게 그려진 작은 그림들은 전시장 여기저기에 흩어진 채 걸려 있다.
그것들은 일련의 맥락을 상실한 채 관객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오곤 한다. 기욤 콩스탕탱이 사진으로 수집하여 컴퓨터로 보여주는 일상 속의 유령 같은 형상이나, 각 티슈같은 일상 소모품에서 유령 같은 형상을 발견하여 사진으로 찍은 줄리 베나 역시, 수집된 일상의 소우주 속에 잠재된 낯선 이미지를 불현 듯 드러낸다. 그것들은 정밀함과 세세함 속의 환상성을 보여준다. 줄리앙 살로가 멧돼지, 노루, 자고새 같은 동물들을 조합하여 박제한 초자연적 합성물은 박물지에서 발견될 법한 환상적 괴물이다. 엘자 사알이 흙으로 빗어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것은 심해의 생물체들에는 사람과 자연물과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것은 죽었으면서도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경계가 모호한 유령의 존재와 조응한다. 유령이 출몰하는 듯한 전시장의 분위기는 꼭 괴기스런 (생)물체나 괴상한 소리의 연출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죠나탕 비네가 손에 닿지 않을 높이의 벽면에 스프레이로 살짝 뿌려놓은 얼룩들은 낯선 힘이 쑥 나오거나 들어간 흔적처럼 보인다.
중독성 있는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엘레오노르 쌩타냥의 영상은 유령의 집으로 전해지는 것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학생들 모습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십대들의 표정은 평범한 풍경으로 보이는 흐릿한 배경 화면을 유령이 출몰함직한 오래된 장소로 변모시킨다. 맨 꼭대기 층에는 선글라스를 낀 현대의 유령들도 서 있다. 테오 메르시에가 만든 유령가족은 상상력을 통해 유머와 그로테스크를 결합시킨다. 그것들은 가족사진에 스며있는 죽음을 환기시킨다. 볼프강 카이저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에 의하면 그로테스크는 생경해진 세계이다. 생경해진 세계란 우리가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던 것이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을 말한다. 기계적인 것은 생명을 얻음으로서, 인간적인 것은 생명력을 잃음으로서 생경해진다. 이 전시에서 집이라는 가장 일상적 공간을 유령이 출몰하는 생경한 세계로 변화시키는 힘은 예술언어의 소격작용이다.
출전; 아트 인 컬처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