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아르코 신진 작가 워크숍
김희연
분명 사람들이 사는 장소들인데 김희연의 풍경에는 사람이 없다. 청명한 날씨 속 명료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불확실성이 감돈다. 사람들이 증발하고 텅 빈 풍경에서 생명의 기운을 뻗치고 있는 유일한 것은 공사장 펜스의 구멍 위로 나온 나무들뿐이다. 최소한의 숨구멍만 남겨놓고 생명을 에워싸는 무기물적 구조는 인적 없는 풍경의 단서를 던져주는 듯하다. 자리 잡을 틈 없이 빠르게 갱신되는 공간의 재배치는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이들을 모조리 내쫒았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터로 갔거나 더 화려한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공사장 펜스의 구멍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는 미세한 그림자를 허공과 허연 벽에 남긴다. 빛을 향해 모세관처럼 뻗은 수목의 섬세한 선들은 임시적인 구조물과 대비를 이루면서 그것들이 그 자리에 존재해야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뿌리 뽑힐 위험에 처한 나무들은 뿌리 뽑힌 채 떠도는 인간들 대신에 발언한다. 물론 그것들은 자연 고유의 깊은 침묵 속에 있지만, 가변적인 인공물과 대비되는 강한 존재감으로 공존의 필연성을 역설한다. 적막과 고요에 잠겨있는 폐허화된 풍경에는 자연과 인공, 빛과 그림자 등의 대비가 있다.
김희연의 작품은 대비되는 구조를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러나 구조가 전부는 아니다. 공시적 구조에는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재개발 예정지’로 이름 붙여질만한 과도기적 풍경이 많다. 자본의 흐름은 파괴와 건설의 리듬을 가속화시키곤 하지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전면적으로 갱신될 수는 없다. 작가는 난데없이 솟은 철탑, 뜬금없는 구멍 등, 기능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구조물을 주시한다. 물론 그것은 일부러 꾸며내거나 과장한 것이 아니다. 김희연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적 분위기가 있지만, 철저히 현실에 기초한다. 그녀의 작품이 주는 주된 감흥은 그것들이 우리 주변에 실제로 있다는 것에, 그리고 그것들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에 의존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필요에 의해 생겼을 것이고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장식적이고 기념비적 위용까지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발전지상주의적 세계관은 발전지체 현상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만들어지자마자 낡아졌으며, 생겨나자마자 죽어가고 있으며, 죽은 채 서 있다. 모든 것이 한시적이다. 가혹한 시간의 시험은 그나마 남아있는 것마저 유령으로 만든다.
김희연, [숨죽인 그늘], 리넨에 아크릴, 193.9x260.6cm, 2013년.
차승언
섬유미술과 회화를 모두 전공한 차승언의 작품은 경계 선상에 있다. 경계선 상에 있는 것들의 애매함은 이도저도 아닌 불안한 상태에 머물 수도 있지만, 때로 도전적인 실험으로 간주된다. 손수 만든 자기만의 캔버스는 직조기나 이젤처럼 수직수평의 구조로부터 출발은 하지만, 그것이 도달하는 곳은 그 좌표계의 교란이다. 작가는 캔버스라는 그림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부터 문제 삼는다. 그것은 종국에는 텅 빈 캔버스로 귀결된 모더니즘의 역사에서도 추적되는 과정이지만, 차승언의 경우, 캔버스 비워 내기를 넘어서 그것의 바탕이 실로 짜여 진 공간이기도 하다는 근본적 사실의 자각이 남다르다. 장식이 텅 빈 공간에 대한 공포증(Kinesophobia)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심리학적 가설에 의한다면, 공간을 다시금 텅 비워놓은 행위는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자연을 제 나름의 방식대로 정복한 인간, 특히 과잉 코드화된 현대인에게 무(비)의미로 귀결될 수 텅 빔은 견디기 힘든 공백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기성의 의미로 선점되고 잠식된 공간을 비워놓는 것은 새로운 의미와 기능의 조건을 창출하는 행위이다.
작업은 회화와 공예의 경계를 넘어, 짜여 지다가 풀려지다가 그려지다가 그 모두가 중첩되기도 한다. 이러한 실험은 직조기나 캔버스 틀 같은 작은 공간에서, 또는 그 틀을 뛰어 넘어 자연이나 건축, 몸 사이에서 여러 섬유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전통적 의미의 예술작품이나 쓸모 있는 물건의 제작을 넘어서 텍스트라는 조건을 실현하고, 그 속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간(間) 텍스트적이고 상호텍스트적인 것으로 만든다. 수직 수평과 그사이의 공간에서의 줄타기는 무엇인가를 담아서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투명한 매개체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언어의 조건 자체를 문제 삼기에 불투명하다. 그것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끝을 향한다. 지시대상이 아니라, 지시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다. 작가는 지시대상과 의미, 진리를 담아 전달한다고 간주되는 언어의 조건을 반성하기 위해 완성도 높은 수작업에 몰두하는 공예나 추상적 개념의 유희로 가득 찬 현대 회화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붓은 물론 직조기도 활용하는 그녀에게 풀어내기와 비워두기 등으로 실행되는 해체는 동시에 새로운 구축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나 기능을 위한 짜임새로 거듭난다.

차승언, 2013년 경기 창작 센터에서의 작품 설치 전경
박문희
박문희는 생명에 관심이 있으며, 자신의 작품이 ‘진리 탐구’와 ‘철학적 사고의 유희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생명이나 진리, 철학 같은 거대 담론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미시적이다. 그는 선험적으로 핵심 개념을 설정하고 그 구조를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표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밑도 끝도 없는 미로 같은 표면의 탐색을 통해 자연과 생명, 인간과 동물, 심지어는 복잡한 공식으로 기술된 어떤 가설까지도 제시하려 한다. 가령 작품 [어떤 동물]은 젖소에 천을 씌워 캐스팅한 작품으로, 얼룩무늬는 물감을 던져서 마무리 했다. 그것은 천이라는 유동적 사물을 캐스팅하는 그만의 방법론을 통해 젖소를 미지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 작품은 젖소를 정확히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몸체의 굴곡과 얼룩을 제시함으로서 대상의 핵심을 집어낸다. 언뜻 젖소무늬 천을 뒤집어씌운 듯이 보이지만, 그 전체는 얼룩진 강화플라스틱 덩어리일 뿐이기에, 구성면에서 중심과 주변간의 합리적 관계를 유추해볼 단서는 제거된다. 속은 불활성의 덩어리일 뿐, 본질이나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생명체에 대한 모호한 단서들이 표면에 떠올라 있는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부피는 유한하지만 표면은 무한할 수 있다. 가령 납작한 2차원적 동물에게 3차원의 공 표면은 무한하게 다가온다. 표면을 통해 접근했을 때 주체에 대한 대상은 미지의 사물이 된다. 그것은 예술에서 사물로 방점이 이동되는 현대미술의 궤적에서도 확인된다. 과학의 방식은 투명한 구조적 모델을 실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따른다. 그러나 과학사의 획을 긋는 최초의 발견들은 구조가 아니라, 표면의 탐색을 통해 이루어졌다. 미지의 현상을 규정지을 구조가 아직 부재하기에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듯한 방식을 따른다. 그래서 구조가 아닌 발생 단계에서 예술의 심미적 방식이 더 유효할 수 있다. 심미적 태도란 표면을 통해 차츰차츰 어떤 핵심에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미로와도 같은 우회로는 비효율적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가치는 더욱 크다. 박문희는 젖소 뿐 아니라, 숲을 망으로 씌우기도 하고, 걸레로 개를 만들기도 하며, 여자와 아이를 온통 머리털로 감싸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공간적 명확성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개입시키면서 진행된다. 원인과 결론이 아니라, 경험적 과정에 몰두하는 것은 생명이나 예술에 접근하는 본래적 방식이다.

박문희, [어떤 동물], FRP, 94x265x141cm, 2009년.
박현정
박현정의 작품에는 어떤 임계점을 지나 격렬하게 변형되는 순간들이 포착되어 있다. 이 순간에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으로 도약한다. 자연은 대상이 아닌 역동적 과정으로 현시된다. 작가가 작품의 키워드로 제시하는 ‘제어, 불확실성, 액체적, 증식’ 등의 어휘에서 구조와 발생간의 역학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질서가 있기에 무질서가 있고, 금기가 있기에 위반이 있고, 한계가 있기에 파열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가령 어떤 정보는 등장하자마자, 기계적으로 파편화된다. 차근차근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알고리즘은 어느 순간부터 제 기능을 잃는다. 인식의 토대는 든든하지 않고 트램폴린처럼 불안정하다. 그것은 코드 안에 이미 존재하는 탈코드, 확실성 속의 불확실성, 현실 속의 허구, 의미 안에 내재된 무의미, 메시지를 교란하는 소음(noise)의 몫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이미지는 고체를 넘어서는 상태들이 많다. 물이나 구름, 난류 같은 원소나 기상상태가 연상 되고, 그것들은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변환중이다. 작가는 고체에 기반을 둔 견실한, 그렇지만 독단적인 실증과학에 유동성을 개입시킨다.
미셀 세르가 말하듯이, 가장 단단하고 굳은 것들도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점성이 강한 액체에 불과하며, 모든 체계는 묶인 에너지이다. 물질의 경계를 넘어선 에너지는 그 가장자리가 구름처럼 변화무쌍하다. 박현정의 작품에서 풍부하게 나타나는 유체역학의 이미지는 물리학과 생물학, 의학과 심리학, 자연과학과 예술의 경계도 허물어뜨린다. 분리될 수 없는 자연을 코드화하면서 건설된 문명의 입장에서 이러한 변환들은 재난의 이미지일 수 있다. 가령 그것은 적절한 한계에 충실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몸속에서 이상 증식하는 암세포 같다. 이러한 비정상적 현상은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 생명의 과정에 포함된다. 박현정의 작업은 항생제를 통해 개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보다는 고름을 터트림으로서 치유를 도모하는 편이다. 경계를 파열하기 위해서 경계는 구축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회화를 넘어서 유사과학적인 다이어그램이 자주 등장한다. 자연은 물론 무의식과 몸까지 조밀하게 체계화된 현대사회에서 우연적 사건이 야기할 수 있는 파장은 더욱 크다. 확실성은 불확실성 또한 높이는 것이다. 통제가 강할수록 임기응변이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도 커진다.

박현정, [무제], 종이 위에 연필, 펜, 수채, 35.6x27.9cm, 2013년.
출전; 2013 아르코 신진 작가 워크숍(집중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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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김희연, 차승언, 박문희, 박현정이 참여한 집중 크리틱은 2주간 진행되었다. 1주에 2명씩. 한 명당 한 시간 정도를 계획했다. 작가 한 명 당 30분 정도 발표하고 30분을 코멘트 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으나, 늘 3시간은 넘어서 끝난 것 같다. 이미 작가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만, 발표를 함으로서 다시 한 번 자신을 정리하고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를 가지려 하였다. 글도 마찬가지지만 말도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어디가 비어있는지 비로소 자각하게 된다. 아무리 전시에 대한 완벽한 구상을 가지고 준비했어도, 최종 디스플레이를 하는 순간에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글도 참고자료와 작가 인터뷰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어떤 결론을 내기 위해 퍼즐을 맞추는 순간, 비어있는 부분이 드러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뒤따르면서 최초의 자료나 의도와는 다른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하고 난 후 더 말을 하고 싶어지며, 글을 쓰고 난 후 또 쓰고 싶어지고, 그 힘든 전시회가 끝난 후 다시 전시회를 하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말하고 글 쓰고 작업하는 기회를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혼자 생각만으로는 공회전하기 일쑤이다. 집중 크리틱에서의 발표는 그러한 기회를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로 누군가 뭘 조언해주거나, 심지어는 무슨 ‘해결책’을 제시해주기 이전에, 스스로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깨닫는 것이다. 거기에 같이 참여한 이들로부터 어느 부분이 모호하다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앞으로의 과제가 더욱 확실해진다. 토론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무의식적 전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시각 예술 분야의 작가에게도 이제 말이나 글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층층이 제도화된 미술계의 구조 속에서 작품 뒤에만 숨어서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미술계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비평의 기회가 제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에 비해 말을 더 잘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말은 표현이 부족한 작품을 보충하거나 미화하며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작품은 별로인데 말만 잘하는 사기꾼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그 문제 때문에 자신이 늘 손해보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므로, 그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우리 반 작가들은 대체로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작업에 온힘을 다 쏟는 이들이 내향적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리라. ‘개념미술’을 한다면서 대략 말 빨만 키우는 이들보다는 내실이 있어 보였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발표 및 상호비판의 기회를 가져는 봤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논의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것은 앞으로 미술계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계속 이어질 대화의 시작이었다. 나의 짧은 평문은 그 대화의 일부이다. 작가들의 말과 글에는 사실과 희망사항이 함께 있다.
희망사항 역시 그 작가의 일부이며, 아직 현실화되지 못한 잠재력이기에 그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정보가 된다. 그러나 희망사항 부분이 너무 강하면, 예술 역시 종교나 윤리, 정치처럼 헛된 당위성에 매몰되고 만다. 사실은 이질적이지만, 당위는 동질적이다. 희망사항은 대략 비슷하기 때문이다. 뭔가 독특한 작가가 되려 한다면, 자신의 현실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해보는 것, 그것이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함인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독특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객관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말과 글이 딸리면, 또는 그러한 ‘부차적인’ 것에 신경 쓰거나 투자하기 싫다면 작품을 더욱 열심히 하면 된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말을 덧붙이는 것이 손해가 될 정도로 작품을 객관적으로 세워놓으면, 그것들은 작가 없이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